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41화 (41/160)

41화 : 사건의 개요

루드비 실란다 백작이 살인죄로 기소당했다.

사건 조사는 수도 경비를 담당하는 일리드가 맡게 됐다. 원래대로라면 기사단장인 율리언이 맡았어야 할 사안이었다.

하지만 폐하께선 이번 사건을 율리언이 아닌 일리드에게 맡기셨다. 리젠트라, 릴체, 실란다 세 가문의 관계를 의식한 탓인 듯했다. 율리언이 평소 친분이 깊은 실란다 백작을 객관적으로 대하지 못하리라 여겼을 것이다.

“처음엔 무슨 괴소문인가 했는데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아.”

내 처소를 찾은 율리언이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백작 저는 지금 완전히 아수라장이야. 보통 귀족들은 곧바로 체포되는 법이 없지만 이번엔 특수 범죄 법안이 발휘돼서 곧장 수도 감옥으로 이송됐어.”

“자기 가문이 만든 법에 자기가 걸리다니…….”

리젠트라 가문 내전 당시, 귀족들은 나라가 어수선해진 틈을 타 평민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전후의 혼란 속에서 평민들을 폭행하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리젠트라와 릴체 가문은 곤두박질친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았고, 그중 하나가 실란다 백작가가 내놓은 ‘귀족 특수 범죄 법안’이었다.

귀족이 평민을 상대로 살인, 폭행 등의 중범죄를 저지르면, 증거 인멸을 막기 위해 그 즉시 수도 감옥으로 이송되는 것이다.

법안이 발휘되고 실질적인 효과를 얻게 되자 리젠트라와 릴체는 물론, 실란다 가문도 평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 부친이 만든 법안에 지금 실란다 백작이 걸리게 된 것이다.

“그래도 네가 백작 저에 가지 않은 건 잘한 거야. 그간 우리 세 가문이 지켜온 법안인데 우리 손으로 해칠 순 없잖아. 릴체 후작가도 표면적으론 어떤 성명도 내지 않기로 했어.”

“그래야지. 나까지 나섰다간 괜히 소문에 부채질만 하는 꼴이 될 테니까.”

이제 한 달 후면 현직 재상이 퇴임할 시기다. 아무리 에보니 블라딘이 치고 올라 온다 하더라도 그녀는 너무 젊었다. 게다가 오랜 기간 블라딘 가문이 힘을 잃었던 탓에 이렇다 할 정치적 기반도 없었다.

이변이 없는 한 차기 재상직은 루드비 실란다에게 돌아갈 수순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시기에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아무튼 난 루드비 실란다가 살인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이슈텔, 너와 난 그 사람을 잘 알고 있잖아. 사람을 함부로 해칠 인물이 아니야.”

“그렇지. 루드비 실란다가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데.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짓을 했을 리가…….”

자꾸 목이 타들어 가는 탓에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율리언 역시 걱정이 되는지 연신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잔을 비운 후 율리언에게 물었다.

“그래서 실란다 백작이 죽였다는 사람이 누구야?”

“플레코 광장의 무희. 삼 년 전에 죽은 여자야.”

“뭐? 무희?”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몇 달 전에 광장에서 본 카리나의 모습이었다. 붉은 석양 아래서 춤을 추던 그녀의 모습. 뒤이어 악단의 소매치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느 날부터 공연에도 나오지 않고 모습을 감추더니 얼마 후에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게 벌써 삼 년 전이네요. 사인은 아직까지도 모르고요.」

그 말이 떠오른 순간,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애써 불편한 감정을 누르며, 나는 다시 율리언에게 물었다.

“그래서 실란다 백작을 기소한 사람이 누구야?”

“카리나 린턴. 폐하의 차 시중을 드는 그 하녀.”

결국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들리고 말았다.

「언니는 귀족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냥 귀족도 아니고 이곳 수도에 사는 중앙 귀족에게요. 그래서 언니의 복수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내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어느 한 가문에 피바람이 불겠구나 예상했던 그날의 생각까지도.

‘하지만 실란다 백작이 왜 그런 짓을?’

실란다 백작은 카리나의 언니를 죽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카리나 자매는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던 자들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가난한 무희와 약제사인 평범한 자매. 명망 높은 백작가의 가주가 무희를 죽일 일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뭐지? 백작이 대체 왜 무희를 죽인 거래?”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가 나왔다. 율리언이 착잡한 듯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곧이어 그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꺼냈다.

“그 무희가 실란다 백작의 아이를 가졌대.”

“아이…라니? 백작과 죽은 무희가 연인 관계였단 말이야?”

“그랬던 모양이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그만 온몸의 힘이 탁하고 풀렸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만 갔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쳐 가는 와중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아이였다. 엄마가 죽었다면 지금 그 아이는 누가 기르고 있는 걸까.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대?”

“그게…….”

율리언은 이번에도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차마 그를 재촉할 수가 없었다. 율리언 역시 오랜 친구였던 백작의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율리언이 쓰디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가 루비아래. 삼 년 전에 백작 부인이 낳았다고 우리한테 소개해준 그 아이. 루비아가 죽은 무희가 낳은 아이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루비아는 오랜 기간 아이가 없던 백작 부부에게 내려온 축복과도 같은 아이였다. 아이의 부모인 백작 부부는 물론 리젠트라와 릴체 가문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아이기도 했다.

루비아는 내게도 무척 특별한 아이였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친조카처럼 예뻐했다. 아이 역시 나를 볼 때면 낯을 가리지 않고 잘 따르기에 더욱 마음이 가곤 했다.

그런 루비아가 백작 부인의 아이가 아니라니. 그 말은 곧 카리나의 조카라는 말이 아닌가.

‘황궁에 들어온 이유가 이거였어. 백작에게 복수하고 언니의 아이를 되찾기 위해서!’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내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까지 황궁에 들어와야 했던 이유. 황제의 마음을 얻고 그분의 힘을 빌려야만 복수할 수 있는 인물. 카리나의 칼날은 실란다 백작을 향해 있던 것이다.

“그래서 실란다 백작은 지금 어떤 상태야?”

“수도 감옥에 투옥되어 있어.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상태고.”

“카리나 리젠- 아니, 카리나 린턴이 제출한 증거물은?”

“시신 부검서.”

“그거 하나뿐이야?”

“응.”

“부검서 하나를 들고 백작가를 상대하겠다는 건가.”

무언가 이상했다. 카리나의 성격상 완벽한 계획도 없이 백작을 기소했을 리는 만무했다. 아무리 폐하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하더라도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시신 부검서에 따르면 사망자의 체내에서 희귀한 약물이 검출됐대.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지만, 출혈이 있는 사람이 복용했을 시, 피가 멎지 않는 부작용이 있는 약물.”

“카리나는 백작이 죽은 언니에게 그 약을 먹였다고 주장하는 거고?”

“맞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해. 설령 실란다 백작이 한 짓이 맞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거짓 증언으로 풀려날 수 있는 거고. 유일한 자식까지 걸린 일인데, 백작가가 가만히 있겠어?”

“그래서 에보니 블라딘이 신전에서 친자 검사를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어.”

“에보니 블라딘? 그 사람이 뭔데 이 일에 끼어들어?”

“에보니 블라딘이 카리나 린턴의 변호인 자격으로 법정에 참석하기로 했대.”

에보니와 카리나가? 너무나 낯선 조합에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다 요 근래, 에보니 블라딘이 카리나에게 흉터를 치료받고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카리나가 에보니 블라딘에게 접근했구나. 둘의 공통된 적이 실란다 백작이었으니까!’

나는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황궁에서 그런 짓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에보니 블라딘이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할 모양이야. 이미 폐하의 허가를 받아 신전에 친자 검사 의뢰를 넣었고, 증인들까지 찾아냈대.”

“증인이라면?”

“실란다 백작과 죽은 무희가 연인 관계였던 걸 본 광대들. 백작 저에서 무희를 본 하녀, 그리고 죽은 무희의 몸에서 나온 약물을 판 거래상.”

“백작 저의 하녀까지 증인이라고?”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귀족 저택에서 근무하는 하인들은 주인의 허물을 함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이미 삼 년 전에 죽은 이를 위해 제 주인에게 등을 돌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슈텔. 이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그리고 치밀하게 준비된 것 같아.”

율리언이 앞에 놓인 유리잔을 세게 그러쥐었다.

“네 처소로 오는 길에 우연히 서쪽 복도에서 차 시중 하녀와 마주쳤어. 백작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여야 하는 상황인데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날 보며 미소까지 짓더군.”

“미소를 지었다고……?”

“그래. 마치 기다려온 일이라는 듯이 웃고 있더라. 사실 난 그 하녀의 말을 믿지 않았어. 에보니 블라딘이 재상직을 차지하려고 하녀를 이용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 하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어.”

율리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음에 이어질 그의 말이 너무도 두려웠다.

나 역시 율리언과 같은 생각이었다. 이 모든 것은 블라딘 백작의 계략이며, 카리나와 그녀의 언니를 이용한 질 나쁜 정치적 견제일 거라고.

카리나의 언니를 죽인 귀족은 따로 있을 것이다. 실란다 백작은 오해를 받아 그녀의 표적이 된 거고, 복수에 눈먼 카리나를 꾀어낸 에보니 블라딘이 이런 심각한 상황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 끔찍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율리언의 말은, 그런 일말의 희망마저도 앗아가 버렸다.

“너도 알잖아, 이슈텔. 그 하녀의 눈. 루비아와 똑같은 황금빛 눈동자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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