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동정의 한계(1)
며칠 전부터 쏟아지는 거친 폭우에 수도는 아침부터 몹시 우중충했다. 축축 늘어지는 날씨 탓에 지친 황궁 사용인들은 윗사람 몰래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모두 잠들 것 같은 황궁에서 활력 넘치는 사람은 단 하나였다. 보기만 해도 혀끝이 아릿한 레몬을 베어 먹으며, 에보니 블라딘이 황궁 복도를 가로질렀다.
“처소가 바뀌어서 한참 찾았네. 여기가 린턴 준남작, 아니, 린턴 자작의 처소 맞지?”
화려한 문 앞에 선 에보니가 하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 바람에 눈에 레몬 과즙이 튄 하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여기가 카리나 님의 처소입니다.”
“이야, 카리나 성공했네. 이 남쪽 처소면 황족이나 황가의 외척들만 머무는 공간이잖아? 폐하께서 참 좋은 곳을 하사해주셨어.”
에보니가 남은 레몬을 입에 쏙 넣으며 큰 소리가 나게 박수를 쳤다. 곧 문이 열리고 에보니가 처소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어머나, 이게 웬 고양이야?”
방 안에는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사뿐사뿐 돌아다니고 있었다. 에보니가 반색을 하며 고양이에게 다가갔지만 녀석은 낯선 이의 손길을 피해 주인이 있는 침대 위로 폴짝 올라갔다.
“아, 블라딘 백작님. 오셨습니까?”
“안녕, 자기야!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어때? 좀 나아졌어?”
“네, 처음보다는요.”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카리나가 얇은 로브를 주섬주섬 몸에 걸쳤다. 춥지 않은 날씨임에도 몸을 떠는 걸 보니 아직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듯했다.
“얼굴이 핼쑥하네. 입술에 핏기도 하나 없고. 근데 아프니까 더 예뻐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백작님도 참. 아픈 사람을 두고 장난이 심하십니다.”
“장난 아니고 진심인데. 그래, 아무튼 축하해. 폐하께 영지도 하사받고 자작 위도 받았다며?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해. 자기가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고.”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다 폐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이지요.”
“그런데 어째 영 기쁜 얼굴이 아니다?”
“그런가요…….”
“응, 그것도 아주 많이. 몸이 안 좋다길래 와봤더니 정작 안 좋은 곳은 여기려나?”
에보니가 레몬 껍질을 벗기던 과도를 자신의 왼쪽 가슴께에 가져가더니 작게 원을 그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레몬 조각에서 상큼한 향이 퍼져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재판이 끝난 날. 자기가 술에 취해 황궁을 나갔잖아. 사실 난 자기가 안 돌아올 줄 알았다?”
에보니가 레몬을 우물거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죽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어. 자기 그날 되게 위험해 보였거든.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처럼. 하필 그날 또 비도 왔잖아, 오늘처럼.”
“……저도 죽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고요.”
“그래? 그게 누구야?”
의자를 바싹 끌어당긴 에보니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제는 많이 흐릿해진 왼쪽 눈의 흉터가 웃음 짓는 눈과 함께 부드럽게 휘었다. 카리나는 자신의 무릎 위로 올라온 샤샤를 쓰다듬으며 에보니의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별로 말씀드리고 싶지 않네요.”
“그래, 싫음 말아야지. 나도 싫단 사람 붙잡고 늘어질 생각은 없어.”
에보니가 몸을 의자 뒤로 젖히며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에 천장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이 어지럽게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돌아왔을 땐 그만한 각오를 하고 온 거겠지? 내가 자기를 도왔으니 이제는 자기가 날 도울 차례잖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뭐, 내가 자기의 마음가짐이나 확인하자고 온 건 아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는데…….”
“중요한 일이요?”
“응. 내가 말이야, 자기에 대해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에보니가 카리나를 향해 가까이 오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반쯤 감긴 나긋한 눈매와 위험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자아냈다. 카리나는 샤샤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에보니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카리나, 자기. 리젠트라 가문에 숙청당한 집안 출신이라며?”
귓가를 간질이는 에보니의 목소리에 카리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안 그래도 잘게 떨리던 몸이 더욱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보니가 어떻게 이 일을 알고 있는 거지?’
다시 자리로 되돌아가는 그 짧은 순간, 카리나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녀가 파비엘 리젠트라의 후손임을 아는 사람은 이슈텔이 유일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실란다 백작 또한 그녀와 에스메랄다가 파비엘의 후손임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미치지 않은 이상 실란다 백작이 이 사실을 누설했을 리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파비엘의 후손임이 밝혀지면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은 자신의 딸 루비아일테니까.
‘그렇다면 이슈텔 리젠트라가……?’
이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파비엘의 후손을 살려둔 것은 이슈텔 자신에게도 숨겨야 할 치부였다. 그런 그녀가 다른 가문도 아닌 정적인 블라딘가에게 이 사실을 말했을 리 없다.
“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오신 겁니까?”
카리나가 에보니를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전 고아에 그 흔한 성도 없는 하층민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귀족 출신이라뇨. 어디서 몰락한 집안의 족보를 사 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닐 텐데? 꽤나 믿을 만한 사람한테서 들은 이야기거든.”
“그 사람을 불러다 처벌을 내리시지요. 거짓된 소문으로 백작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까요.”
“하하!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내가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제기랄, 대체 어떤 놈이…….’ 카리나는 오늘만큼 에보니가 불편했던 적이 없었다. 어서 빨리 그녀가 처소를 떠나주길 바랐다. 하지만 카리나의 바람과 달리 에보니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기야. 좋든 싫든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탄 사이야. 이 배가 바람을 타고 순항하든,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든 이젠 내릴 수가 없다, 이 말이야.”
에보니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여전히 나긋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내가 어떻게 가문을 이어받게 됐는지 알아? 물론 내 오라비들과 언니들이 멍청한 덕이 컸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어. 난 이 싸움에 내던져지기 위해 길러진 ‘투견’이거든.”
자기가 말해놓고도 우스운 비유였는지 에보니가 고개를 숙이고 킥킥거렸다. 카리나는 숨을 죽인 채 에보니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든 에보니의 보랏빛 눈동자가 한층 위험한 빛을 뿜어냈다.
“가문이 공작가에서 백작가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고서 내 아버지는 미친 사람처럼 술독에 빠져 살았어.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내 손위 형제들은 보고 배운 것이 없어서 노름이니 환락이니 하는 것들에 손을 댔고.”
에보니가 과즙 묻은 과도를 소매에 쓱 닦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온전히 제정신인 자식은 제일 어린 나 하나뿐이었지. 아버지는 내게 자신과 가문이 겪은 수모를 끊임없이 읊어가며 복수하라 소리쳤어. 잠도 재우지 않고 학문이니 무술이니 온갖 것들을 가르치면서. 근데 말이야, 사실 그게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그런지 크게 와닿지가 않더라고?”
전혀 유쾌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 놓으며, 에보니는 그 흔한 자기 연민에도 빠지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그녀의 표정엔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냥 이 모든 상황을 재미있는 경쟁이라 생각하기로 했어. 내 형제들처럼 쓰레기같이 사느니, 가문의 복수를 목표 삼아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했거든. 그래서 기왕이면 내가 던져진 이 싸움이 최대한 길고 구질구질했으면 해. 그래야 내가 이 형편없는 세상을 사는 이유가 하루라도 더 길어지잖아.”
에보니가 오크색 테이블 위로 나풀거리는 카리나의 긴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이슈텔 리젠트라, 참 괜찮은 사람이지?”
에보니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카리나는 감정의 동요를 숨기려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테이블 아래로 숨긴 손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품위 있고 고고하고, 아름답고 지혜롭지. 주변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마음씨도 퍽 고운 것 같더라. 누구라도 참 동경할 만한 대상이야.”
“…….”
“그 사람 때문에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 안에는 칼로 벼려낸 듯한 잔혹함이 깃들어 있었다. 카리나는 자신을 향한 에보니의 시선을 바로 보지 못했다.
“역시 그랬나 보네. 그럼 자기가 착각하고 있는 걸 내가 바로 잡아줘야겠어.”
에보니가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카리나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은빛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은 어느새 가녀린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에보니가 손톱을 세워 카리나의 목을 살짝 찔렀다.
“그 여자가 널 위해서 그 말을 한 것 같아? 아니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 말이지. 왜? 네가 죽으면 기분이 더러워지니까. 제 알량한 양심에 돌을 얹기 싫어서.”
“양심이라고요……?”
“그래. 법정에서 봤잖아, 그 여자의 표정. 그게 어디 실란다 백작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얼굴이었나? 증거와 증인들이 나올 때마다 환멸 어린 눈길로 백작을 쳐다보았잖아. 재판이 끝났을 때도 하나 아쉬움 없는 얼굴로 재판장을 빠져나갔지. 표정만 봐선 백작이 아니라 우리 측근인 수준이었어.”
에보니가 카리나의 머리채를 아래로 잡아당겨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한 금빛 눈동자와 냉혹한 보랏빛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이슈텔 리젠트라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우리의 수사를 방해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넌 거기에 의미를 두는 것 같은데, 절대 흔들리지 마. 방관자의 태도. 고작 그게 그 여자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전부니까.”
“…….”
“고작 방관자의 침묵에 고마워하며 살려는 건 아니지?”
카리나의 심장에 비수를 꽂듯, 에보니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었다.
“그 여자는 네가 살 길 바라는 게 아니야. 그저 죽지 않길 바라는 거지. 네가 행복하길 바라지 않아, 단지 불행하지만 않았으면 하지. 네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걸? 넌 언제나 그녀보다 낮은 사람이어야 하니까. 그게 동정의 한계야!”
“…….”
“그 본심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 여잘 착하다고 생각한 거야? 어리석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