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같은 기회를 줘
며칠 전, 카리나가 황제에게 준남작 작위를 하사 받았다.
새로운 준남작에게 하사된 성은 ‘린턴’이었다. 그 성은 대대로 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평민들에게 주어지는 성이었다.
카리나 린턴. 나름 이름과 잘 어울리는 성이었다. 나는 그녀가 오래오래 그 이름으로 살길 바랐다. 절대 나와 같은 성으로 불리는 일이 없게끔.
“정신 차려, 이슈텔! 정신 차려!”
귓가에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헬리온의 어깨에 앉은 앵무새 메이가 나를 향해 부리를 쩍 벌렸다.
“바보, 이슈텔! 바보!”
“이 녀석이 어디 주인 보고 바보래? 이리 와, 너 좀 혼나야겠어!”
따끔하게 한마디 하자 겁먹은 메이가 헬리온의 붉은 머리카락 뒤로 머리를 숨겼다. 헬리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앵무새를 쓰다듬어 주었다.
“귀엽네.”
오늘은 헬리온에게 재무 감사 보고를 받는 날이었다. 보고서만 전달받는 일이라면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대면을 해야 할 때면 상황이 조금 달랐다.
헬리온과 마주칠 때마다 그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풍등이 밤하늘을 가득 수놓았던 밤. 모든 순간이 기억에 남았지만, 그중 가장 또렷한 기억은 헬리온과의 입맞춤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지금도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메이를 데려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헬리온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피해 보고자 수다쟁이를 데려온 것이다. 다행히 헬리온은 영리한 메이에게 관심을 보였고, 메이도 헬리온을 좋아해 금세 친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니야. 아무것도.”
나는 헬리온의 눈을 피해 보고서로 시선을 옮겼다.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서류를 높게 들어 올렸다.
“아주 잘했네, 헬리온.”
잠시 후, 내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특별 징수세. 주로 귀족들이 납부해야 하는 과징금 제도네. 같은 물건이라도 보유하고 있는 재산에 따라 세금을 달리 한다……. 어떻게 생각하게 된 거야?”
“수도에는 화려한 고급 부티크들이 많더라고. 귀족들이 주로 가는 매장들을 다녀보면서 생각했어.”
헬리온이 자신의 팔에 걸려 있는 금팔찌를 가리켰다.
“북부 광산에서 채굴된 금은 대부분 수도에서 매입해 가. 뿐만 아니라 모피도 상당수 수도로 보내지지. 금이야 그렇다 쳐도 모피까지 귀족들이 대부분 구매하는 게 이상하더라고.”
“어째서? 모피도 값이 비싼 축에 속하는 물건이잖아?”
“아니, 비싼 건 극소수야. 북부에서 만드는 모피는 겨울을 나기 위해 입는 실용적인 물건이야. 검은 늑대 털을 제외하고는 평민들도 살 수 있을 만큼 비싸지도 않고.”
“…….”
“그런데도 수도에 사는 평민들 상당수는 모피 한 벌 없이 겨울을 난다고 하더라고. 이유를 들어보니 귀족들이 모피를 사들였다 겨울에 비싼 값으로 팔고 있더군. 그런데 이게 어느 한두 명이 사들이는 게 아니라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들이 너나 할 거 없이 하고 있는 일이었어.”
“흠, 그래서?”
“이들을 모두 처벌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뒤늦게 세금을 부과한다 해도 이미 모피는 전부 사라진 후니, 평민들이 살 물건이 없는 건 마찬가지고. 차라리 보유하고 있는 재산에 따라 특정 항목에 세금을 부과해 처음부터 매점을 막는 것이 낫지.”
헬리온이 내가 내려놓은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야. 실제로 북부 대공령에서도 몇 년 전부터 실시하고 있는 과세 제도기도 하고. 이 문서를 봐봐. 처음에는 반대가 극심했지만 한 번 자리를 잡으니 지금까지도 잘 유지되고 있어.”
헬리온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으나 나는 내심 크게 놀랐다. 북부에서 수도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헬리온이었다. 그런 그가 이 정도까지 수도의 재정을 명확히 파악하고 해결책까지 내놓을 줄은 몰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리한 아이일지도…….’
나는 메이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는 헬리온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 보고서는 이대로 황제 폐하께 전해드릴게. 폐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거야. 수고했어, 헬리온.”
“수고했어, 헬리온! 수고했어!”
메이의 너스레를 끝으로 나와 헬리온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헬리온이 그만 자리를 비켜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요지부동이었다.
“더 볼 일이 남았니, 헬리온?”
“가지 마, 헬리온! 가지 마!”
은근슬쩍 본심을 내비치자 메이가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화를 냈다. 메이가 내 머리 위에 살며시 내려앉더니 머리카락을 콕콕 쪼아댔다.
“네가 나가! 이슈텔, 네가 나가!”
“아하하!”
좀처럼 크게 웃는 법이 없던 헬리온이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메이가 나보다 헬리온을 더 좋아하는 건 괘씸하지만,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 준 건 고마웠다. 하지만 녀석이 입을 꾹 다물어버리자 분위기는 금세 다시 처지고 말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이슈텔?”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헬리온이었다.
“보고를 받는 날이라 그런 거야? 분위기가 너무 딱딱한데.”
“아, 아니야. 그런 거.”
“일리드 형한테 보고 받는 날에도 이래?”
그 말에 손에 쥐었던 물 잔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이대로 마셨다간 사레가 들릴 게 뻔했다.
헬리온의 창백한 푸른 눈이 집요하게 내 표정을 쫓았다. 결국 대답을 피할 수 없던 내가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부정했다.
‘아닌 게 아니지만…….’
실은 일리드와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보고서 확인은 십 분만에 마치고 그다음부터는 우리만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가벼운 와인 한잔을 곁들여 서로가 모르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황궁에서 들리는 가벼운 가십거리를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약속한 시간이 훌쩍 넘어 예정보다 늦게 헤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런 나와 일리드의 모습을 보며 폐하께선 쉬엄쉬엄하라며 걱정하시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와 그는 고개를 숙여 웃음을 참곤 했다.
“요새 일리드 형이랑은 어때?”
헬리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강물에 빠져서 감기에 걸린 날, 셋이 만났잖아. 그때 형이 널 퍽 위하는 것 같아서.”
“아니, 그건 위하는 게 아니라 걱정한 거지. 너도 참 별소리를.”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헬리온이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땐 내가 잘못한 것도 있고 형한테 혼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는데, 처소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까 무언가 이상하더라고.”
“이상하긴 뭐가?”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아, 둘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니야, 그런 거.”
“자꾸 아니라고 하는데, 그러면 접견 시간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너 요새 형이랑 자주 만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 말에 뜨끔해진 내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산책이니 새장 관리니 하는 자잘한 일정에도 일리드와 동행했던 게 떠올랐다.
그에 반해 헬리온은 이런 업무적인 자리가 아니면 만나지 않았으니, 그의 기분이 상할 만도 했다.
헬리온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우선 그를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윈테라, 공작 부인. 일리드 전하께서 하녀를 보내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헬리온이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릴 새도 없이 그는 문을 벌컥 열었다.
“헤, 헬리온 전하!”
깜짝 놀란 일리드의 하녀가 입을 떡하고 벌렸다.
“무슨 말을 전하러 온 거지?”
“아, 그, 그게. 일리드 전하께서……. 그…… 공작 부인께.”
“빨리 말하지 못하겠느냐!”
헬리온의 다그침에 결국 하녀가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헬리온 전하와의 독대가 끝나면 언제나처럼 같은 장소에서 산책을 하심이 어떠냐고…….”
“뭐? 언제나? 같은 장소?”
하녀가 문틈 새로 보이는 내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헬리온이 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이 심부름을 한 지가 얼마 정도 됐지?”
“아, 아마도 한 달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가서 일리드 대공께 전해라. 공작 부인은 오늘 나와 시간을 보낼 것이니 기다리지 마시라고. 그리고.”
그는 뒤를 돌아 나를 보더니 선언하듯 말을 이었다.
“앞으로 한 달간은 내가 공작 부인과 산책하겠다는 말도.”
“아니, 한 달은 무슨-!”
쾅-!
내 뒷말은 요란하게 닫힌 문소리에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다시 문을 열어 일리드의 하녀를 부르고자 했지만, 헬리온이 내 등을 떠밀어 도로 자리에 앉혔다.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헬리온이 팔걸이를 잡아 그 안에 나를 가두었다.
“산책 정도는 같이 해줄 수 있잖아, 이슈텔.”
“하루 이틀이야 되지. 그래도 어떻게 한 달씩이나 그래.”
“일리드랑은 했잖아.”
헬리온이 붉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랑도 해. 나한테도 같은 기회를 줘. 그러다 보면 내가 더 좋아질 수도 있잖아, 안 그래?”
“우선 이거부터 놓고 말해, 헬리온.”
나는 대답을 피하며 나를 가둔 그의 팔을 밀어냈다. 그러나 단단한 두 팔은 미동조차 없었다.
“아니, 안 돼. 좋다, 싫다 먼저 대답을 해. 그래야 놓아 줄 거야.”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헬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눈에 이리도 뜨거운 감정이 담길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래, 알았어. 같이 가자, 산책.”
그제야 헬리온이 의자를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굳어있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풀어지고 있었다.
“대신 딱 한 달이야. 알았지?”
“알았어.”
헬리온이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으며 대답했다.
“그럼 지금 당장 가자, 이슈텔.”
그가 내 손을 잡아 처소 밖으로 이끌었다.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얼굴을 한 채로.
「저는 그 애의 집착이 이슈텔, 당신을 향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초록이 가득한 정원을 걷는 동안 내 머릿속엔 일리드가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괜찮다고, 고작 한 달간의 산책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아도, 계속 그 말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