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54화 (54/160)

54화 : 얼음독수리

“전통적인 방식……?”

헬리온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 말을 따라했다. 북부 가신들도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아, 혹시 무리 중 한 마리만 살려두는 그 방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눈치 빠른 아론이 내 말뜻을 이해하고 물었다.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북부 가신들이 당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어……, 공작 부인,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와전된 말입니다. 특히 저희 북부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괜한 트집을 잡을 때 쓰는 말이지요.”

아론이 심각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한때 그런 식으로 얼음독수리를 길들였던 적이 있지요. 그게 무려 백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사육 초기에만 그랬을 뿐, 지금은 모두 인간의 손을 타서 그렇게 잔인하게 길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아, 그런 거였군요.”

“예. 게다가 저희 선조들이 그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건, 천적이 없는 얼음독수리의 개체 수가 매우 증가해 민가와 가축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이라는 게 워낙 자극적인 것만 전해져서 그런지, 다른 지방 사람들은 저희를 잔인하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북부 사람들의 민감한 구석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가신들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그런 배경까지는 미처 알지 못해서 괜한 말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시던데 오히려 이번 기회에 저희도 해명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론이 괜찮다는 듯 살짝 웃어 보였다. 내가 아기 새를 포근한 벨벳 천에 내려놓자 슈리와 라비가 새에게 작은 벌레를 먹였다.

“그런데 이슈텔, 누가 너한테 얼음독수리에 대한 말을 전한 거야?”

고개를 돌리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헬리온이 보였다. 내게 북부 사람들을 모욕하는 말을 전한 이가 몹시도 신경 쓰이는 듯 보였다.

“아, 그거. 잘 모르겠어. 오래전에 흘러가듯 들은 거라 기억이 나지 않네.”

차마 일리드가 한 말이라고 할 수 없어 거짓말을 했다. 헬리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진 몰라도 가까이하지 마. 중앙 귀족들이야 다른 지방에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다만, 수도를 제외한 지역에선 이제 아무도 얼음독수리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아. 그건 북부인에게 시비를 걸거나, 누군가를 북부 사람과 이간질 시킬 때나 할 법한 말이야.”

“……그래, 알았어.”

이간질이라……. 정말 일리드가 그런 의도로 말한 걸까? 그 말이 마음에 걸려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라비가 내게 다가와 새를 건네주었다.

“부디 잘 길러주시기 바랍니다, 공작 부인. 예전에는 흔했지만 이제는 북부에서도 마냥 흔치만은 않은 종입니다. 블라딘 백작도 한 마리 달라고 편지를 주었지만 거절당한 적이 있지요.”

“예? 블라딘 백작이요?”

“네. 블라딘 백작이 레이디 에보니였던 시절, 북부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희 집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얼음독수리를 보고는 무척 탐을 냈습니다.”

“그랬군요.”

나는 잔에 든 물을 마시며 넌지시 물었다.

“요새도 블라딘 백작과 자주 연락을 하시나요?”

“…….”

라비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내 질문의 의도를 대략 파악한 모양이었다. 대답을 한 쪽은 그의 옆에 있던 아론이었다.

“필요한 경우에만 합니다.”

짧고도 명확한 대답이었다. 더 이상 어떤 질문도 덧붙일 수 없을 만큼.

최근에도 릴체 후작 부인은 서부 후작령으로 압송된 실란다 백작과 자주 연통을 주고받았다. 후작 부인은 그중 중요한 편지 몇 통을 내게 건네주었다.

실란다 백작은 카리나와 손을 잡은 에보니 블라딘을 주목하고 있었다. 블라딘가가 고작 아무 접점도 없는 하녀 하나의 복수를 해주고자 움직이진 않았단 것이다. 실란다 백작가를 망가뜨린 건 그보다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시작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 실란다 백작은 남부와 북부, 두 대공가 중 어느 한 쪽이 블라딘가와 손을 잡았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실란다를 시작으로 릴체와 리젠트라까지 무너뜨리기 위해 계략을 세우고 있을 거라며.

현재로썬 백작의 예상이 어디까지 들어맞을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자의 감정적인 판단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강한 우두머리 한 마리만 남기고 무리의 다른 새들은 하나하나씩 죽입니다. 우두머리가 보는 앞에서요.」

다시금 일리드의 말이 떠올랐다.

「수도를 제외한 지역에선 아무도 얼음독수리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아. 그건 북부인에게 시비를 걸려는 자거나, 누군가를 북부 사람과 이간질 시킬 때나 할 법한 말이야.」

그리고 헬리온의 말도.

두 대공 중 하나는 블라딘가와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둘 중 누구의 말이 옳은 걸까.

“이슈텔, 밤이 깊었는데 그만 환궁할까? 새장 관리인이 잠들기 전에 아기 새도 데려다줘야 하고.”

“어? 어, 응. 그러자.”

헬리온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인들이 무명천에 감싼 아기 새를 작은 케이지에 담아 건네주었다.

북부 가신들이 모두 일어나 나와 헬리온을 배웅해주었다. 마차에 타기 전, 라비 텔리아가 내 손등 위에 이별의 입맞춤을 했다.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공작 부인.”

* * *

계절은 봄에서 여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밤낮으로 바뀌는 기온 탓에 황궁 사용인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 궁전을 꾸며야 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투렌 남작 부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황궁의 실내 장식을 담당하고 있는 그녀는 바뀌는 계절에 따라 궁전 내부에 산뜻한 변화를 주는 일을 했다.

그런데 며칠 전, 남작 부인의 저택으로 희한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그녀와 실내 장식에 대해 논하고 싶다는 카리나 린턴 자작의 편지였다.

투렌 남작 부인은 린턴 자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란다 백작가에 불화를 일으킨 것도 싫었고, 그 때문에 조카 이슈텔의 걱정거리가 늘어난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일개 하녀 주제에 자작 위까지 받은 것이 몹시도 고까웠다. 그건 비단 남작 부인뿐만이 아닌, 수도의 모든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남작 부인이 그 하녀의 편지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편지의 겉면에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폐하를 구워삶은 건지…….”

남작 부인이 금빛 독수리 인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녀가 남작 부인을 안쪽 대기실로 안내했다. 그곳엔 똑같은 편지 봉투를 쥔 로제와 몰리가 앉아있었다.

“엥? 투렌 남작 부인,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그러는 로제 너야말로 웬일이니?”

“저랑 몰리는 이 편지를 받고 왔는데요?”

“어, 나도.”

남작 부인과 로제, 몰리가 서로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았다. 반면 소파 끝에 걸터앉은 슈리는 빈손이었다.

“슈리, 넌 편지도 없는데 왜 온 거니?”

“아, 전 로제랑 있다가 그냥 따라온 거예요.”

슈리가 머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몰리가 통통한 손에 쥔 편지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참 이상한 일이죠? 편지를 쓴 사람은 린턴 자작인데, 왜 황제 폐하의 인장이 붙어 있을까요?”

“뻔하죠. 지가 부르면 안 올 거 같으니까 폐하의 인장을 쾅! 박은 거죠. 그러면 오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불량한 자세로 소파에 늘어진 로제가 편지 봉투를 흔들었다.

“이거 아주 웃기는 여자네? 지가 뭔데 감히 우리한테 오라 가라야?”

뼛속까지 중앙 귀족 레이디인 로제는 이 상황이 몹시 불쾌했다.

같은 자작이라 할지라도 리세리 가문과 카리나는 급이 달랐다.

리세리 가문은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시종직을 맡을 정도로 힘 있는 가문이지만, 카리나 린턴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나 자작 위를 유지할 것이다. 그런 한철 귀족의 부름에 응해야 하는 상황에 로제는 매우 짜증이 난 상태였다.

“투렌 남작 부인, 린턴 자작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하녀의 보고에 남작 부인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곧 카리나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화려한 드레스와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모습이 퍽 아름다웠다.

“오셨습니까, 여러분?”

“어, 왔다.”

로제가 여전히 불량한 자세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뭐 때문에 보자 그러는 건데?”

날 선 로제의 반응에도 카리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를 따라 들어온 하녀가 찻잔을 세팅하고는 향긋한 차를 따라주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서두르시나요, 리세리 영애. 우선 차부터 한잔하고 말씀 나누시지요.”

“이야. 옷 봐라. 하녀복 입고 돌아다닐 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좋은 드레스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진즉에 미술은 때려치우고 차나 배울 걸 그랬어.”

로제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카리나의 귀에 달린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째려보았다. 투렌 남작 부인은 흐트러짐 한 점 없는 자세로 앉아 차를 마셨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 역시 카리나의 몸에 달린 보석에 닿아있었다.

“저기, 우리가 그렇게 여유로운 사람들이 아니라서 말이죠. 이제 그만 오늘 부른 목적을 알려줬으면 하는데.”

“아, 그럼요. 이제 말씀드릴게요.”

카리나가 빈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부터 황궁의 살림은 제가 맡을 겁니다. 그러니 투렌 남작 부인께선 제게 업무 결재를 받으시면 됩니다.”

“내가 아직 귀가 먹을 나이는 아닌데, 잘못 들었나? 뭐 결재를 누구한테 받아?”

“그러게 말이다, 로제. 나도 같은 말을 들었는데.”

로제의 신랄한 반응에 남작 부인의 우아한 목소리가 덧붙여졌다. 그 기묘한 불협화음에 몰리와 슈리가 자리에 얼어붙은 채 눈동자만 굴렸다. 반면 카리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니에요. 제대로 들으신 거 맞습니다. 앞으로 황궁 안살림에 대한 것은 모두 저와 상의하셔야 합니다.”

카리나가 로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제 리세리 양은 황궁 곳곳에 걸어 놓는 미술품을 선정하고 관리한다면서요? 그 일도 이제부턴 제가 맡을 거고요.”

“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제가 귀가 찢어질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옆에 있던 투렌 남작 부인과 몰리, 슈리가 화들짝 놀라며 동시에 귀를 틀어막았다.

“이게 미쳤나 진짜! 야, 네가 뭔데 내 일을 가져간다 만다야? 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녀 주제에 작위를 받으니까 이젠 막 위아래도 구별이 안 가?”

“말 조심해, 리세리. 이건 황제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야.”

카리나의 목소리가 한순간 차갑게 돌변했다. 응접실에 모인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보였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냉랭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왜 네 아래야? 난 자작이고, 넌 장손도 아니라 작위도 못 물려받는 일개 귀족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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