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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53화 (53/160)

53화 : 라비 텔리아

헬리온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플레코 광장 동남쪽에 위치한 귀족 저택가였다. 중앙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이곳엔 남부와 북부 가신들의 사택도 함께 있었다.

‘원래 가신들의 사택에 와선 안 되는 건데…….’

리젠트라 가문이 두 대공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었기에, 나 역시 대공령의 가신들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있었다. 슈리의 경우엔 이야기가 조금 달랐지만.

아무튼 헬리온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왔다만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는 모자챙을 아래로 더 깊이 숙이며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세라 주변을 살폈다.

“이슈텔, 이리로 와.”

헬리온이 붉은 벽돌로 지어진 커다란 저택으로 나를 안내했다. 북부의 사병들이 헬리온을 알아보고는 각 잡힌 자세로 경례한 후, 높이 솟은 철문을 열었다.

북부 가신들의 저택은 외부나 내부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단정했다. 복도에는 그 흔한 꽃병이나 그림 장식 하나 없었다. 다소 투박해 보이기는 했지만 북부사람들의 소탈함이 느껴지는 아늑한 곳이었다.

“슈리도 여기서 사는 거야?”

“응. 아론 텔리아와 함께 이 저택에서 머물고 있어. 텔리아 가문뿐 아니라 북부의 다른 가문 사람들도 함께 살고 있거든.”

“심심할 틈은 없겠구나. 여럿이서 어울려 사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그래서 그런지 가신들 사이도 더욱 돈독해진 모양이야. 서로 한집에 살면서 친해졌나 봐. 물론 초반엔 다들 많이 싸웠다고는 하더라.”

“북부 가신들도 서로 싸워? 상명하복이 뚜렷해 보이던데?”

“전시 상태일 때는 그런데 평소엔 안 그래. 이 소리 들리지? 원래 저렇게 풀어져서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보기와 다르게.”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가자 방 곳곳에서 호탕한 웃음소리와 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북부 가신들도 하루를 마무리하며 슬슬 술판을 벌이려는 모양이었다.

“어? 헬리온! 공작 부인!”

중앙 계단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헬리온을 발견한 슈리가 놀라움 반, 반가움 반인 표정으로 달려왔다.

“북부 저택에서 공작 부인을 뵙게 되다니! 이곳까진 어쩐 일이세요?! 혹시 오늘 환영 파티가 열리는 걸 알고 오신 거예요?”

“환영 파티?”

“예! 오늘 저희 셋째 오빠 환영 파티가 있거든요. 지금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는데 이리로 오세요.”

슈리가 나와 헬리온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저택 만찬실에 도착한 슈리가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혔다.

쾅-!

요란하게 진행되던 술자리가 시간을 멈춘 듯 정지했다. 허공을 가르던 맥주잔이 가신들의 손에 들린 채 그대로 멈추었다.

모두들 헬리온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표정이 되었으나, 그 옆에 선 날 보고는 당황했다.

그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아론 텔리아가 긴 나무 테이블에 맥주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헬리온 대공 전하! 윈테라 공작 부인!”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북부 가신들이 전부 의자에서 일어나 우렁차게 소리쳤다. 헬리온과 슈리는 이런 북부식 인사에 익숙했지만, 나는 내심 크게 놀라 어깨를 움찔하고 말았다.

“윈테라… 공작 부인……?”

테이블 한가운데 올라서 있던 남자가 미끄러지듯 돌바닥으로 내려왔다.

이제는 어느 정도 눈에 익은 북부 가신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초면인 사람이었다. 부드러운 적갈색 머리카락에 짙은 초록빛 눈동자. 슈리, 그리고 아론과 매우 닮은 외모였다.

키가 무척 큰 그 남자가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부인. 부인의 호위를 맡게 된 라비 텔리아라고 합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텔리아 경.”

내가 손을 올리자 라비 텔리아가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녹색 눈동자에 흥미로움과 설렘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시선 아래에 있던 눈동자가 서서히 올라오더니 이제는 고개를 꺾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높아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라비가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기사식 인사를 건넸다.

“공작 부인의 기사로서 제 목숨과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어, 그게…… 아직 그런 충성 서약을 하기엔 조금 이르지 않나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비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제 말은…… 아직 텔리아 경이 제 정식 호위 기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 호위에 지원한 다른 기사들과 아직 합을 겨루시지 않으셨잖아요. 혹시라도 결투에서 떨어지실 수도 있고…….”

내 딴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한 건데, 만찬실 분위기는 급격하게 싸해지고 말았다.

몸집 좋은 북부 가신들이 어려운 질문을 받은 아이처럼 맹한 표정으로 지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하하하하!”

정적을 깬 건 라비의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그는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다. 그를 시작으로 북부 가신들이 동시에 큰 웃음을 터트렸다. 잘 참고 있던 슈리마저도 킥하고 웃고 말았다.

“왜, 왜 그러세요?”

당황한 내가 헬리온을 보았다. 그가 웃음을 꾹 참으며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라비 텔리아는 북부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야. 경쟁자가 누구든 라비한텐 상대가 되지 않아.”

“이분이……?”

나는 곁눈질로 라비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분명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것이 힘은 깨나 쓰게 생기긴 했다.

하지만 그는 내 상상 속의 북부 전사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릴 적, 그림책에서 보았던 북부 사람들은 모두 덥수룩한 수염에 터질 듯한 근육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라비는 그때 본 그림들보다 체형이 훨씬 가늘고 선이 매끄러웠다.

“북부 기사들은 다 근육질인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툭 내뱉은 말에 라비가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럼 공작 부인의 취향에 맞게 체형을 바꿔보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예? 아니요, 아닙니다.”

화들짝 놀란 내가 손을 내저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향해 장난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자, 공작 부인께서 친히 우리 북부 저택에 방문해 주셨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가만히만 있을 건가? 공작 부인, 이리로 오시지요. 마침 저녁 식사를 막 시작하던 차입니다. 함께하시죠.”

아론이 나와 헬리온을 상석으로 안내했다. 슈리가 나를 끌고, 라비는 헬리온을 끌어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혔다.

하녀들이 나와 헬리온 앞에 재빨리 식기를 세팅해주었다. 북부 가신들이 아론의 건배사에 맞춰 맥주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대공 전하와 공작 부인을 위하여!”

“위하여!”

기다란 나무 테이블 위로 맥주잔이 깨질 듯 커다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가신들은 나와 헬리온이 맥주잔에 입을 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왁자지껄 떠들며 식사를 시작했다.

술이 들어가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북부 가신들이 뿔피리와 작은북을 연주하며 춤을 추었다. 평소엔 무뚝뚝하고 진중한 사람들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재미있는 구석도 있구나 싶었다.

“불편하진 않지, 이슈텔?”

“응. 재미있네. 술이랑 음식도 아주 맛있고.”

헬리온의 물음에 맥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입에 잘 맞았다. 이런 파티를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닌데 내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북부에서 공작 부인께 드릴 선물을 가져와 놓곤 깜빡했네.”

라비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만찬실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붉은 벨벳 천이 들려있었다. 라비가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천을 품에 소중히 들고는 내게 다가왔다.

“헬리온 대공 전하께서 공작 부인께 선물하는 아이입니다. 조심스럽게 열어보시지요.”

선물이라니. 내심 기대하며 천천히 매듭을 풀었다. 천의 네 면이 모두 풀어지자 그 안에서 주먹만 한 알이 나왔다.

“계… 계란……?”

“새알입니다. 저희 북부에서만 서식하는 아주 귀한 새의 알이죠.”

그때, 옆에 있던 슈리가 깜짝 놀라며 박수를 쳤다.

“어! 저것 좀 보세요. 알에 금이 갔어요! 부화하려나 봐요!”

그녀의 말대로 새하얀 알에 쫙하고 금이 가 있었다. 이미 파각을 시작한 지 꽤 됐는지 알 여기 저기에 깨진 자국이 보였다. 왁자지껄 떠들던 북부 가신들의 시선이 모두 내 손에 들린 알에 집중됐다.

쫙-!

“삐악!”

쫘악-!

“삐악삐악!”

아기 새의 작은 울음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건강한 아기 새는 예정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알을 깨고 나왔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어린 생명이 내 손 위에서 울어댔다.

“귀여워라. 이 새는 무슨 종이야?”

“얼음독수리야.”

헬리온이 재빨리 대답했다.

“지금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작고 볼품없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푸른색 깃털이 자라 무척 아름다울 거야.”

“세상에, 얼음독수리라니! 공작 부인, 황궁 새장에 이 새는 없잖아요! 데리고 가서 키우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일부러 고른 종이지.”

슈리의 말에 헬리온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나는 손 위에 앉은 어린 생명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아기 새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나는 오래전 일리드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북부 사람들은 푸른 깃털을 가진 얼음독수리를 키우는 풍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독수리는 독립심이 매우 강해 사람을 잘 따르지 않죠. 북부 사람들이 그 독수리를 어떻게 길들이는지 아십니까?」

「가장 강한 우두머리 한 마리만 남기고 무리의 다른 새들은 하나하나씩 죽입니다. 우두머리가 보는 앞에서요. 그렇게 홀로 남은 우두머리에겐 좋은 먹이도 주고 짝도 지어주는 등 무한한 애정을 쏟죠.」

「그렇게 되면 우두머리는 점점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아무리 자기 무리를 학살한 자라도, 의지할 곳이라곤 그 사람밖에 없게 되니까요. 북부 사람들은 무언가를 길들일 때, 그런 방식을 쓴답니다.」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이 아이도 그렇게 홀로 남겨진 어미의 새끼인 걸까? 만약 이 아이도 훗날 그런 방식으로 길들여야 하는 거라면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조심히 북부 가신들에게 물었다.

“얼음독수리라면 혹 이 아이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키워야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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