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45화 (45/160)

45화 : 재판(2)

“존경하는 재판장님, 설마 저 광대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진 않으시겠죠?”

실란다 백작이 경멸의 눈초리로 광대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무려 삼 년 전의 기억입니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게 사람인데, 어찌 저리 확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몰래 엿보기나 했던 사람을 기억한다고요? 신빙성이 부족합니다!”

“아닙니다, 재판장님! 증인들은 물론 저 역시 똑똑히 보았습니다! 실란다 백작이 에스메랄다와 시간을 보내는 걸요!”

결국 참지 못한 카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록 저들이 천대받는 광대라 할지라도 그들이 용기를 내어 하는 증언까지 모독하지는 말아주시지요!”

“거짓 증언을 하는 자들에게 모독은 무슨 모독이란 말이냐!”

“자자, 그만 진정하세요. 원고, 피고!”

재판장이 언성을 높이자 실란다 백작과 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씩씩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원고의 의견도 알겠고 피고의 의견도 알겠습니다. 우선 이번 증인들은 돌려보내고 다음 증인을 불러오시죠.”

“알겠습니다.”

에보니 블라딘이 광대들을 내보려 다가갔다. 그러자 내내 조용히 있던 어린 소년 하나가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저, 저기요. 죄송한데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소년이 에보니를 향해 물었다. 에보니가 재판장의 허가를 구하자 소년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에, 에스메랄다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그래서 누나가 죽었을 때 정말 많이 울었는데. 저희가 여기 온 것도 다 누나를 죽인 범인이 밝혀졌으면 해서거든요.”

쏟아지는 귀족들의 시선에 기가 죽은 듯 소년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왔다.

“그러니 여기 계신 분들이 꼭 범인을 잡아주세요. 그렇다고 누나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지만, 남겨진 사람들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요.”

소년이 말을 마치자 광대들이 아이의 어깨를 감싸주며 법정 밖으로 나갔다.

아이의 진심 어린 호소에 얼마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에보니가 주의를 환기시키며 다시 재판을 진행했다.

“자, 그럼 다음 증인을 모시겠습니다. 베로트 씨.”

에보니의 부름에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장부 하나가 들려있었다.

“이번 증인은 이름도 성도 둘 다 갖고 계신 분이니 이제 표정을 푸셔도 됩니다, 배심원 여러분들.”

비꼬듯 말하는 에보니의 말에 배심원들이 헛기침을 했다. 확실히 지금 들어온 사람은 조금 전 광대들과 달리 훨씬 깔끔한 차림새였다. 적어도 그는 격식에 맞는 옷을 차려입었고, 드러나는 살에 묻은 때도 없었다.

“증인은 자기소개를 해주시죠.”

“저는 수도 외곽에서 자그마한 약재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알렌 베로트라고 합니다.”

“오늘은 무슨 증언을 하러 오셨습니까?”

“저는 삼 년 전, 구매를 요청받은 약물에 대해 증언하러 왔습니다.”

“어떤 약물이었죠?”

“아주 구하기 힘든 약물이었습니다. 녹시턴이라고 하는 약물인데 매우 값비싼 신경안정제입니다.”

베로트 씨가 대답을 이어갔다.

“그 약은 불면증을 앓거나,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이 주로 복용하는 약입니다. 심장 박동을 일정하게 유지 시켜주고 호흡을 안정적으로 해주어 한때 귀족들 사이에서 무척 인기가 있었습니다. 비록 얼마 전에 더 좋은 약재가 발견돼 지금은 거의 안 쓰다시피 하지만요.”

“그 약의 부작용도 있나요?”

“모든 약이 그렇듯 녹시턴에도 부작용이 있지요. 심각한 출혈이 있을 시에는 복용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녹시턴을 구매하시는 분들이 볼 수 있게 약병에 크게 경고문을 써둡니다. 상처가 난 사람은 절대 복용하지 말라고요.”

“만약 이 약을 갓 출산한 산모가 복용하면 어떻게 되지요?”

“어휴,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당장 약을 토해내지 않는 한, 금방 죽게 될 것입니다.”

“재판장님, 증거로 제출한 시신 부검서를 확인해 주십시오. 공증을 받은 해당 문서에는 사망한 에스메랄다 양의 몸에서 녹시턴이 검출되었음이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병을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에보니가 카리나의 발밑에 있던 상자를 열어 약병 하나를 꺼내 재판장에게 다가갔다.

“실란다 백작의 저택 서재에서 발견한 약병입니다. 약병에는 베로트 씨가 설명한 것처럼 녹시턴에 대한 주의사항, 그리고 구매 날짜가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약병에 적힌 구매자 이름이…… ‘레이턴’이라고 적혀있는데요?”

“아, 그것은 실란다 백작이 쓴 가명입니다. 안 그래도 지금 베로트 씨가 재판장님께 삼 년 전 가게 장부를 보여드릴 겁니다. 베로트 씨?”

“예, 여기 삼 년 전 저희 가게 장부입니다. 약품은 엄격하게 다루기 때문에 구매자의 이름과 신상 정보, 주소까지 모두 적혀있습니다.”

베로트 씨가 두꺼운 장부를 재판장에게 보여주었다. 에보니 블라딘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해 녹시턴을 구매한 사람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을 모두 조사한 결과 그 ‘레이턴’이라는 사람은 수도에 없었습니다. 누군가 위조해낸 신분증을 썼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약병이 실란다 백작의 저택에서 발견된 것이고요.”

배심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광대의 말은 흘려들었으나, 명확한 신분과 직업을 가진 이가 증거를 들이밀자 판단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실란다 백작, 이에 대해 해명할 말씀이 있습니까? 신원불명의 이가 구매한 약물이 왜 백작의 저택에서 발견된 것이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불면증이 있어 종종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는 있다만, 약을 직접 사러 가지는 않았습니다. 보통은 하인들이 대리로 구매해 오는데 누군가 장난을 쳤나 봅니다.”

실란다 백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 모습에 카리나가 이를 부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에보니가 그녀를 말렸다.

실란다 백작의 반응에 배심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도 약병에 적힌 이름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간 자신의 청렴결백함을 늘 강조해온 백작이었다. 그런 그가 위조된 신분으로 약을 사 온 걸 그냥 넘어갔다고? 여간 모순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으로 베로트 씨의 증언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증인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블라딘 백작.”

에보니가 베로트 씨를 배웅해주고 왔다.

이제 마지막 증인만이 남았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에보니가 젊은 여인을 데리고 왔다.

여인은 몸을 잘게 떨며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광대들과 베로트 씨는 긴장했을지언정 겁에 질려있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 증인은 두 손으로 옷자락을 꼭 쥔 채, 실란다 백작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마지막 증인, 신분을 밝혀주세요.”

“제, 제시 인카입니다. 삼 년 전에 실란다 백작 저에서 근무하던 하녀였습니다. 지금은 하녀 일을 그만두고 다른 지방에서 자리를 잡아 살고 있습니다.”

인카 양의 말에 실란다 백작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며 인카 양을 노려보았다.

“오늘은 무슨 증언을 해주러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저, 저는 백작님과 무희 에스메랄다의 관계. 그리고 백작님이 제게 약이든 잔을 그녀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던 일을 말하고자 이 자리에 왔습니다.”

인카 양의 발언에 배심원석이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백작가의 하녀가 증인이라고?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아랫사람이 어찌 윗사람을!”

“하녀의 증언이라면 앞의 두 증인보다 힘이 실리지 않겠는가? 이 증인의 발언에 따라 백작의 운명이 갈리겠군.”

“나, 원 참. 말세야, 말세. 나도 집에 가서 하인들을 다시 교육해야겠어.”

배심원들은 용기를 낸 증인을 앞에 두고 제 집안 걱정을 먼저하고 있었다.

“너무들 소란스러우시네요. 다들 찔리는 구석들이 있나 봅니다?”

헬리온이 마지막 말을 중얼거린 배심원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경기하듯 놀란 남자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헬리온은 이미 들켰다고 말하며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리 전 주인이라지만 명문 백작가를 등지고 친분도 없는 여인을 위해 증언을 한다는 게 퍽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만들 떠드시고 저 여인의 말에 귀 좀 기울여주시지요. 본인 집안 걱정은 집에 갈 때나 하시고요.”

헬리온의 말에 배심원들이 바른 자세로 고쳐 앉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헬리온이 상체를 기울여 앞에 있는 두 배심원의 머리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세는 몹시 불량했으나 인카 양의 증언을 좀 더 가까이에서 듣고 싶어 그러는 듯했다.

“그럼 인카 양. 아는 대로 증언을 해주세요. 실란다 백작의 하녀로 일하며 당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요.”

에보니 블라딘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카 양은 여전히 실란다 백작을 등진 채, 에보니와 카리나 쪽을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삼 년 전, 저는 실란다 백작 저에서 하녀로 일했습니다. 선배 하녀들을 도와 온갖 잡무를 맡았지요. 하녀를 위한 하녀라고 보시면 됩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백작님께서 저를 데리고 옷가게며 구두 가게, 보석상 같은 곳에 가셨습니다. 누군가에게 선물할 물건이 있는데 제가 같이 봐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요.”

“왜 하필 인카 양이었죠? 다른 하녀들도 있고, 심지어 귀족 가문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당신보다 미적 감각이 훨씬 뛰어날 텐데요.”

“저도 백작님께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백작님께서는 선물을 받을 사람이 저와 비슷한 또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는 눈이 비슷할 거라고…….”

“이상하네요. 그런 고가의 선물을 받는 이는 분명 아내일 텐데, 인카 양은 실란다 백작 부인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데요.”

“저도 그 점이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하녀장님께서 주인의 일은 함부로 묻는 게 아니라고 하셔서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말 없이 백작님을 따라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 등의 물건을 구매하러 갔습니다.”

“백작 부인이나 다른 친척들이 그 물건을 착용한 걸 본 적 있습니까?”

“아뇨. 제가 그 물건들을 본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거기가 어디였죠?”

“플레코 광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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