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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56화 (56/160)

56화 : 티파티와 경고(1)

황궁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푸른색과 은빛이 가득했던 궁전은 따뜻한 금빛과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선대 황후가 아끼던 도자기와 티세트는 두꺼운 종이에 겹겹이 싸여 응접실 창고 뒤쪽으로 보내졌다. 대신 투명하고 소박한 유리그릇이 밖으로 나왔다.

황궁 하인들은 공작 부인의 취향이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듯 변했다며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황궁의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고 다니는 린턴 자작을 보고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윈테라 공작 부인의 일을 린턴 자작에게 맡기셨다던데.’

‘세상에 별일이 다 있군. 그래도 일은 제법 하는 모양인데…….’

‘그럴싸하게 흉내만 내는 거지. 아무렴 타고난 대귀족과 하녀 출신의 안목이 같겠나.’

‘그런데 공작 부인께서 순순히 안살림을 내어준 것도 희한하지 않아?’

사용인들은 저마다 나와 카리나에 대해 한 마디씩 늘어놓곤 했다.

카리나가 실란다 백작을 실각시켜 리젠트라가의 눈 밖에 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감히 공작 부인의 일을 빼앗은 하녀 출신 자작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그러나 나는 괜한 구경거리를 만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황제 폐하의 명이라고 하니 항의한다 해도 내 꼴만 우스워질 터였다.

‘건국제 때 있었던 드레스 사건이 생각나는군.’

황제 폐하께선 나와 카리나가 반목할 때, 그녀의 편을 들어주셨다. 이번에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때처럼 감정에 휘둘려 폐하와 얼굴을 붉히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잠자코 가만히 있기엔 나를 기만하는 카리나의 행보가 무척이나 괘씸했다.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집었다. 황립 미술관에서 보낸 편지였다. 안에는 이번 달에 새로 들여올 미술품 목록이 쭉 적혀있었다. 지금쯤 카리나 역시 같은 편지를 받았을 것이다.

* * *

“앞으로 황궁에 전시될 모든 미술품은 여기 있는 린턴 자작이 고르게 될 겁니다.”

내가 미술관장에게 카리나를 소개했다. 관장이 어정쩡한 자세로 카리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생각지도 못한 인수인계에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카리나가 미소를 지으며 관장의 인사를 받았다.

커튼, 침대보, 식기 등 비교적 쉽게 교체 가능한 물건들과 달리, 미술품을 다루는 일은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관장과 상의하여 그림을 선정하고 대금을 치른 후, 계절이 바뀌면 돌려주는 일까지. 욕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었다.

카리나 본인도 그걸 느꼈는지 이 일에서만큼은 내게 인수인계를 부탁했다. 오늘 미술관에 그녀와 함께 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새로 온 미술품들은 어디 있죠?”

“아, 여기 있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카리나의 물음에 관장이 나와 그녀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천천히 감상하시고 선택해주시면 황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관장이 나와 카리나를 남겨두고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나와 그녀는 아무런 대화 없이 전시관을 걸었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구두 또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벽면에는 다양한 종류의 그림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계절감에 알맞은 풍경화, 남부에서 나는 과일과 꽃을 그린 정물화, 귀족들의 모습을 그린 인물화 등 무엇 하나 빠짐없이 아름다웠다.

“제가 지금까지 지켜본 바, 황궁에 걸린 그림들은 대부분 초상화던데 이제부터는 풍경화로 바꾸어 볼까 합니다.”

카리나가 가로로 길게 그려진 그림 앞에 섰다. 초록이 가득한 평화로운 초원 위에 여러 동물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폐하께서 거동이 불편하시어 황궁 밖으로 나가지 못한 지도 오래되셨죠. 매번 황궁에서 똑같은 얼굴들을 보는 것도 지겨우실 터인데, 그림까지 초상화만 보시면 아니 될 일이지요.”

생동감과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그림 가장자리에는 초원을 내려다보는 남자와 소년의 다정한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카리나가 만족스러운 듯 그림을 바라보았다.

“풍경을 강조하고 인물은 비교적 축소해 둔 구조가 마음에 듭니다. 이런 구조의 그림이라면 폐하께서 이 인물의 시각으로 그림을 감상하실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드네요. 공작 부인은 어떠신지요?”

「파벨루와 알릭슨 : 전야(戰夜)」

그림 아래 금속 합판에 새겨진 작품명을 보았다. 내가 카리나에게 말했다.

“왜 내 생각을 묻는 거지? 폐하께 가서 내 일을 가로챘을 땐, 내 의견을 물었던가.”

“…….”

“그러니 네가 알아서 선택하거라. 내가 오늘 여기 온 것은 이곳 관장에게 네가 벌인 상황을 설명하고 인계하기 위해 온 것이니.”

“……혹시 삐지신 겁니까, 공작 부인? 제가 황궁의 안살림을 전부 맡게 돼서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카리나의 얼굴을 보자 힘 빠지는 웃음이 났다. 순진한 척,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그녀의 화법에 나도 슬슬 면역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삐졌다. 삐졌다라……. 그런 귀여운 말로 내 심정을 다 표현하기엔 부족하지.”

“그럼 너무 서운해하지 마셔요. 폐하께선 기쁜 마음으로 제게 공작 부인의 일을 나누어주셨습니다.”

“기쁜 마음?”

“예. 제가 공작 부인의 일손을 덜어드린다고 말씀드리니 잘 생각했다며 흔쾌히 허가해주셨습니다.”

카리나는 내 앞에서 황제의 총애를 자랑이라도 하듯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내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바라 듯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나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내리신 결정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네.’

폐하께서 카리나에게 황실의 살림을 맡긴 이후, 투렌 남작 부인은 그대로 사직서를 냈다. 분을 삭이지 못한 로제는 반드시 복수하겠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다 이에 금이 가는 바람에 며칠째 치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요리 주문을 받은 몰리나, 한순간에 윗사람이 바뀌게 된 황궁 사용인들의 심정도 비슷했다. 비록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 내 자리를 뺏은 카리나를 몹시 탐탁잖아 했다.

우습게도 아랫사람들의 그런 모습이 내겐 퍽 위로가 되었다. 나 대신 화를 내주고 나를 그리워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카리나에게 크게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도 참 기준이 많이 낮아졌네. 고작 이 정도에 만족할 줄도 알고.’

그간 나는 폐하께서 오직 카리나의 청 때문에 내 일을 그녀에게 분담하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폐하의 의중에는 내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도 싶었다.

“그럼 저는 이 그림으로 선택하겠습니다.”

카리나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황궁 현관 홀에 걸어두겠습니다. 석 달 전에 공작 부인께서 걸어두신 그림을 떼고 그 자리에 붙이면 좋을 것 같네요.”

“후회하지 않겠어?”

“예……?”

“다른 그림들은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았잖아. 이걸로 괜찮아?”

잠시 머뭇거리던 카리나가 이윽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재차 질문하는 것이 자신을 떠보기 위함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제가 꽤 좋은 그림을 고른 모양입니다. 그렇죠?”

그녀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 미술관장을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공작 부인? 아, 그리고 자작님.”

“이 그림을 황궁으로 보내줘요.”

“예? 이 그림 말씀이십니까?”

화들짝 놀란 관장이 나를 보고는 확언을 부탁하듯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를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린턴 자작이 처음 고른 그림이니 그 뜻대로 해주게.”

* * *

카리나의 티파티 당일.

황궁 정원은 화려한 꽃장식과 먹음직스러운 음식들로 가득했다. 정원의 만찬실은 황족들만 사용하거나 황가의 중요한 손님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 곳이었다. 고작 하녀 출신 자작을 위해 개방되기엔 과분한 곳이었다.

“저 정말 가기 싫어 죽겠어요, 공작 부인.”

초대장을 쥔 로제가 내 뒤를 따라오며 징징거렸다.

“이 여자는 진짜 무슨 자신감인지. 누가 절 보고 싶어 한다고 수도 귀족들에게 다 초대장을 돌렸대요?”

그러나 로제의 말과 달리 중앙 귀족들은 모두 카리나를 궁금해했다. 황궁에 출입 가능한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황제의 총애, 실란다 백작과의 불화, 그리고 황금빛 눈동자.

이 모든 것들은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귀족들의 관심을 끌기에 차고도 넘쳤다. 그들은 모두 카리나의 초대장을 받은 날부터 오늘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참석하지 않는 건, 리젠트라 공작 부인과 실란다 백작 부인 둘뿐인가?”

“네, 맞아요.”

불편한 마음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정원 앞에 다다랐다. 나는 하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공작 부인!”

나를 발견한 카리나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금빛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상석 바로 옆자리로 안내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리 앉으시지요.”

파티의 주최자가 앉는 상석 옆자리는 손님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의 차지였다. 내키든 내키지 않든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야 했다. 로제는 툴툴거리며 상석과 조금 떨어진 테이블 가운데에 앉았다.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간임에도 이미 정원은 초대받은 귀부인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모두 내 자리로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건넨 후,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갔다.

평소 같으면 갖은 칭찬과 아부 섞인 말을 건넸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카리나, 특히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를 향해 있었다.

‘루비아와 같은 눈인지 확인하러 온 사람들이지.’

나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내 앞에 놓인 찬물을 들이켰다. 그들의 호기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노골적인 시선은 몹시도 거슬렸다.

“어서 오세요, 블라딘 백작님!”

내 뒤를 이어 에보니 블라딘이 등장했다. 오늘도 그녀는 챙 넓은 모자에 화려한 보석 장식이 달린 외투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카리나는 물론, 자리에 앉아있던 귀부인 한 명이 얼른 의자에서 몸을 떼고 에보니에게 달려갔다. 얼마 전, 에보니의 도움으로 재상이 된 텔론 백작의 아내였다. 백작 부인은 에보니에게 다가가 시중이라도 들듯 그녀의 모자를 공손히 받아들었다.

“안녕하세요, 윈테라 공작 부인.”

“오래간만입니다, 블라딘 백작. 그런데 자리를 잘못 찾으신 듯싶은데요.”

내 맞은편에 앉을 거란 예상과 달리 에보니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같은 백작가라 할지라도 블라딘가는 여타 가문들과는 급이 다른 집안이었다. 그런 그녀의 자리가 내 맞은편이 아니라면 저긴 누구의 자리란 말인가.

“글쎄요. 아마 저 말고 다른 분이 오실 것 같아서.”

에보니가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씩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귀부인들이 웅성거리더니 모두의 시선이 정원 입구 쪽으로 향했다. 삽시간에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 릴체 후작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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