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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49화 (49/160)

49화 : 그날의 각오

그녀가 이대로 사라져 준다면 나는 좀 더 편안해질 수 있을까.

카리나는 염원하던 복수를 이루었고, 나는 소중한 우군을 잃었다. 더 깊은 악연이 되기 전에 헤어질 수 있다면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었다.

카리나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황궁에 돌아가면 다시 나와 척을 질 수밖에 없다는 걸. 지금까지 있었던 사건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지럽고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나와 자신의 운명을 내 선택에 맡기고 있었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계속 나아갈 것인가.

“후회라는 말은 네가 나한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고작 너로 인해 후회할 만큼, 나는 약하지 않으니까.”

나는 마차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자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에 대한 책임이기도 했다.

“그러니 살아라. 처음 나를 찾아왔던 그날의 각오처럼.”

* * *

루드비 실란다에 대한 판결이 확정된 건 그로부터 삼 주 뒤였다.

황제는 에보니 블라딘이 제출한 증거를 모두 받아들였다. 하지만 백작가의 다른 사용인들에게서 이렇다 할 증언이 나오지 않은 탓에, 제시 인카 양의 증언은 힘을 잃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실란다 백작에게는 5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귀족에게 내려진 선고치고는 몹시 높은 형량이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살인죄가 인정되지 않았기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항소권이 없는 실란다 백작은 판결에 따라 며칠 후 서부 후작령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실란다 백작 부인 또한 수도에 있는 백작 저를 정리하고 남편을 따라 서부로 내려가고자 했다. 하지만 릴체 후작 부인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

실란다 백작 부인은 명망 높은 경제학자였다. 릴체 후작 부인은 그런 그녀가 남편 때문에 연구를 그만두는 걸 반대했다.

무엇보다 지금 수도에서 실란다 백작가가 사라진다면 이는 대외적으로 블라딘가가 실란다가를 실각시켰음을 보여주는 꼴이 되었다. 결국 백작 부인은 루비아와 함께 수도 세이더에 남기로 결정했다.

귀족들은 짐짓 실란다 백작가의 일을 안타까워하는 척하면서도 루비아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은 정말 루비아가 죽은 무희의 딸인지,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는 린턴 준남작과 같은 눈을 가졌는지 궁금해했다.

실비아는 가십거리를 쫓는 귀족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몇 주간 사교 모임에 발걸음을 끊었다.

기분이 울적한 탓에 나 역시 처소에 틀어박혀 있는 날이 잦았다. 하지만 오늘은 황제 폐하, 그리고 두 대공과의 저녁 식사 자리가 있는 날이었다. 늦지 않게 준비를 한 뒤 만찬실로 걸음했다.

“오랜만이네요, 이슈텔.”

만찬실로 들어서자 일리드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그 앞에 앉은 헬리온이 나를 보고는 물었다.

“많이 바빴어? 아니, 하나마나한 질문을 했군. 바쁘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의 말대로 최근 며칠간은 정신없이 바빴다. 실란다 백작이 맡고 있던 업무를 다른 귀족들에게 분배해야 했고, 카리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릴체 후작 부인을 상대하기도 버거웠다.

마음 같아선 오늘 이 식사 자리도 피하고 깊은 잠에 들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나를 기다리고 있던 두 대공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도 했다.

“폐하께선 아직이십니까?”

“조금 전에 오지 못하신다고 연락을 주셨어. 나중에 따로 식사를 하자고 하시던데.”

헬리온의 대답에 나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최근 들어 카리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소식은 이미 하녀들을 통해 들었다.

‘아마 지금도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고 계시겠지.’

나는 폐하와 카리나에 대한 생각을 애써 밀어두며 식사를 시작했다.

“두 분께서는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야 늘 비슷하지요. 폐하께서 분담해주신 업무를 수행하고, 대신들의 보고를 받고, 다시 폐하께 올릴 문서를 작성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답니다.”

“나도 비슷해. 형이 말한 거랑 너무 똑같아서 뭐라 더 덧붙일 말이 없네. 아, 참!”

붉은 와인을 마시던 헬리온이 무언가 떠오른 듯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델루민 경이 며칠 전 사직서를 냈다는데, 보고는 받았어?”

“응, 받았지.”

델루민 경은 내 호위를 맡고있는 기사였다. 얼마 전 그는 영지에 흉년이 든 탓에 사직서를 내고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호위 기사 자리는 비워둘 수 없는 중요한 자리였지만, 최근엔 내가 황궁 밖으로 나가지 않은 탓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기사 한 명을 추천해 볼까 해.”

헬리온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창백한 푸른 눈에서 진지함이 엿보였다.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닌 듯했다.

“누구를?”

“라비 텔리아. 슈리의 셋째 오빠야.”

“지금 네 측근을 이슈텔의 호위로 두겠다는 거야?”

내가 무어라 대답도 하기도 전에 일리드가 먼저 끼어들었다.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헬리온을 보았다.

“텔리아 가문의 셋째라면 북부 대공령에서도 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텐데, 무엇 하러 수도에까지 내려온단 말이야?”

“왜 이렇게 반응이 날카로워? 내가 내 마음대로 기사 하나 추천도 못 해?”

예민한 일리드의 반응에 헬리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일리드는 불쾌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리젠트라 가문은 너와 나 사이의 황위 계승 문제에서 중립을 지키기로 했어. 비록 구체적인 지침이나 방안 같은 건 없지만 북부 가신을 이슈텔의 측근으로 밀어 넣는 건 공정성에 어긋나.”

“뭔가 착각하나 본데, 호위 기사가 언제부터 그렇게 최측근 취급을 받았지? 지금껏 내가 델루민 경을 지켜본 결과 그는 한 달에 채 반도 일하지 않았어. 이슈텔이 황궁 밖으로 나갈 때나 잠깐잠깐 대동했지, 황궁 내에서는 경비가 삼엄해서 호위를 데리고 다닐 일도 별로 없고.”

“그렇다면 더더욱 텔리아 가문의 셋째가 올 이유가 없겠네. 북부의 일을 제쳐 두고 올 만큼 요직이 아니란 거잖아.”

맹점을 파고들며 반박하는 일리드의 기세에 헬리온이 의외라는 듯 테이블 위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는 손에 쥔 나이프를 흔들며 일리드를 가리켰다.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지 모르겠네. 단순히 정치적 공정성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게 아니면 혹시 나와 이슈텔 몰래 숨기는 거라도 있는 건가?”

“말 함부로 하지 마, 헬리온. 어리다고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형이야말로 쓸데없이 날 견제하려 들지 마. 가만 보면 형도 참 욕심이 많아. 어른스러운 척, 걱정해주는 척 갖은 핑계를 다 대면서 결국 조금도 양보하려 들지 않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더는 존중 못 해줘.”

“이런 식? 네가 말하는 이런 식이란 게 대체 뭔데?”

“글쎄. 뭐라 한 마디로 딱 정의하기가 어렵네. 그래서 나도 이제부터 하나씩 정리해보려고. 형이 어떤 사람인지.”

지지 않고 맞서는 헬리온의 말솜씨에 일리드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온화한 푸른 눈동자에 노여움이 번졌고 테이블 끝을 쥔 손은 뼈마디가 드러날 만큼 하얘져 있었다.

일리드가 싸움의 불씨를 더 지피기 전에 내가 나섰다. 평소 같으면 그만들 하시라며 불쾌감을 드러냈을 텐데, 지금은 그럴 힘도 없었다. 나는 으르렁거리는 일리드를 향해 멈추라며 손을 내저었다.

“두 분 오늘따라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제가 바빴던 지난 삼 주 동안 서로 싸우기라도 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그런 거. 늘 그랬듯이 저 녀석이 괜히 제게 심술을 부리는 겁니다.”

“내 감정을 함부로 심술이라 치부하지 마.”

헬리온이 탁 소리 나게 식기를 내려놓으며 일리드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우리 쪽은 모든 준비를 마쳤어. 이슈텔의 호위 기사 자리에 지원했으니 경쟁자가 있다면 이기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겠지. 우리가 맘에 들지 않으면 남부에서도 기사를 뽑아 지원해봐. 그쪽에 우리를 상대할 만한 기사가 있을진 모르겠다만.”

헬리온의 도발에 일리드가 어이가 없단 듯 혀를 찼다. 다행히 일리드는 더는 헬리온의 말꼬리를 잡지 않았다.

이후 식사 시간 내내 두 대공 사이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처럼 냉랭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을 안 해주니, 원…….’

만찬실을 나오자 헬리온이 재빨리 내게 처소까지 데려다주겠다 말했다. 일리드가 신경 쓰였으나 헬리온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뭐해서 알겠다고 했다.

“조만간 또 봐요, 이슈텔.”

내게 다정하게 인사한 일리드가 헬리온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마음이 쓰여 멀어지는 일리드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헬리온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라비 텔리아가 수도로 올 때, 네게 줄 선물을 가져올 거야. 내가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니까 기대해도 좋아.”

“선물……? 그게 뭔데?”

내가 궁금해하자 헬리온은 신이 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잖아. 며칠 있으면 라비가 도착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알았어. 그럼 나도 기대하고 있을게.”

헬리온의 들뜬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엷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헬리온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그의 뺨은 자신의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붉어져 있었다.

‘헬리온이 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문득 다시 드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무거워졌다.

수도에 올라온 이후, 헬리온은 황제가 분담해준 업무를 매우 유능하게 처리해왔다. 대신들이 놀랄 만큼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기도 했고, 현 상황과 맞지 않는 정책이 있으면 과감하게 개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나이 든 대신들은 헬리온이 알렌시아 황녀의 불같은 성미와 실행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며 그를 칭찬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는 분명 훌륭한 황태자감이었다.

‘그렇다면 난 헬리온과 혼인하게 되는 걸까?’

풍등 아래서 그가 내게 입을 맞춘 날. 그날을 기점으로 마냥 어리게만 느껴졌던 헬리온이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뿐이었다.

‘헬리온에 대한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내게 감정이란 늘 풀기 어려운 숙제 같았다. 그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선,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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