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티파티와 경고(2)
꼿꼿한 자세와 초록빛 안광이 번쩍이는 차가운 얼굴. 릴체 후작 부인이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후작 부인. 여기는 어떻게……?”
내내 즐거운 표정이던 카리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비쳤다.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릴체 후작 부인은 카리나의 파티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모양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많고 복잡한 자리를 극도로 싫어하는 릴체 후작 부인은 젊은 시절에도 사교계에 자주 발걸음 하는 편은 아니었다.
노년에 들어서는 황실과 가문의 일이 아니라면 어지간한 모임에는 초대장조차 받지 않았다. 그런 후작 부인이 초대장 하나 없이 누군가의 파티에 찾아온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릴체 후작 부인께서 어찌 이 자리에?”
“그러게 말이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린턴 자작의 파티인데.”
후작 부인의 등장에 귀부인들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그들의 말대로 이곳은 릴체 후작 부인이 등장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릴체 후작 부인은 실란다 백작가를 무척이나 아꼈으며, 친인척 가문의 명예를 무척이나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카리나가 에보니와 손을 잡고 실란다가를 박살 냈을 때, 사람들은 릴체 후작 부인이 카리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의외로 후작 부인은 잠잠했고, 이렇게 카리나의 파티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재미난 자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와봤는데, 이 늙은이를 쫓아내진 않을 테지?”
릴체 후작 부인이 차가운 눈초리로 카리나를 훑어보았다. 카리나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는 공손히 후작 부인을 안내했다.
“미리 말씀을 주셨으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다음에 오실 때는 꼭 연락을 주십시오. 후작 부인이라면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초면인데 퍽 붙임성이 좋군.”
후작 부인이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을 맞이했다. 노부인의 딱딱한 걸음걸음마다 귀부인들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마침내 후작 부인이 상석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할머니를 향해 인사드렸다.
“오랜만이구나, 이슈텔.”
“그간 건강하셨어요, 할머니?”
“후작 저에 얼굴 좀 비치라고 했는데, 어찌 한 번을 오질 않느냐?”
“죄송해요. 요새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원, 핑계는……. 네 얼굴 한 번 보려고 내가 이런 자리까지 나와야겠느냐?”
릴체 후작 부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귀부인들이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반가움의 표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릴체 후작 부인. 에보니 블레어 블라딘이라고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보니가 후작 부인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블라딘이라는 말에 릴체 후작 부인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에보니의 보랏빛 눈동자엔 어린아이 같은 설렘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 블라딘 백작.”
처음 내가 에보니를 보았을 때처럼, 고모할머니 역시 유독 백작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리고 그날처럼, 에보니 역시 호칭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 후작 부인을 이리 가까이서 뵐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습니다.”
“늙고 지쳐 검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 지금은 그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노인일 뿐이니 영광이랄 것도 없네.”
“그렇다 한들 후작 부인의 무훈이 빛을 바래겠습니까? 후에 시간이 되신다면 제가 검 잡는 모습을 한 번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 집에 오시는 건… 아마 힘드실 테고, 초대해주신다면 제가 한 번 후작 저에 가겠습니다.”
“……거참 당돌한 블라딘이군. 자넨 내가 불편하지도 않은가?”
“예? 제가요? 전혀요. 제 아버지라면 몰라도 저는 후작 부인을 불편해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내 무훈의 대부분이 자네 집안을 끌어내리는 데 쓰인 건 알고?”
“예, 압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잖습니까.”
“내 정적들의 후손은 썩 성격이 좋군. 제 핏줄과는 다르게.”
릴체 후작 부인이 의외라는 듯 에보니를 흘겨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언제까지 다들 그렇게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을 거야? 파티 시작 안 하나?”
릴체 후작 부인의 불호령에 카리나가 상석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곧 하녀들이 정갈한 음식과 가벼운 술을 들고 들어왔다. 귀부인들의 앞에 맛 좋은 음식들이 놓였다.
“오늘 제가 마련한 자리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카리나가 크게 미소 지으며 잔을 들어 올리자 귀부인들도 함께 잔을 들었다. 단기간에 배운 귀족 예법치고는 꽤 그럴싸한 자세였다.
“내 술도 한잔 받지.”
릴체 후작 부인이 하녀에게서 술병을 받아들었다. 귀부인들의 시선이 모두 후작 부인의 손을 향했다. 까칠한 성격의 후작 부인은 아무에게나 술을 따라주는 일이 없었다. 그녀에게서 술을 받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도 무척이나 영광스런 일이었다.
카리나가 후작 부인에게 다가가 잔을 바치자 여기저기서 부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카리나는 당혹스러움 반, 자랑스러움 반인 표정으로 후작 부인의 술을 받았다.
쪼르르 술 흐르는 소리와 함께 황금빛 잔에 붉은 포도주가 채워졌다. 릴체 후작 부인이 냉담한 얼굴로 카리나의 금빛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슈텔의 도움으로 황궁에 들어왔다지?”
“그렇습니다, 후작 부인.”
“그 덕에 평민이 작위도 하사받아 이런 호사스런 파티도 벌이는 거고?”
“……예.”
“내 조카 손녀는 나와는 달리 성품이 참 좋은 아이지.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대가 없는 호의도 베풀 줄 알고.”
“…….”
“그러니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이슈텔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슴에 새기며 살도록. 얼마나 오래 지낼지는 모르겠지만.”
뼈가 담긴 후작 부인의 말에 긴 식탁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 역시 후작 부인의 말뜻을 바로 알아채고는 안색이 굳어져 시선을 내렸다.
후작 부인이 따라주던 포도주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붉은 포도주가 잔을 타고 내려와 카리나의 손을 적셨다. 떨리는 손끝에서 떨어지는 포도주는 마치 피처럼 섬뜩했다.
“린턴 자작에게 물에 적신 수건을 갖다 주어라.”
후작 부인은 그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 술을 부었다. 곧 하녀가 흰 수건을 카리나에게 가져다주었다. 릴체 후작 부인은 그제야 기울였던 포도주 병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뭐 하나? 어서 식사들 시작하지 않고.”
후작 부인의 말에 귀부인들이 허둥지둥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 * *
카리나에게 섬뜩한 경고를 남긴 릴체 후작 부인은 식사를 마친 후, 바로 자리를 떠났다.
후작 부인이 사라지자 긴장감이 흘렀던 식탁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귀부인들은 제 옆자리에 앉은 이들과 삼삼오오 대화하기도 했고, 카리나에게 다가가 황제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황제 폐하의 안부를 왜 린턴 자작한테 묻는대요? 옆에 공작 부인이 계신데.”
로제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카리나의 주변에 모여든 귀부인들을 째려보았다. 투렌 남작 부인도 불쾌한 표정이긴 매한가지였다.
“이슈텔, 저 여자가 자꾸만 네 것을 탐내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맞아요, 공작 부인. 이번 일을 계기로 한껏 의기양양해서 설치고 다닐 걸 생각하니, 에휴.”
나는 대답 대신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카리나가 연 파티는 제법 성공적이었다. 몰리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음식은 맛있었고, 손님들을 대하는 카리나의 태도 역시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비록 타고난 신분은 낮을지언정, 카리나에겐 그 모든 것을 상쇄시킬 만한 매력이 있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말솜씨. 처음엔 재미있는 가십거리를 구경하러 온 귀부인들이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카리나에게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돌아서면 늙은 황제를 홀린 요부라며 뒷말을 할 거면서…….’
나는 사교계의 순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카리나 같은 특이 케이스는 호기심 많은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너무나도 쉬웠다.
겉으로는 다정한 척, 친근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카리나와 폐하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어 안달이 났을 것이다.
“자, 그럼 식사도 마무리됐고 하니 자리를 옮겨 볼까요?”
카리나가 귀부인들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감사하게도 여기 계신 윈테라 공작 부인께서 얼마 전 제게 황궁의 안살림을 위임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제가 선대 황후 폐하께서 하시던 업무를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카리나가 나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본궁으로 가서 새로 들어온 그림을 구경하시지요. 제가 처음으로 고른 그림들이니 직접 설명해드리고 싶네요.”
“자, 그럼 슬슬 자리를 옮겨 볼까요?”
에보니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필두로 귀부인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아, 저도 가야 하나요?”
로제가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펴며 칭얼댔다.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로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귀부인들을 따라 황궁 홀로 나갔다.
앞장을 선 카리나가 홀 안 가득 채워진 그림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황궁을 장식했던 초상화는 전부 미술관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앞으로는 황제 폐하께서 선호하시는 풍경화로 궁을 장식할 것이니 여러분들도 종종 그림을 구경하러 오시지요.”
카리나의 말이 끝나자 귀부인들이 하나둘 흩어져 그림을 살펴보러 갔다.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은 적 없지만, 미추를 구별하는 카리나의 안목은 매우 뛰어났다. 미술관에서 골라온 그림들 역시 황궁 홀과 매우 잘 어울려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냈다.
“짜증나…….”
그림을 보는 귀부인들의 감탄 사이로 로제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투렌 남작 부인과 함께 홀 가운데로 갔다.
이미 많은 귀부인들이 몰려있는 자리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언덕 위에서 초원을 내려다보는 남자와 소년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네요. 진짜 동부에 있는 초원을 옮겨다 놓은 거 같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매번 초상화만 걸려있던 자리에 풍경화가 있어 어색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썩 괜찮네요.”
“다음엔 우리 집에 있는 그림도 풍경화로 바꿔봐야겠어요.”
“아니, 이게 뭐야?! 누가 이 그림을 황궁에 가져다 놓은 거야?!”
별안간 귀가 찢어질 듯한 고성이 황궁 홀을 가득 흔들었다. 놀란 귀부인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로제를 쳐다보았다.
귀부인들 사이를 거칠게 헤집고 들어간 로제가 씩씩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림 앞에 서더니 가장자리에 그려진 남자와 소년을 가리켰다.
“여러분 지금 이게 무슨 그림인지는 알고 칭찬하시는 거예요? 이건 파벨루 황제와 알릭슨 황태손이에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황제, 폐하께서 전시를 금지시킨 인물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