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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42화 (42/160)

42화 : 노란눈이

노란눈이.

릴체 후작 부인은 멜라니 리젠트라와 그의 자손들을 이렇게 부르곤 했다.

멜라니 리젠트라는 파비엘의 생모이자, 두 번째 리젠트라 공작 부인이 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전 부인의 자식들을 제치고 제 아들을 공작으로 만들고자 가문을 분열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녀의 눈은 태양처럼 빛나는 황금빛이었으며, 그녀의 아들 역시 어머니와 똑같은 금색 눈동자를 가졌다고 했다.

릴체 후작 부인, 벨로나 리젠트라는 자신의 삶을 어그러뜨리고 제국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멜라니를 평생토록 증오했다.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황금빛 눈동자를 노란눈이라고 부르며 폄하했다.

전쟁 한참 뒤에 태어난 나는 할머니의 입을 통해서만 들었을 뿐, 노란눈이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리나가 나를 찾아온 날, 처음으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는 벨로나 리젠트라가 평생에 거쳐 증오한 마음이 단번에 이해갈 만큼 인상적이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노란눈이를 처음 보았던 건, 삼 년 전 실란다 백작 저였던 것이다.

루비아가 태어나고 백일 후, 실란다 백작은 리젠트라와 릴체 가문을 모두 초대하여 화려한 파티를 벌였다.

그날, 그 작은 아이와 처음 눈을 마주했을 때, 나는 아이의 눈이 무척이나 신비롭다고 생각했다.

「두 분의 부모님 중에 이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분이 계신가요?」

내 딴에는 칭찬의 의미로 건넨 질문이었다. 그 순간 백작 부인이 이상하리만큼 당황해 허둥거렸다. 백작은 웃으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라 그런 거지 커가면서는 부인의 갈색 눈을 닮을 거라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루비아를 빤히 바라보던 릴체 후작 부인이 뼈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멜라니와 그 자식을 무너뜨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온 벨로나 리젠트라는 이미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아기의 황금빛 눈동자를 향한 노부인의 얼굴엔 복수심에 불타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그때는 그저 괴팍한 성정의 할머니가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 줄로만 알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루비아에게서 멜라니 리젠트라의 눈을 본 것이었다.

‘파비엘 리젠트라의 가족들은 공식적으로 모두 처형당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어. 하지만 카리나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 할머니는 카리나를 죽이려고 들 거야.’

카리나 역시 그 점을 알기에 내게만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이다.

‘혹시 실란다 백작도 죽은 무희가 파비엘의 후손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백작은 무희의 동생인 카리나도 반역의 잔당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될 것이다.

여론은 살아남은 파비엘의 후손에게 집중할 테고, 백작은 이를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판을 뒤집을 것이다.

‘실란다 백작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이미 해는 지고 깊은 밤이 되었다.

“율리언, 날 실란다 백작한테 안내해 줘.”

* * *

실란다 백작을 다시 만난 곳은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감옥이었다.

‘과연 귀족들의 전용 감옥이라 이건가.’

감옥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밝고 깔끔한 구석이 있었다. 찝찝한 모순감을 느끼며 나는 안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간수가 안내한 곳에 다다르자 실란다 백작이 보였다. 그가 갇힌 독방은 푹신한 침대와 안락한 의자, 거기에 고급 의복이 채워진 옷장까지 있었다. 쇠창살만 없다면 평범한 방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실란다 백작.”

“아, 윈테라 공작 부인.”

실란다 백작이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창살 가까이에 다가왔다. 나는 간수들에게 물러가라 말한 후, 의자를 끌고 와 백작과 마주 보고 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부친의 명으로 공사를 담당했던 이 감옥에 제가 갇히다니요.”

실란다 백작이 작게 조소했다.

“그래도 신경 써서 지은 덕에 몸이 고생하진 않는군요. 웬만한 가정집보다 편한 곳입니다.”

“그래도 마음은 그렇지 않으실 테죠.”

“그건… 아무래도 그렇지요.”

실란다 백작의 표정과 목소리는 지나치리만큼 담담했다. 살인죄로 기소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반응에 나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만약 누명을 쓴 거라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일 터. 자신을 기소한 카리나와 블라딘 백작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길길이 날뛰어야 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정말 에스메랄다라는 무희를 독살한 것이 사실인지, 루비아가 백작 부인의 아이가 아닌 것인지, 그리고…….

‘에스메랄다와 카리나가 멜라니의 자손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하지만 어느 질문 하나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제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으신가 봅니다. 그러니 이리 아무 말도 못 하시는 거겠죠.”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실란다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먼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이 물었다.

“저를 기소한 카리나라는 여인. 황제의 차 시중 하녀를 공작 부인께서 궁에 받아주셨다면서요? 왜 그러셨습니까?”

순간 두근거리던 심장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손에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백작의 의중이 짐작 가지 않았다. 그저 내가 데려온 하녀 때문에 자기가 투옥되었다고 책망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내가 카리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나 시험해보는 것일까.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갈 곳 없는 젊은 여인이 불쌍하여 일자리를 내준 것입니다. 그 흔한 성도 없고 신분도 불분명하여 자기 힘으로는 황궁 하녀가 될 수 없기에 제가 거둔 것입니다.”

“정말 그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하녀를 들일 때만 해도 저도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습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백작에게 질문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안 그래도 이 방에 갇힌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얼마 후면 첫 재판이 열리는 날입니다. 백작이 빨리 판단을 내려야 우리 리젠트라와 릴체가 손을 써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공작 부인, 제가 뭐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시지요.”

백작이 가까이 오라며 내게 손짓했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떼 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백작이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 차 시중 하녀에게 전해주시지요. 이쯤에서 물러나면 나도 가만히 있어 줄 테니 이제 그만 하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온 세상에 네 비밀을 밝혀 너까지 죽게 할 거라고.”

‘역시 실란다 백작은 다 알고 있었어.’ 백작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는 두 자매의 신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정신이 멍해지고 몸이 얼어붙은 탓에 한참 동안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실란다 백작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넌 다 알고 있었어, 이슈텔! 그렇지? 그러니까 내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거지! 그 비밀이 뭐냐고 묻지도 않고,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 간다는 표정을 짓고 있잖아!”

내내 차분했던 그의 회색 눈동자가 미친 사람처럼 번뜩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감옥을 나올 듯 쇠창살을 잡아 흔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슈텔. 난 널 아주 어릴 때부터 봐왔어. 멍청한 네 친오빠보다 내가 너를 더 잘 알지. 넌 영리하지만 모질지 못해. 늘 이성적인 척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어도, 결국엔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지!”

백작의 광기 어린 눈빛에는 나를 책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슈텔, 너도 알고 있잖아! 릴체 후작 부인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한 그 노란눈이! 그 자매가 바로 노란눈이잖아!”

“실란다 백작! 진정하세요, 누가 듣기라도 하면!”

“그래, 나도 다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마치 네가 그 하녀를 처음 거뒀을 때처럼!”

“백작!”

“하지만 너와 나의 가장 큰 차이가 뭔 줄 알아, 이슈텔? 난 결국 그 노란눈이를 없앴고, 너는 그러지 못했다는 거야!”

“……당신이 사람을 죽인 게 사실이었군요.”

“아니, 난 반역의 잔당을 죽인 것이다.”

단언하듯 말하는 실란다 백작의 말엔 일말의 후회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 분노할 뿐, 그 외에 다른 감정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처음 플레코 광장에서 에스메랄다를 만나고 그 눈을 보았을 땐 무척 신기했지. 릴체 후작 부인이 말하던 황금빛 눈동자가 이런 거구나 싶기도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난 몰랐단다. 그녀의 몸에 너와 같은 리젠트라의 피가 흐르고 있는 줄은.”

“…….”

“떳떳한 관계가 아니니만큼 신분을 속이고 그녀를 만났지. 아마 내가 한미한 집안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잘 보이고 싶다며 아름답게 꾸미고 왔어. 정말 예뻤지. 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아직까지도 본 적이 없어. 그러다 내가 뭘 발견했는지 아니?”

실란다 백작이 창살 사이로 손가락을 뻗어 내 목 부근을 가리켰다.

“황금빛 장미 목걸이. 지금 네 목에 걸린 것과 같은 그 목걸이를.”

황금빛 눈동자와 장미 목걸이. 내가 카리나를 보며 확신했던 것을 실란다 백작 역시 삼 년 전에 깨달았던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내가 목걸이를 알아볼 거라 생각하지 못했겠지. 이슈텔, 그때 나는 너무 놀랐단다. 모두 죽은 줄로만 알았던 파비엘의 후손이 살아서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

“나는 무척이나 고민했어. 하지만 그간 나눈 정이 있으니 나 혼자만 입을 다물면 될 거라 판단하고 다신 그녀를 만나지 않았지. 하지만 말이야, 그 후로 더 큰 문제가 생겼어. 그녀가 내 아이를 갖게 됐거든.”

결국 카리나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루비아는 백작 부인의 아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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