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귀족다움
“그때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지. 에스메랄다는 직접 아이를 키우고 싶어 했고, 나 역시 내 아이가 필요했거든. 이슈텔, 너도 알잖니. 나와 아내 사이에서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단 걸.”
“차라리 아이만 데려오지 그러셨어요. 한낱 가난한 무희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아이를 뺏어오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에스메랄다가 절대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거든. 나 또한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너도 알잖아, 그간 리젠트라와 릴체가 측실이 낳은 아이들을 얼마나 배척했는지. 일이 커졌다간 내 유일한 핏줄이 혼외자라는 걸 세상에 알리는 꼴이 될 텐데.”
실란다 백작 부부는 결혼한 지 십 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었다.
보통 귀족의 경우, 아이가 생기지 않아 후계가 끊어질 상황에 처하면 두 가지 방안을 썼다. 첫 번째는 친척의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측실을 들여 후손을 보는 것이었다.
첫 번째 방안의 경우, 가주가 불임일 경우 행해지던 방법이었다. 반면 측실을 들이는 것은 가주의 배우자가 불임일 경우 행해졌다.
그러나 근 몇 년간 두 번째 방안을 택하는 가문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리젠트라 내전이 끝난 후부터 서서히 늘어난 것이었다.
파비엘 리젠트라의 생모 멜라니는 본디 리젠트라 공작의 측실이었다. 릴체 후작 부인은 전쟁이 발발한 건 모두 측실 제도에서 기인한 거라며 공공연하게 측실 제도를 비판했다.
릴체 후작 부인은 본처와 적자가 있는데도 측실을 가진 귀족들을 비난한 것은 물론,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측실을 들인 귀족들도 좋게 보지 않았다. 정치에 발을 담그고 싶은 중앙 귀족들은 결국 후작 부인의 눈치를 보며 측실들을 모두 집안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릴체 후작 부인은 훌륭한 귀족 부부의 표본으로 늘 실란다 부부를 추켜세우곤 했다. 두 사람은 오랜 결혼 생활 동안 구설수를 만들지 않았으며, 아이가 없음에도 단 한 번도 측실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조카 중 하나를 입양하여 가문을 잇게 할 것이라는 게 실란다 백작의 뜻이었다. 모든 귀족들, 특히 귀부인들이 실란다 백작의 뜻에 아낌없는 찬사와 지지를 보냈다.
그러던 중 루비아가 생긴 건, 전부 아내에 대한 백작의 신의에 하늘이 감복한 것이라며 모두들 기뻐했다.
완벽한 가정이었다. 곧 재상이 될 지혜로운 아버지, 명문가 출신의 학자 어머니, 그리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어린 딸.
모두의 부러움을 살 만한 실란다 백작가였다. 나 역시 행복한 사돈의 집안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그것이 어느 누군가의 희생 위에 꾸려진 행복인지도 모른 채.
“그래서 무희를 죽이신 겁니까. 그녀만 없어지면 모든 비밀이 숨겨지니까요?”
나는 실란다 백작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허망하고도 참담한 심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똑똑하고 아이답지 않게 마음이 넓었던 실란다 백작이 좋았다. 친오빠 자르보다 그를 더 따랐고, 그가 우리 가족이 되었을 때도 진심으로 기뻤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그는 내가 아는 그 시절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기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비겁한 인간일 뿐이었다.
“반역자의 잔당이라 그녀를 죽였다고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당신은 아이를 뺏어오고 싶었고, 마침 죽은 여인이 파비엘의 후손이란 것을 알았으니 독살해도 된다고 마음먹은 게 아닙니까!”
“뭐……?”
“왜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렇게 치면 그 반역자가 낳은 루비아도 파비엘의 후손이 아닙니까? 루비아도 생모와 똑같은 죄를 씌우시지요!”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슈텔! 루비아는 내 딸이야!”
“죽은 무희의 딸이기도 하지요! 모순적인 말 그만 하세요, 보기 역겹습니다!”
결국 참지 못한 내가 백작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감옥 전체를 울리는 고함에 백작이 일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일그러진 회색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는 실소했다.
“넌 너무 물렀어, 이슈텔. 우리 세 가문에 이런 위기가 닥쳤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기는커녕, 누가 옳니 그른지를 따지고 있다니. 그런 쓸데없는 정의감과 도덕심은 이제 버릴 때도 되지 않았니?”
“……이런 일을 벌여놓고 너무도 태연하시네요. 후회하는 모습도 없이.”
“후회? 그래, 후회되지. 언니는 죽였으면서 왜 그 동생은 살려뒀었나 싶어서. 그때 같이 없애서 후환을 남겨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실란다 백작이 입술 끝을 비릿하게 말아 올리며 중얼거렸다.
“겉으로 보기엔 참 귀족 같아 보여도 알면 알수록 너는 참 이상한 아이야.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더 이상 너와 상대할 기운이 없구나. 이만 돌아가라.”
백작이 창살에서 몸을 뗀 후, 침대에 돌아가 몸을 기대 누웠다. 그런 그를 보며 뱉듯이 한마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이야말로 참으로 귀족다우십니다.”
* * *
시간은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감옥에서 황궁으로 돌아온 나는 챙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넓은 정원을 걸었다.
‘마음이 이상하네.’
폭풍처럼 몰아쳤던 하루의 피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일리드와 새장을 거닐고, 헬리온을 만난 것이 전생의 일인 양 아득하게 느껴졌다. 심장에 돌을 얹은 듯 가슴은 답답하고 내딛는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작은 문을 열고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황궁 하인들도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밤이었다. 나는 문 옆에 있던 작은 등불을 들고 터벅터벅 걸었다. 힘없이 흔들리는 등불만큼이나 지친 내 몸도 조금씩 휘청이고 있겠다.
“어머, 윈테라 공작 부인 아니십니까? 이 야심한 시간에 일행 하나 없이 어디를 다녀오시는 겁니까?”
등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불을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내가 들어왔던 작은 쪽문으로 카리나가 넘어오고 있었다.
“그러는 너 역시 늦은 밤에 혼자 어딜 그리 다니느냐. 준남작 작위를 받았으니 이제 하녀도 있을 텐데.”
“이렇게 둘 다 혼자 다니는 걸 보면 피차 말 못 할 사정이 있나 봅니다. 그럼 제가 먼저 말씀드리지요. 저는 플레코 광장에 다녀오는 길이랍니다. 증언을 해줄 친구들을 만나느라요. 공작 부인께서는요?”
“대답한다 한 적 없다.”
“어머나, 냉랭하셔라. 그럼 제가 한 번 맞춰볼까요? 황궁 근처 감옥에 다녀오시는 길이죠? 실란다 백작을 만나셨나요?”
예상치 못한 하루에 몹시 지친 상태였다. 더 이상 누군가와 말을 섞거나 상대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카리나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모자챙을 더 아래로 내려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은 어떻던가요? 제게 화를 내던가요,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던가요? 후회는… 그런 건 하지 않겠죠. 그럴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제 언니를 독살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작의 눈에서 읽힌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난감함과 불편함, 그리고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뿐이었다.
나는 그런 백작의 태도를 카리나에게 곧이곧대로 전할 만큼 무감각한 사람은 아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으십니까? 설마 진짜 실란다 백작이 후회하기라도 했습니까?”
“그냥 별말을 하지 않았어. 법정에 서서 자신을 변호하겠다고 했으니.”
“하, 참으로 뻔뻔하군요. 자기가 뭘 변호할 게 있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 예상한 바대로 나와서 어이가 없군요.”
카리나의 금빛 눈동자가 분노로 형형하게 빛났다.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카리나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백작이 실제로 내비친 태도는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카리나에겐 목숨을 걸고 세상에 밝힌 사건이었으나, 백작에겐 그저 어서 해치워야 할 귀찮은 숙제였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태도는 그렇게도 다른 것이었다.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였다간 반격을 당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어머나, 제게 겁을 주시는 겁니까? 아니면 걱정해서 미리 경고해주시는 건가요?”
카리나의 입가에 힘없는 미소가 걸렸다. 평소 같으면 나를 놀리나 생각했겠지만, 장난을 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내게 묻는 듯했다.
“겁박도 걱정도 아니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
“그러신가요. 살짝 기대했건만 괜한 마음이었네요.”
카리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목숨을 잃을까 두렵지는 않습니다. 공작 부인을 만나러 온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니까요. 다만 복수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할까 그것이 두려운 것이지요.”
“복수를 하면 그 뒤엔 무엇을 할 것이냐.”
나도 모르게 불쑥 저런 질문을 하고 말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카리나는 내게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녀의 미래를 걱정해줄 만큼 나는 마음씨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궁금해졌다.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없어……?”
“예. 미래를 그리면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늘 정해진 미래가 기다리고 있던 내겐 이해하기 힘든 대답이었다.
리젠트라 공녀, 황태자비, 황후, 그리고 어쩌면 황태후까지. 내게는 늘 가장 높은 자리가 약속되어 있었고, 힘들여 애쓰지 않아도 다가올 미래가 있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등불에 의지하여 카리나와 어두운 황궁을 걷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쪽으로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법정에서 뵙지요.”
카리나가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오늘만큼은 그녀의 얼굴을 바로 보기 힘든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