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동정의 한계(2)
동정.
카리나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슈텔에게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감정은 동정이라는 것을.
그 감정을 이용해 목적을 숨긴 채 황궁에 들어올 수 있었고, 언니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 굳이 나쁜 쪽을 따지자면 그건 카리나 자신이었다. 이슈텔의 동정심을 이용해 그녀를 속인 것이니까.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빛, 감정,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단지 동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조금 전, 에보니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카리나, 강한 사람은 동정받지 않아. 동정이란 건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가지는 우스운 감정이지.”
에보니가 손에 잡고 있던 카리나의 뒷머리를 놓아주었다. 앞으로 기울어진 몸을 도로 의자 위에 끌고 오며 그녀가 씨익 미소 지었다.
“궁금하지 않아? 네가 이슈텔 리젠트라와 동등한 힘을 가지게 됐을 때,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과연 그때도 지금처럼 널 대할까? 아니, 어떻게든 널 끌어내리려 안간힘을 쓸 테지. 그건 자신이 허락한 선을 넘는 일이니까.”
카리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마구간지기에서 황제의 차 시중 하녀로 배정받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슈텔은 그녀가 황제의 하녀가 되는 걸 극구 반대했었다.
준남작 작위를 받고 자작 위를 받은 지금까지도 자신을 대하는 이슈텔의 태도는 늘 똑같았다.
귀족이 아닌 하녀. 다른 귀족들에게 보이는 예의가 아닌, 일개 하녀를 대하는 태도. 황제에게 작위를 받아도 나는 널 인정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반응이었다.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야.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카리나가 테이블 밑에 둔 손을 세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든 자국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억울했다. 모든 것이 분하고 서러웠다.
그저 언니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조카를 되찾아 아이와 함께 살고 싶었다. 바라는 건 단지 그뿐이었다.
그것이 그리도 잘못된 일이었을까? 천한 아랫것들은 윗분들을 상대로 억울한 마음조차 풀어선 안 되는 거였을까?
귀족 작위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된 이가 있으면 황후나 황태자비가 그를 위해 축하 자리를 마련한다 들었다. 그러나 카리나는 어떤 이에게도 축하받지 못했다. 축하는커녕 귀부인들의 조촐한 티파티에도 초대 한 번 받지 못했다.
모두가 카리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귀족들과 귀부인들의 시기 어린 시선들만 쏟아졌다.
그래도 자신을 보는 이슈텔의 눈빛에 시기심은 담겨있지 않았다. 다만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가끔씩은 그런 표정이 더 아팠다.
‘감히 내 까짓게 이런 자리에 있다는 게 불쾌하단 걸까?’
카리나가 입술 끝을 세게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에보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기야. 한 배를 탄 이상, 자기도 나도 이슈텔 리젠트라보다 강해져야 해.”
살벌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에보니의 얼굴엔 평소 같은 의뭉스런 웃음이 걸려있었다. 지난 몇 달간 보아왔건만, 카리나는 아직도 그 웃음이 무척이나 소름 끼쳤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난 기왕이면 자기가 꽤 좋은 집안의 후손이었으면 좋겠어. 우리 가문이야 황실의 외가인 덕분에 큰 화는 피했지만, 리젠트라가 멸문시킨 집안이 어마어마하게 많거든.”
“높은 가문……. 그까짓 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아니지, 아주 큰 소용이지. 자기의 마음가짐이 달라지니까.”
의자에서 일어난 에보니가 카리나의 등 뒤에 있는 커다란 화장대로 갔다. 반짝이는 은빛 보석함을 열자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 등 온갖 패물이 나왔다. 전부 황제가 카리나에게 하사한 것들이었다. 에보니가 그중 가장 화려한 루비 목걸이를 손목에 걸었다.
“이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내 것일 수도 있었는데. 내가 비참한 삶을 사는 동안, 너는 이렇게 화려한 것들에 둘러싸여 살았구나. 나도 너처럼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살 수 있었을 텐데.”
“…….”
“이런 생각해본 적 있지?”
어떻게 없을 수가 있을까. 떠돌이 신분에서 황궁 하녀로, 하녀에서 황제의 측근, 그리고 준남작에서 자작이 되는 동안 수도 없이 해 보았던 생각이다.
‘만일 리젠트라 내전에서 살아남은 쪽이 내 할아버지였다면. 그렇다면 나도 그녀처럼 될 수 있었을까.’
카리나는 종종 그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연히 황궁에서 이슈텔을 마주칠 때면 더욱 그랬다.
이슈텔 리젠트라는 늘 빛나는 사람이었다.
화려한 드레스, 빛나는 보석, 값비싼 구두.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품위와 교양, 낮고 지적인 목소리와 우아한 행동. 그리고 차분하고 여유 있는 분위기까지. 어릴 적부터 억척스럽게 살아남아야 했던 카리나에겐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평민에서 귀족으로 신분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 아무리 화려한 장신구로 몸을 휘감아도, 이슈텔 리젠트라가 가진 것들을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타고난 모든 것이, 어쩌면 내 것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도 그녀처럼 귀족적인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생각의 끝은 늘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에 가능한 그런 상념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게 그렇다? 너무 잘난 사람한테는 질투조차 나지 않아.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나, 내가 열망하는 것을 가진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보석함을 들고 온 에보니가 카리나의 뒤로 가 은빛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장신구를 하나하나 달아주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거든. 내 아버지가 그렇게 미쳐 날뛰셨던 것도 우리 가문이 리젠트라와 같은 공작가였기 때문이야. 처음부터 백작가였다면 이렇게까지 평생 동안 복수를 염원하며 살진 않았을 수도 있고.”
“…….”
“그러니 나는 자기가 기왕이면 높은 귀족 출신이었으면 해. 리젠트라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아. 이슈텔 리젠트라가 가진 모든 게 달리 보일 테니까.”
“…….”
“가만있어 보자, 그때 가장 크게 화를 입었던 집안들이 어디였더라. 아버지가 알려주셨는데…… 아, 그래. 리가로 백작가, 샤리타 변경백, 그리고 카르히 후작가. 이 세 가문이 아주 제대로 멸족을 당했지. 가문의 직계들은 모두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방계는 노예로 만들어 국경 근처로 보내버렸거든.”
에보니가 보석함의 윗부분에 달린 거울을 카리나 앞으로 당겼다. 어느새 예쁘게 정돈된 머리가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에보니가 다정한 목소리로 카리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도 가장 좋은 건 역시 같은 리젠트라겠지? 파비엘 리젠트라 말이야.”
순간 카리나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꽉 쥐며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켰다.
에보니가 테이블에 몸을 기댄 채 카리나를 내려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역시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지?”
“……예. 너무 멀리 가신 듯합니다.”
“그래도 상상 정도는 해볼 수 있잖아. 얼마나 재미있겠어. 뒤바뀐 운명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누는 거. 아, 생각만 해도 재미있겠는걸?”
에보니가 깔깔거리며 힘내라는 듯 카리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아직 자기가 내게 마음을 열지 않은 듯하니 이쯤에서 물러나야지. 하지만 다음에 물어볼 땐 반드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 당신의 정체가 이 나라에 어떤 피바람을 몰고 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걸?”
에보니가 떠나자 카리나의 처소엔 적막만이 남았다.
카리나는 한참동안이나 제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검은 고양이 샤샤가 주인의 무릎 위에 올라와 쓰다듬어 달라며 머리를 치댔다. 그러나 주인은 하염없이 거울만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잘 정돈된 머리카락, 화려한 루비 목걸이, 목선을 따라 찰랑거리는 금빛 귀걸이.
타고난 핏줄 덕에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온 이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거울 속의 자신이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손가락질받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천한 광대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던 마을 사람들, 아무 잘못도 안 한 언니가 별것도 아닌 놈들과 치정으로 엮여 매를 맞았던 일.
지금의 자신은 그때와 얼마나 달라진 걸까. 귀족이 되고 황제를 뒷배로 가지고 있는데도 허한 가슴은 도무지 채워지지가 않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왜 나한테 이따위 감정이 들게 만드는 거냐고!”
카리나가 테이블 위에 있던 보석함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떨어진 보석들이 바닥을 뒹굴고, 깜짝 놀란 샤샤가 겁먹은 듯 크게 울어댔다.
카리나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에보니가 정리해주었던 예쁜 머리가 마구 흐트러져 풀어 헤쳐졌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왜 내게 보이는 최선의 감정이 동정일 뿐일까.’
‘왜 항상 그녀는 나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반역자의 후손이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올라서?
그래서 넘지 못할 선을 만들고, 오르지 못할 간극을 만드는 걸까. 네 자리는 여기까지라고?
“결국 저도 운 좋게 그 집안에서 태어난 거뿐이면서. 내 할아버지가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너도 나랑 별반 다를 거 없는 인간이 됐을걸!”
카리나가 눈물로 얼룩진 고개를 들었다. 깨진 거울 조각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어지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도 너처럼 될 수 있어.”
에보니가 말했다. 강한 사람은 동정 따윈 받지 않는다고. 이제는 자신이 그렇게 될 때였다.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자리까지 올라, 저를 내려다보던 그 거만한 시선을 그대로 되돌려줄 것이다.
“그러니까 날 살리지 말았어야지.”
카리나가 얼굴을 적신 눈물을 닦아냈다.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보석들을 다시 주워담았다. 깨진 거울 조각까지 깨끗하게 정리한 후, 카리나가 샤샤를 들어 품에 안았다.
“마리.”
카리나가 소리치자 처소 밖에 있던 하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카리나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한껏 우아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윈테라 공작 부인이 황궁에서 맡고 있는 일을 전부 알아봐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