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60화 (60/160)

60화 : 낯선 이름

“예……? 아니, 저는-”

“시에라, 엄마야! 오, 내 딸! 내가 얼마나 너를 찾아다녔는데!”

부인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내 뒤에 서 있던 라비가 재빨리 다가와 부인을 저지했다. 라비의 팔에 가로막힌 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엄하다! 감히 누굴 막아서는 게야! 내가 누군 줄 알고!”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합니다. 이분은 부인의 딸이 아니십니다.”

“아니야!!!”

별안간 부인이 귀가 찢어질 듯한 고성을 내질렀다.

갑작스런 상황에 너무 놀란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부인의 퀭한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시선은 라비의 어깨 너머에 있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저 애는 내 딸이야! 내 딸 시에라를 돌려 달란 말이야!”

계속되는 고성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광장 근처에 있던 사람들까지 전부 우리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수군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하지만 부인은 주위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이 계속해서 소리쳤다.

“이 목걸이에 그려진 그림을 봐! 저 아이랑 똑같잖아! 이 그림도, 저기 있는 서 있는 여자도 모두 내 딸 시에라라고!”

“이분의 보호자 안 계십니까? 어서 데려가셔야 할 것 같은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라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부인이 나를 향해 애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에라, 너도 말 좀 해봐! 엄마 딸이라고 어서!”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의 딸이 아니라고 말해야 했지만, 절박하다 못해 간절한 부인의 표정을 보니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계산대에 있던 일리드가 소란을 듣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라비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나를 보고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인가? 이분은 누구-”

중년 부인을 지나쳐 오던 그의 시선이 그녀와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 일리드의 눈은 당혹감으로 커졌고, 중년 부인의 얼굴엔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이분이 왜 여기에……?”

급격히 사색이 된 일리드가 말끝을 흐렸다.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던 중년 부인은 일리드의 목소리를 듣더니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일…리드…….”

잠시 동안 흐른 정적은 곧 부인의 울부짖는 소리에 깨지고 말았다. 주변의 모든 이가 놀라 귀를 틀어막았다.

이 난리 통 속에서 아무런 미동도 없는 이는 일리드 하나뿐이었다.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제 앞에선 부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에라, 어서 도망가! 이 사람은 엄마가 잡고 있을 테니까, 넌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멀리 도망가!”

귀신에 홀린 듯 울부짖던 부인이 손에 쥔 로켓을 가판대 모서리에 힘껏 내리쳤다. 쫙 하는 소리와 함께 목걸이가 날카롭게 조각나 깨졌다. 부인이 높이 손을 들어 올렸다.

“죽어!”

절규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햇빛을 받은 목걸이 조각이 번쩍 빛을 냈다. 날카로운 파편이 그대로 일리드의 얼굴을 향했다.

“대공 전하!”

깜짝 놀란 중앙 기사들이 재빨리 일리드와 중년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기사가 간신히 옷자락을 잡아챈 덕분에 부인의 몸이 뒤로 당겨졌다. 그러나 조각난 목걸이는 이미 일리드의 얼굴을 스친 뒤였다.

“죽어! 어서 죽어! 이 망할 놈의 인간!”

기사들에게 제압 당하면서도 부인은 욕설과 저주를 멈추지 않았다. 반항이 거세지자 기사들이 부인을 결박한 손에 힘을 주었다. 한 기사가 부인의 머리를 거칠게 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부인이 캑캑거리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놓아라.”

소란 속에서 일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놓아 드려라.”

“예?”

뜻밖의 말에 기사들이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황족 시해죄입니다! 지금 당장 사살해도 될 만큼 큰 죄입니다!”

“당장 놓아 드리라고 말했다!”

일리드가 언성을 높이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기사의 목에 댔다. 서슬퍼런 칼날이 금방이라도 기사의 목을 벨 듯 번쩍였다.

“대, 대공 전하!”

이해할 수 없는 일리드의 행동에 기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일리드의 태도는 단호했다. 하는 수 없이 기사가 부인을 제압하고 있던 손을 풀었다.

부인이 잡혔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숨을 골랐다. 그때,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숄로 얼굴을 가린 여인 한 명이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 테니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이분과 아는 사이인가?”

“예, 저희 집에서 머물고 계십니다.”

“모시고 가라.”

“하지만 대공 전하! 조사도 하지 않고 이리 보낼 수는 없습니다!”

격분한 기사들이 소리쳤지만 일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숄을 두른 여인이 중년 부인을 끌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부인은 일리드를 향해 미친 사람처럼 악담을 퍼부었다.

“저분이 일리드 대공 전하래. 남부에서 온 황제 폐하의 조카!”

“아니, 저 미친 여자는 폐하의 조카를 찔러 놓고도 그냥 가는 거야?!”

“대공 전하와 미친 여자가 아는 사이 같은데?”

군중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이 재빨리 사람들을 해산시켰지만 삼삼오오 흩어진 사람들은 여전히 조금 전 일어났던 일에 대해 쑥덕거렸다.

“일리드.”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내가 라비를 밀치고 일리드를 향해 다가갔다. 일리드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멍하니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엔 중년 부인이 깨뜨린 목걸이 파편이 떨어져 있었다. 그 안에 담긴 내 초상화 위로 깨진 유리 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일리드?”

“…….”

“일리드, 괜찮아요? 얼굴에 피가.”

일리드는 제 뺨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여전히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상처가 깊어 보이진 않았으나 흰 피부에 대조되는 붉은 자국 때문에 당분간은 흉이 질 것 같았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일리드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 손을 뻗어 흐르는 피를 닦아주자, 그가 멍해진 시선을 내게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시… 에라…….”

일리드의 입에서 중년 부인이 목 놓아 불렀던 이름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는 슬픈 목소리로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불렀다.

“시에라…….”

“일리드, 그게 무슨……?”

갑자기 일리드까지 왜 이러는 걸까. 왜 나를 모르는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는 걸까.

이상하다 못해 심장이 멎는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일리드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몽롱했던 그의 푸른 눈동자에 내 은회색 눈이 비치는 순간, 그는 오랜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렸다.

“이슈텔.”

그가 제 뺨에 닿아있던 내 손을 밀어내자 피 묻은 손수건이 손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먼저 궁으로 돌아가세요.”

“당신도 같이 가요.”

“아니요, 저는 나중에 가겠습니다.”

“그럼 나도 이따가 갈게요. 지금은 같이 있어요.”

“먼저 가시라니까요.”

“당신이 이렇게 떨고 있는데 나 혼자 어떻게 가요!”

중년 부인을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일리드는 계속 몸을 떨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가 내게 닿은 손을 빼내며 나를 세게 밀쳐냈다. 이미 온몸에 힘이 없던 탓에 너무 쉽게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급히 다가온 라비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대공 전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말문이 막힌 나 대신 라비가 일리드에게 벌컥 화를 냈다.

“아…….”

라비의 질책에 이성이 돌아왔는지 일리드가 재빨리 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텔리아 경, 공작 부인을 모시고 먼저 환궁해주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비껴있었다.

* * *

일리드는 광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조용히 묻고 싶어 했지만 황궁 기사단은 아니었다.

수도 경비를 맡고 있던 율리언은 낮에 있었던 사건을 듣자마자 조사에 착수했다. 일리드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감히 황족을 습격한 범죄였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라비 텔리아도 상황을 증언하기 위해 율리언에게 불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라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라비가 돌아왔다.

“어서 와요, 텔리아 경. 대체 그 부인이 누구랍니까?”

나는 그를 의자로 안내하며 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라비의 표정이 퍽 곤란해졌다.

“릴체 경이 당분간 공작 부인께는 함구하라 말씀하셨는데…….”

“예? 아니, 무슨 일이길래 제게 말하지 말라는 건가요?”

율리언이 그렇게 말했다니,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 중년 여인은 대체 누구고, 왜 일리드를 공격한 걸까. 그리고 왜 나를 자신의 딸로 착각한 걸까?

광장에서 보았던 일리드의 표정이 떠올랐다. 당혹감과 놀라움, 그리고 슬픔과 절망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를 보던 그 눈빛. 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허망하고 공허했던 시선이 자꾸만 생각났다.

“휘어튼 부인이라고 합니다. 시에라 휘어튼의 모친.”

깊이 고민하던 라비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시에라 휘어튼이요?”

“일리드 대공 전하의 전 약혼녀입니다.”

“약혼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오래전에 들었던 말 하나가 떠올랐다.

투렌 남작 부인과 로제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일리드의 약혼녀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말.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를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그녀의 어머니와 마주치게 되면서.

“일리드 대공의 약혼녀라면 남부의 대귀족으로 알고 있는데, 그 어머니가 어찌 그런 모습으로 수도에 있단 말입니까?”

“릴체 경도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남부 가신 몇 명을 불러다 조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 하나같이 잘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더랍니다. 자신들은 휘어튼 가문과 왕래가 없었다고 하면서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공비가 될 여인의 가문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요?”

“그렇다고는 하는데……. 아마 저희가 모르는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요?”

라비의 초록빛 눈동자가 묘한 빛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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