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질투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느 느지막한 오후. 나와 함께 황궁 새장을 찾은 일리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한 달간 매일매일 산책이라니. 귀찮지 않으십니까? 저희도 그렇게 자주 만나지는 않았었는데.”
“그렇긴 한데 따라나서지 않았다간 헬리온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테니까요.”
손등에 날아와 앉은 흰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었다. 비둘기가 구구 소리를 내며 내 손에 작은 머리를 비볐다.
“그 녀석이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오덥니까?”
“예.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와서 늦게 헤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더라고요. 별의별 핑계를 다 대면서 말이죠. 정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나흘이나 남은 헬리온과의 산책을 생각하니 곤란한 마음이 앞섰다. 일리드가 나를 보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헬리온이 당신을 무척이나 좋아하나 봅니다.”
“일리드, 당신이 보기에도 그런가요?”
“네. 아마 저뿐만 아니라 황궁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 겁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하…….”
나는 의자 뒤로 고개를 젖힌 채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어린 시절처럼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야 호의적인 편이 훨씬 낫긴 하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 모르겠습니다.”
“헬리온의 마음이 부담스러우십니까?”
“부담스럽다기보단 어색합니다. 헤어져 있던 기간이 길다 하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라…….”
옆에 앉은 일리드가 큰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맞닿은 온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실 헬리온의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일리드, 당신을 질투해서 생긴 일종의 경쟁심일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고요.”
“당신을 내게 뺏기고 싶지 않아서 더욱 집착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 애가 제게 품은 마음이 정말 좋아하는 감정인지, 아니면 경쟁심과 질투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헬리온은 어릴 때부터 저랑 프리모스를 질투했거든요. 어떨 때는 저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프리모스를 질투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그 반대이기도 했죠.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합니다.”
“확실히 헬리온은 경쟁심도 호승심도 강한 아이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해요.”
일리드가 수려한 이마를 구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 헬리온이 눈에 띄게 저를 쌀쌀맞게 대한다 생각했건만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네요.”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아닙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요. 저희가 얽혀있는 복잡한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인걸요.”
그는 내 손에 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수도에 오게 될 때만 해도 우리 셋이 이런 식으로 엮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상 정략결혼이 아닙니까. 셋 중 한 명만 진심을 품게 되어도 신기할 판에, 모두에게 이런 연심이 생기다니.”
“그 말은 곧 당신도 저를 사랑한단 말씀이시네요?”
내가 일리드를 향해 장난스럽게 속눈썹을 깜빡였다.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마를 시작으로 그의 입술이 코를 타고 입술 위에 겹쳐졌다.
어떤 말보다도 더 확실한 대답이 되는 입맞춤이었다. 나는 그에게 화답하듯 살며시 눈을 감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뽀뽀! 뽀뽀! 이슈텔, 일리드 뽀뽀! 뽀뽀!”
달콤했던 순간은 메이의 오두방정으로 깨지고 말았다. 횃대에 앉아있던 칸이 눈치 좀 챙기라는 듯 발톱으로 새장을 잡고 흔들었지만 메이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 그랬다가는 오늘 간식 없을 줄 알아.”
내 점잖은 호통에 메이가 수다스러운 부리를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일리드가 나를 품에 안은 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볼 때마다 참으로 신기한 앵무새입니다. 어쩜 저리도 말을 잘하는지.”
“오랫동안 함께 지낸 녀석이지만, 어찌나 영리한지 저도 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아, 깜짝이야!”
갑자기 무릎 위로 튀어 오른 새카만 털 뭉치 때문에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너무 놀라 몸에 털까지 곤두선 내가 벌떡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냐옹.”
같이 놀란 검은 고양이가 사뿐히 땅 위로 내려오며 불쌍한 목소리로 울어댔다.
갑작스런 고양이의 등장에 새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작은 새들은 요란하게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횃대로 올라갔고 공작은 화려한 날개를 접고 짜증스런 울음소리를 냈다. 맹금류인 칸만이 고양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금방이라도 공격할 자세를 잡고 있었다.
“고양이군요. 잘 관리된 걸 보니 길고양이는 아닌 듯한데 주인이 누굴까요?”
일리드가 고양이를 안아 올리며 물었다. 고양이는 호박색 눈을 빛내며 내게로 오고 싶어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나는 녀석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하녀의 고양이입니다. 폐하의 차 시중 하녀요.”
“아아, 얼마 전 준남작 작위를 받은 그 하녀군요. 아니, 이제 하녀라고 하면 안 되겠네요. 린턴 준남작 말이죠.”
“예, 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일리드는 고양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매끈한 몸을 손바닥으로 쓸어주었다.
“이슈텔, 고양이를 싫어하나요?”
“아뇨.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여워하는 쪽에 가깝지요. 하지만 황후 폐하의 새장에서 만나는 고양이는 반갑지 않습니다. 칸에게는 아니지만, 작은 아이들에게는 호랑이나 다름없는 맹수니까요.”
“하긴, 그건 그렇네요. 그래도 지금은 제가 꽉 붙잡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한 번 만져보지 않겠습니까? 꽤나 귀여운 고양이네요. 이슈텔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일리드의 말대로 고양이의 시선은 온통 내게로 쏠려있었다. 이름이 샤샤라고 했던가. 스쳐 지나가듯 들어본 게 전부인데 왜 내가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양이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낮은 갸르릉 소리가 들리더니 샤샤가 먼저 내 손에 제 작은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괜히 정을 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냉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녀석은 꽤 귀여운 생명체였다. 황궁 생활에 제법 잘 적응했는지 살도 보기 좋게 올라와 있었다. 나는 녀석의 턱을 한 번 긁어준 뒤 새장 밖으로 쫓아냈다.
“자, 썩 나가렴. 여기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
새장 문을 닫자 샤샤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는 한참을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는 서서히 몸을 돌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멀어지는 고양이를 보던 일리드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저 고양이를 보니 갑자기 생각났는데, 요즘 차 시중 하녀가 블라딘 백작의 흉터를 치료해준다면서요?”
“저도 소문으로만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특별히 부탁하셨다고 하던데요?”
“하긴. 블라딘 백작은 폐하의 조카뻘되니 그러실 만도 하지요.”
에보니 블라딘은 황제의 조카이자 일리드의 친척이기도 했다. 혹시 그도 에보니 블라딘과 친분이 있을까 싶어 넌지시 질문했다.
“혹 당신도 블라딘 백작과 잘 아는 사이인가요?”
내 말에 일리드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아마 저보다는 헬리온이 더 친분이 있을 겁니다.”
“헬리온이요?”
“예. 에보니 블라딘은 막내인 탓에 다른 형제들에 비해 가문의 간섭을 많이 받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북부 대공령으로 건너가 이 년간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년씩이나요?”
“예. 아무래도 고모님께서 에보니를 마음에 들어 하셨던 모양입니다. 블라딘 가문은 황제 폐하와 저희 아버지, 그리고 고모님의 외가가 아닙니까. 고모님께도 조카 되는 사람이니 극진히 대접해주었던 모양입니다.”
“하긴 그랬겠군요.”
내가 기억하는 알렌시아 황녀는 성격이 호탕하고 사람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이였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에보니 블라딘이라면 그런 황녀의 호감을 사기에 더없이 적합해 보였다.
“그런데 말이 나와서 든 생각인데, 이제 곧 헬리온과 산책할 시간 아닙니까?”
일리드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오 분 후면 다섯 시입니다.”
“아, 내 정신 좀 봐!”
화들짝 놀란 내가 튀어 오르듯 의자에서 일어섰다. 헬리온은 오 분을 늦으면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십오 분을 더 걷자고 할 사람이었다. 나는 일리드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새장 문을 열었다.
“빨리요. 빨리 나와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엄청난 속도로 후원을 가로질렀다. 담벼락에 앉아있던 샤샤가 울음소리를 내며 아는 척했지만 쌩하니 지나갔다. 나를 잘 따라오던 일리드가 문득 이 상황이 황당한지 웃음소리를 냈다.
“달리기가 무척 빠르네요, 이슈텔.”
“서두르지 않으면 헬리온이 절 괴롭힐 테니까요. 안 그래도 요새 날도 좋으니까 산책 날짜를 늘리자고 하고 있거든요.”
“저런, 그런데 이를 어쩌죠?”
“왜 그러세요?”
“이미 들켜버린 것 같아서요.”
잘 달리던 일리드가 돌연 걸음을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그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내 몸도 저절로 멈추고 말았다.
“안녕, 헬리온.”
일리드가 옆을 돌아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고개를 돌린 곳엔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헬리온이 있었다.
“아, 헬리온. 늦지 않았지?”
과장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후, 일리드의 손을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일리드가 마치 보란 듯이 날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슈텔과 후원에 있는 새장에 다녀오는 길이야. 산책이라고 보면 되지. 너도 좋아하지, 산책?”
일리드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헬리온에게 말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헬리온의 푸른 눈동자가 나와 일리드의 손에 가닿았다.
“이슈텔의 이름을 부르네?”
“너만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하…….”
헬리온은 화를 삭이듯 깊은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도끼눈을 뜨고 내 손을 가로챌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슈텔, 지금 가야 할 곳이 있어.”
“어디를?”
“실란다 백작한테.”
“실란다 백작? 갑자기 백작한테 왜?”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헬리온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실란다 백작이 살인죄로 잡혀 들어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