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그림의 의미
“폐하께서 금지시킨 그림이라고요?”
로제의 앞으로 다가간 카리나가 심기가 불편한 듯 세게 인상을 찌푸렸다.
“폐하께서 전시를 금지시킨 그림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잔혹하거나 신체가 적나라하게 묘사된 그림. 폐위된 군주들과 예외적으로 포함된 카시르 2세의 초상 아닙니까? 그런데 파벨루 황제와 알릭스 황태손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요?”
“푸흡.”
카리나의 대답에 여기저기서 황당하다는 듯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귀부인들이 급히 헛기침을 하며 웃지 않은 척했으나 카리나는 이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린턴 자작. 카시르 2세가 파벨루 황제야. 황위에 오르면서 바꾼 이름이지.”
곁에 있던 에보니가 작은 목소리로 카리나에게 말했다. 그제야 카리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카시르 2세에 대해 안다면 황제 폐하께서 왜 그의 그림을 금지시켰는지 알 것이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카시르 2세가 그려진 그림을 홀 중앙에 떡하니 걸어 놓은지 모르겠네요. 린턴 자작, 황제 폐하와 가까운 사이라고 하시니 어디 설명을 좀 해보시죠. 폐하께서 카시르 2세의 그림을 허가하신 건가요?”
“그, 그건 아니지만.”
따박따박 쏟아지는 로제의 말에 카리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로제가 잡은 먹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세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설마 황궁의 안살림을 맡으신 분이 이 정도의 역사적 지식도 없는 건 아니겠죠? 카시르 2세는 친형인 황태자의 아들이자 계승서열 1위였던 알릭슨 황태손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했어요. 이 그림의 배경이 바로 황태손이 살해당한 고리야 평야입니다. 사냥대회를 가장하여 행차한 곳에서 자신의 조카를 죽인 거지요.”
로제의 말이 맞았다. 황제 폐하께서 카시르 2세의 그림을 금지시킨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예로부터 삼촌과 조카는 황위를 둔 가장 강력한 정적으로 여겨졌다. 그중에서도 카시르 2세는 적통 후계자를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암군으로 손꼽혔다.
비록 카시르 2세의 아들과 손자는 부황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없어 그를 대제라 칭하고 알릭슨 황태손을 반역자라고 칭하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에는 그 평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황제들은 자신의 직계 자손을 지키고 야심 많은 형제를 견제하고자 카시르 2세를 깎아내리는 작업을 시행했다. 대제의 칭호는 폐기되었고, 반역자의 오명을 썼던 알릭슨 황태손은 추존 황제로 추숭했다.
누구라도 직계 황손을 해하고 황위를 찬탈하면, 수백 년이 지난 후에라도 반드시 그 죄를 물을 것이라는 황가의 의지였다.
현 군주인 헤브론 황제는 황족들 가운데 보기 힘든 가족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은 형제들을 아꼈으며 조카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그런 황제의 성정상 아무리 조상이라 할지라도 카시르 2세의 과오는 몹시도 불편한 것이었다.
헤브론 황제는 선제들의 유골이 묻힌 신전에서 파벨루의 관을 빼내 황가의 방계들이 묻힌 언덕으로 이장했고, 그 자리를 알릭슨 황태손의 유골로 대신하게 했다.
더불어 황궁 초상화 방에 걸려있는 카시르 2세의 초상화를 없앴으며 황궁 안에 다시는 그의 그림을 걸지 말라 명했다.
아들을 잃은 헤브론 황제는 필연적으로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황가의 삼촌과 조카는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인식을 없애고 싶은 마음에 그런 강경한 처사를 내리셨던 것이다.
“어머, 린턴 자작이 파벨루가 카시르 2세인지 몰랐나 보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속성으로 공부한다 한들 지식과 교양이라는 게 어디 하루아침에 채워지겠나.”
“리세리 영애가 아니었으면 깜빡 속을 뻔했네. 우리를 데려다 기만하는 것도 아니고, 어찌 폐하께서 금지시킨 그림을 걸어놓고 보여줄 수가 있죠?”
“기분이 몹시 불쾌하네요. 전임자인 윈테라 공작 부인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어요.”
“이래서 남의 일을 우습게 보고 함부로 뺏어오려 하면 안 된다니까요.”
귀부인들은 파벨루와 알릭슨의 그림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 자신들의 실수를 카리나의 무지함으로 돌리기 위해 일부러 더 과장되게 그녀를 망신 주었다.
끌끌거리며 혀 차는 소리와 경멸의 눈초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카리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어떤 말을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에보니 블라딘 또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카리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철저히 혼자 고립된 것이다.
“저 먼저 집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가는 김에 미술관에 들러 관장님께 빈 자리를 하나 만들어 놓으라고 귀띔해줘야겠어요. 어차피 이 그림은 조만간 궁에서 반송될 거니까요.”
로제가 외투를 챙기며 내게 인사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홀을 떠났다. 로제를 시작으로 귀부인들이 하나둘 홀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오늘 모임의 주최자인 카리나를 싹 무시한 채 내게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생했어, 이슈텔.”
집으로 돌아가기 전, 투렌 남작 부인이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어. 황제 폐하께 가봐야 해서. 나중에 봐, 카리나.”
유일한 우군인 에보니마저 급히 자리를 떠나자 카리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제 넓은 홀 안엔 남겨진 이는 나와 카리나뿐이었다.
그녀와는 더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홀 문 쪽으로 구두 끝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 카리나가 소리쳤다.
“일부러 그러셨죠?”
“뭘?”
“날 골탕 먹이러 꾸민 일이 아니냐 묻는 겁니다!”
카리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홀 안 가득 쩌렁쩌렁 울렸다.
“당신은 전부 알고 있었잖아요! 같이 그림을 고르러 갔던 날, 왜 내게 말해주지 않은 겁니까? 오늘이 오기만을 벼르고 있던 거죠? 사람들 앞에서 나를 망신 주고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그녀는 분노와 모멸감이 섞인 눈빛으로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어쩐지 너무 쉽게 일을 넘겨준다 생각했어. 결국 이러려고 그랬던 거야! 그래서 이제 속이 후련하십니까? 날 욕심이나 부리다 된통 당한 골 빈 계집으로 만들고, 당신은 끝까지 고고한 척하며 내가 당하는 모습이나 구경하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 이상 어찌 더 똑바로 말한단 말입니까!”
“널 웃음거리로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이야.”
“뭐라고요?”
“기억나지 않아? 저 그림을 고르던 날, 내가 했던 말.”
내가 턱 끝으로 파벨루와 알릭슨의 그림을 가리켰다.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었지. 다른 그림을 둘러보지 않아도 되겠냐고. 그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하나?”
내 말에 카리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날의 기억이 어렴풋이라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제가 꽤 좋은 그림을 고른 모양입니다? 그렇죠?’”
“…….”
“……라고 말하고 더는 내게 묻지도 않고 관장을 불렀지.”
카리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세게 쥐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그녀의 가슴이 쌕쌕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크게 들썩였다.
“내가 이 이상 어찌 더 똑바로 말해줘야 했을까?”
나는 몸을 돌려 홀을 가로질러 걸었다. 문을 향해 걷는 동안 내 안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들어왔다.
가장 먼저 느껴진 감정은 우습게도 통쾌함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감히 황태자비의 권한을 넘보다 된통 당한 모습을 보니 조금은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다.
오늘 카리나가 당한 일은 곧 사교계는 물론 황궁 안에도 쫙 퍼질 것이다.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 이번 기회에 폐하께서 카리나에게 황궁 살림을 맡기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길 바랐다.
하지만 짧은 통쾌함이 지나간 자리엔 묘한 불쾌함이 남았다. 그 감정은 카리나가 아닌 나를 향해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는 고고한 척이나 하며 그녀가 당하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했다.
물어보지 않더라도 내가 먼저 알려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그림은 폐하께서 금기시하는 것이니 다른 그림을 고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 예상했던 바였다.
귀족들은 카리나처럼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상류사회에 진입하려 할 때, 완벽하게 적응하는 것보다 문제를 일으키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걸 보며 자신들의 알량한 우월감을 채우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리나는 무척이나 물어뜯기 좋은 상대였다. 카리나의 표현대로 고고한 나를 대신해, 그들이 카리나에게 경멸 어린 말을 던지게끔 계획한 것이었다.
‘마냥 통쾌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만도 아니네.’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었다. 씁쓸한 뒷맛만 남은 기분에 맘이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잠시만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카리나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나를 보는 그녀의 금빛 눈동자 역시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만약에… 그러니까 만약에…….”
카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제가 공작 부인께… 저 그림에 대해 조금 더 물었더라면…….”
“…….”
“그랬다면 제게 알려주셨을 겁니까?”
나는 카리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호흡은 이전보다 훨씬 규칙적이었고 상기되었던 얼굴도 본디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답해 주세요, 공작 부인.”
내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저 그림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온 이유는 그녀가 망신당하는 것을 보기 위함이었으니까.
카리나는 내가 수년간 해온 일을 한마디 상의도 없이 빼앗아 간 데다, 거만하게도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했다. 오늘의 결과는 응당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른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선택하기 전, 그녀가 내게 짧은 질문이라도 했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녀를 기꺼이 도와주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나조차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이런 쓸데없는 질문은 잘하면서 정작 필요했을 때는 묻지 않는군.”
나는 차가운 눈길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내 안에 남은 감정도, 그녀가 내게 던진 질문도. 하나같이 이상한 것 투성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