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46화 (46/160)

46화 : 재판(3)

“플레코 광장이라면 죽은 에스메랄다 양을 말하는 건가요?”

에보니의 물음에 인카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광장에 유명한 무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구경하러 갔거든요. 그런데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며, 신고 있던 신발, 그리고 몸에 두른 장신구 모두 제가 백작님과 함께 고른 것들이었습니다.”

“재판장님, 그리고 배심원 여러분. 이쪽을 봐주시겠습니까?”

에보니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원고석 뒤편의 문이 열리며 경비대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이동식 행거와 낡은 나무함을 들고 있었다.

“여기 걸린 드레스들은 전부 백작이 에스메랄다 양에게 선물해준 것입니다. 물론 함에 든 장신구들도요. 원고 린턴 준남작이 보관하고 있던 것들입니다. 아, 그리고 훔친 거라느니, 이런 거 선물해준 적 없다느니 하는 주장이 있을까 봐 미리 제출하겠습니다. 여기 해당 물건을 판 가게들에서 압수한 장부입니다.”

에보니가 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재판장에게 제출했다.

“다행히도 워낙 고가의 물건들이라 가게에서도 따로 장부에 적어뒀더군요. 거기에 ‘제시 인카’로 구매된 물품들과 증거물을 대조해보시지요. 전부 같습니다.”

“흐음…….”

재판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이번 증거는 실란다 백작에게 불리한 쪽이었다. 재판장은 마른기침을 하고는 인카 양을 보았다.

“구매 내역과 증거물이 있다고 해도 실란다 백작이 에스메랄다 양을 살해한 범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증언이나 증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예. 아직 증언할 말이 한 가지 더 남아있습니다.”

인카 양의 말에 실란다 백작이 일부러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명백히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인카 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를 눈치챈 에보니가 그녀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렸다.

“인카 양, 겁먹지 말고 차근차근 말씀하시죠.”

에보니의 상냥한 목소리에 용기를 낸 인카 양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실란다 백작님의 딸은 죽은 무희가 낳은 아이입니다. 백작 부인은 아이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백작 저에서 일한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입니다. 몇 달간 영지에 내려가 있던 백작 부인이 어느 날, 처음 보는 아이를 데려왔다는 것을요.”

“그 입 닥치지 못해! 대체 무슨 뒷돈을 받아먹었기에 하녀 주제에 주인을 고발하는 것이냐!”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참지 못한 실란다 백작이 고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카리나가 날카롭게 맞받아쳤다.

“당신이야말로 그 더러운 주둥이 닥쳐! 이 찢어 죽일 살인자 주제에!”

“뭐라? 이 천박한 핏줄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 여기서 나가는 즉시 네년의 뒤를 낱낱이 조사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그만, 그만!”

재판장이 의사봉을 내리치듯 두드렸다. 그리고는 심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이상 소란을 일으키면 피고와 원고의 발언권을 회수할 것입니다. 그러니 조용히 하세요!”

카리나가 입술을 세게 깨물며 백작을 노려보았다. 백작 역시 지지 않고 카리나의 금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에보니가 다시 인카 양을 보았다.

“인카 양, 계속하시죠. 그래서 에스메랄다 양이 아이를 낳을 때, 그 곁에 있었나요?”

“아니요. 그 일은 저보다 직급이 훨씬 높은 하녀장님들이 하셨습니다. 제, 제가 한 일은…….”

말을 잇던 인카 양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는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듯 두 눈을 감은 채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감은 눈 아래로 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턱 끝으로 떨어져 내렸다.

“제가 한 일은…… 아이를 낳은 무희에게 약을 가져다주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제가 건넨 약이 산모에게는 독약이나 마찬가지란 걸요. 그리고 하녀장님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제게 그 일을 시켰다는 것을요.”

인카 양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차분히 증언을 이어갔다. 증언이라기보단 자신의 죄책감을 고백하는 것에 더 가까운 분위기였다. 그녀는 지난 삼 년간 자신의 가슴을 옥죄어 왔던 일을 토해내듯 읊었다.

“깊은 밤이었습니다. 잠든 저를 하녀장님이 깨우셨습니다. 그리고는 물잔 하나를 건네주며 저택 별채에 있는 여인에게 이 약을 가져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저택 관리인이 길에서 아이를 낳을 뻔한 여인을 데려와 도와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

“약 정도는 깨어있던 하녀장님이 가져다줘도 되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저는 순순히 명을 따랐습니다. 별채에는 막 아이를 낳아 지친 무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친 와중에도 아이가 보고 싶다고, 아이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이는 잘 모르겠고, 우선 약을 마시라고 잔을 건넸습니다.”

“…….”

“제가 별채를 나오자 하녀장님들께서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오늘 보았던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고요. 고작 여인에게 약 한 잔 건넨 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 했습니다. 얼마 후, 그 무희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요.”

카리나는 더는 듣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긴 은발이 그녀의 얼굴을 가려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 분명 괴로워하고 있을 터였다.

“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건넨 약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요. 제가 본 무희는 지쳐있었지만 곧 죽을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특히 하녀장님들은 그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크게 화를 내며 제 입을 막느라 급급했으니까요.”

“…….”

“그리고 무희가 낳았다는 아이. 분명 백작님과 무희는 연인 관계였습니다. 그녀가 낳은 아이가 백작님의 아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백작 저 어디에서도 아기 울음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

“그래. 우연한 사고겠지. 모든 일이 다 우연일 거야. 아이는 출산 중에 죽었을 수도 있고 산모도 갑자기 몸에 무리가 생겨 죽은 걸 거야. 애써 그렇게 생각하고 지내던 중, 몇 달간 영지에 머물던 백작 부인께서 아기를 데리고 나타나셨습니다.”

“그 아이가 루비아 실란다고요?”

“맞습니다. 백작님은 주변의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해가 될까봐 부인의 임신 사실을 숨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인께서 친정에서 아이를 낳아온 거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백작님의 말을 믿고 아이를 환영했지만, 전 그 아기를 보자마자 알았습니다.”

인카 양이 눈물 젖은 눈으로 카리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리나가 깊이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인카 양이 손을 들어 카리나를 가리켰다.

“아기의 눈이 저분과 똑같은 금빛 눈동자였습니다. 죽은 무희도 똑같은 금빛 눈을 가지고 있었고요. 제가 건넨 약을 마시며 아이가 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때 보았던 그 눈이 절대 잊히지가 않습니다. 그 무희를 죽인 게 꼭 저인 것만 같아, 지난 시간 동안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숨죽이고 있었던 배심원들이 다시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루비아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고, 그중 실란다 백작가와 친분이 있는 몇몇은 당황한 얼굴로 대답을 피했다. 그 모습에 다른 배심원들이 맞나보다고 중얼거리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재판장님, 전부 증거가 없는 말입니다.”

실란다 백작이 목소리를 추스르며 말했다.

“눈 색이 같다? 겨우 그따위 말로 지금 제 아이와 부인을 모욕하는 겁니까? 그러면 같은 눈동자 색을 가진 세상의 수많은 이들은 모두 피 섞인 가족이랍니까? 전혀 설득력이 없는 주장입니다.”

“…….”

“그리고 저희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러면 다른 하인들은 왜 증인으로 나오지 않는 겁니까? 증거도 없는 와중에 증인도 단 하나뿐이어서? 이거야말로 조작된 증언이 아닌가 심히 의심이 갑니다. 원고와 변호인, 그리고 저 증인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는 건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블라딘 백작.”

재판장이 에보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원고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인카 양의 이름으로 된 구매 목록을 제외하고는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혹시 실란다 백작가의 다른 하인들을 증인으로 세울 순 없습니까?”

“예, 없습니다. 지금 백작가의 하인들 모두 수도 경비대에서 조사를 받고 있지만, 증언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에보니의 단호한 대답에 배심원들이 고개를 갸웃댔다. 충분한 증인을 확보하지 못했음에도 그녀의 태도가 몹시 당당했기 때문이다. 가소롭단 듯 눈을 끔뻑이며, 에보니가 배심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귀족 여러분께는 참 다행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직 주인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말하길 꺼려하는 사용인들이 대다수니까요. 예, 맞습니다. 양심과 용기를 가진 이는 인카 양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이 단 한 명의 증인을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감사했습니다. 아직 이 세상이 완전히 미쳐 돌아가지는 않는구나 싶어서요.”

에보니의 거침없는 표현에 배심원들이 불쾌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한 증거, 더 높은 신분의 증인이 나와야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이 재판이 동일한 계층 간의 다툼이었어도 같은 반응이었을까요? 아마 아니겠죠. 이 정도로도 충분한 증거가 됐겠지요.”

“…….”

“저희는 인카 양 외에도 에스메랄다 양과 실란다 백작이 연인 관계였다는 증언을 이미 여럿 들었습니다. 그리고 백작은 가명을 사용해 약물을 구입했고, 그 약물이 죽은 에스메랄다 양의 몸에서 검출되었습니다.”

“…….”

“이에 변호인인 저 에보니 블라딘과 원고 카리나 린턴은 루드비 실란다 백작을 살인죄로 기소하는 바임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루비아 실란다 양의 친자 검사를 진행하길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루비아 양의 법적 어머니인 조안나 실란다 백작 부인과 말입니다.”

에보니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재판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 지긋하고 경험이 풍부한 재판장이 보기에도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재판장이 지친 눈을 들어 실란다 백작을 보았다.

“실란다 백작.”

“예.”

“재판이 끝나면 나는 원고 쪽에서 제시한 증거들을 황제 폐하께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전에 그대 역시 이 모든 것을 뒤집을 만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고요. 제 판단에 그 증거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인 듯합니다.”

재판장이 잠시 말을 멈추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윽고 재판장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비아 실란다 양의 친자 검사를 진행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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