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황제의 편애
“수고했다, 일리드. 아주 좋은 계획안이구나. 지금 당장 수도 경비대를 이대로 개편해도 손색이 없겠어.”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황제의 칭찬에 일리드가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오늘은 황제와 대공들의 정기 보고 시간이 있는 날이었다. 일리드의 맞은편에 선 헬리온이 황제를 보며 눈을 빛냈다. 자신도 어서 빨리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흐음…….”
헬리온의 서류를 넘겨보던 황제가 무거운 한숨을 지었다. 황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마지막 장까지 보고는 테이블 한쪽 옆에 서류를 밀어두었다.
“이슈텔에게 전해 들었다. 수도 귀족들의 재산에 따라 세금을 차별적으로 부과하자고 했다지?”
“그렇습니다, 폐하.”
헬리온이 기대에 찬 얼굴로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황제의 반응은 생각보다 냉담했다.
“좋은 방안이긴 하나 반대가 심할 것이다. 이곳 수도는 황족에 대한 귀족들의 충성심이 북부보다 현저히 낮은 곳이니. 좀 더 실현 가능한 방안을 가져왔으면 좋았을 텐데.”
황제가 작게 혀를 찼다. 당황한 헬리온이 급히 대답했다.
“제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보완할 부분을 조금 더 상세히 말씀해 주시면 수정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음…….”
황제가 주름진 손으로 테이블 끝을 툭툭 두드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헬리온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일리드가 제안한 건이 끝나면 그때 다시 검토해보겠다.”
어딘가 석연찮은 답변에 헬리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당황스럽기는 옆에 서 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헬리온이 제시한 징수법은 무척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초기에는 반대가 있겠지만, 막을 명분이 없는 사안이다. 게다가 북부 대공령에서의 성공 사례까지 있어 어렵지 않게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폐하께선 별다른 이유도 없이 결재를 미루셨다.
‘무엇 때문에 저러실까…….’
내가 의문을 갖는 사이, 폐하께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일리드를 돌아보셨다.
“재상과 상의하여 네가 제안한 방안을 수도 상황에 맞게 보완해보겠다. 곧 대신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잊지 말고 참석하거라.”
“알겠습니다, 폐하.”
“그래. 그럼 오늘 보고는 이쯤에서 마치고 다들 돌아가 보아라.”
일리드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공손한 자세로 황제께 인사드렸다. 헬리온은 혼란스런 표정으로 고개만 숙였다.
일리드와 헬리온이 먼저 황제전을 나섰다. 대공들을 따라 나서려는데, 폐하께서 나를 부르셨다.
“넌 잠시 여기 남거라, 이슈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폐하께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하셨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리드가 훨씬 현명한 것 같구나. 그 애가 올린 보고서대로 진행하면 수도 경비에 들어가는 비용을 반으로 줄이면서 치안은 더욱 좋아지겠어.”
“예, 제가 보기에도 손색이 없는 방안인 듯합니다.”
“그렇지? 허허. 그 어린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커서 영특해졌는지. 보면 볼수록 탐나는 재목이 아닐 수 없구나.”
황제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분을 따라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일리드는 영리하고 현명한 인재였다. 황제의 칭찬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두웠던 헬리온의 표정이 떠오른 탓에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 요새 일리드와는 어떻게 지내느냐? 들리는 말로는 네가 일리드와 자주 시간을 보낸다고 하던데.”
“예. 아무래도 황궁에서 자주 마주치기도 하고, 대공께서 워낙 붙임성이 좋으셔서 새장 같은 곳엔 종종 함께 가곤 합니다.”
“허허. 그것 참 좋은 일이지. 비록 정략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것이 좋으니 말이야.”
폐하께서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나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하녀가 따라 준 차를 마셨다.
“네가 많이 도와주거라. 오랫동안 수도를 떠나있었던 아이 아니냐.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서 지내게 될 텐데, 온전히 익숙해지려면 아직 시간이 꽤 필요할 테니.”
“저, 폐하.”
잠시 숨을 고른 후, 입가에 맴돌던 말을 꺼냈다.
“왜 헬리온에 대해선 묻지 않으십니까?”
“응?”
“조금 전부터 계속 일리드 대공에 대해서만 묻고 계셨습니다. 헬리온 대공에 대해선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폐하께서 당황한 표정이 되셨다.
“아, 아니다. 너와 헬리온은 어릴 적부터 자주 보지 않았느냐. 그래서 따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폐하께선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폐하, 헬리온에게 조금 더 신경 써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 전에 폐하께서 일리드 대공만 칭찬해주시자 헬리온이 실망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그랬느냐.”
“옛날 같으면 입을 삐쭉이며 울었을 텐데, 이젠 커서 울진 않지만 많이 속상한 듯 보였습니다.”
“넌 그 아이의 마음을 잘 읽는구나, 이슈텔.”
“아닙니다. 전 그저…….”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옅은 미소를 짓는 걸로 말끝을 흐렸다.
혹시 황제께서 일리드를 황태자감으로 점지해 두신 건 아닐까? 묘하게 차별적인 태도에서 폐하의 의중이 읽히는 듯했다.
“나도 안다, 헬리온도 영리하고 좋은 아이라는 걸.”
폐하께서 옆으로 밀어두었던 헬리온의 보고서에 손을 올리셨다. 그리곤 못내 안쓰러운 손길로 종이를 만지작거리셨다.
“일리드가 황가의 첫 아이이긴 해도,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은 헬리온이 더 길었지. 녀석이 워낙 프리모스와 성향이 달라 커가는 걸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고.”
폐하께서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덧붙이셨다.
“네가 그 아이를 잘 위로해주렴, 이슈텔. 내가 보아도 그 아이는 널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어렸을 때처럼 말이다.”
* * *
‘헬리온은 뭘 하고 있으려나. 설마 애먼 데다 화풀이하고 있진 않겠지?’
헬리온이 마음에 걸린 나는 방으로 가는 대신 그의 처소로 향했다. 하인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공 전하, 윈테라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해라.
하녀들이 양옆에서 문을 열었다. 나는 조금 긴장한 채로 헬리온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헬리온을 너무 몰랐던 모양이다. 화를 삭이고 있으리란 예상과 달리 헬리온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깃펜을 든 채, 대여섯 통은 되는 편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헬리온?”
“재무 대신과 그쪽 보좌관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어.”
“재무 대신에게? 왜?”
“아까 봤잖아. 폐하께서 내가 수도 사정에 맞지 않은 기획안을 갖고 왔다고 하신 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맞는 말씀이시더라고. 그래서 재무 대신에게 수도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보려고.”
헬리온은 펜촉을 잉크에 담갔다 뺀 후, 유려한 필체로 계속해 편지를 썼다. 나는 그의 곁에 앉아 펜 끝이 종이 위를 사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헬리온이 하인을 통해 편지를 전달했다. 그제야 그는 조금 피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온 거야, 이슈텔? 아까 폐하께서 남으라고 하셨잖아.”
“아, 응.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린 거야.”
“폐하와 무슨 이야기를 했어? 혹시 나에 대한 거야?”
“어? 어, 응.”
나는 헬리온에게 폐하께서 널 많이 아끼신다고 대충 둘러댄 후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이다. 난 폐하께서 그러신 줄도 모르고 괜히 오해할 뻔했네.”
“오해?”
“응. 그래서 말인데, 이슈텔. 나 너한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말해 봐. 뭔데?”
“너한테 친오빠가 낳은 조카들이 있지? 남자아이 두 명.”
“응. 로시엔이랑 엔리케.”
“로시엔이 형이야?”
“맞아. 그런데 우리 애들은 왜?”
“그럼 혹시 넌 엔리케보다 로시엔이 더 예뻐?”
“그게 무슨 소리야?”
밑도 끝도 없이 물어보는 조카들 이야기에 내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의아해하자 헬리온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니. 왠지 폐하께서 나보다 일리드 형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원래 사람들이 첫 조카를 가장 예뻐한다는 말이 있잖아. 우리 어머니도 일리드 형을 무척 예뻐하셨고. 북부 대공령에서 자랄 때, 어머니께 혼날 때면 늘 일리드 형이랑 비교당했거든.”
헬리온이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계획안, 사실 무척 기대했거든. 폐하께서도 칭찬해주시고 기뻐해 주실 줄 알았는데……. 속 좁은 놈처럼 보이겠지만 폐하께서 일리드 형을 더 아끼시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아니실 거야, 그런 거.”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꾸며냈지만 내 대답을 확신할 순 없었다. 나 역시 폐하께서 일리드를 후계자로 정하신 건 아닐까 생각했으니.
헬리온이 의자를 끌어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천천히 숙이더니 내 어깨에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비볐다.
“마음이 이상해. 꾸중을 들은 것도 아닌데 가슴이 이상하게 텅 빈 것처럼 공허해. 차라리 혼나는 게 마음은 더 편했을 텐데.”
헬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슈텔. 넌 날 믿어줄 거지?”
그가 내 어깨에서 고개를 들더니 금방이라도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는 살짝 감은 푸른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도 알아. 내가 성격도 세고 감정적인 편이라는 거. 그리고 이 황궁은 정치 싸움의 장이라는 것도.”
“…….”
“나와 일리드 형은 가족으로선 서로를 아끼지만, 황태자 자리를 두고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 사이잖아. 폐하께서도 여러 사람들한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을 거야. 그중에선 일리드 형의 편에 서서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어느새 헬리온의 눈빛엔 깊은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잠긴 듯 낮은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슈텔. 너는 그런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마. 비록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지만, 넌 이 황궁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날 가장 오래 본 사람이잖아. 누가 뭐라 해도 넌 있는 그대로의 날 봐줄 수 있지?”
언뜻 애원하는 듯 보이는 눈빛과 목소리에 내 마음마저 저려왔다. 나는 손을 들어 헬리온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래, 그럴게.”
그가 이렇게 깊은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헬리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어릴 적의 단편적인 기억만을 가지고 그를 대한 건 아닐까.
나는 헬리온의 고개를 끌어당겨 내 어깨에 기대게 한 후, 그의 머리 위에 내 이마를 포갰다.
‘미안해, 헬리온. 앞으론 그러지 않게 노력할게.’
헬리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마음속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한결 밝은 표정이 되어있었다.
“이슈텔, 지금 시간 되면 북부 가신들 사저에 가지 않을래?”
“사저? 거긴 왜?”
“라비 텔리아가 수도에 도착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