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위험한 동맹
“아, 블라딘 백작.”
나는 일부러 백작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에보니 블라딘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사과를 깎던 칼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본의 아니게 예의 없는 모습을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오랫동안 수도를 떠나있던 탓에 격식이니 예법이니 하는 것들과 거리가 좀 있답니다.”
“예, 충분히 그러실 수 있지요.”
“그런데 듣던 대로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천사보다 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작.”
귀족들끼리 흔히 오가는 인사치레였다. 이런 칭찬을 받을 땐 나 역시 ‘듣던 대로 멋지시네요.’, ‘소문이 아름다움을 따라가지 못하네요’ 같은 답인사를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해 들은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에보니 블라딘은 수도에 있는 황립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수도에 있는 귀족들 중 그녀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다.
에보니는 개차반으로 유명한 손위 형제들과 터울이 많이 나는 막내딸이었다. 형제들의 악명이 하도 높은 탓에 상대적으로 사교계에 덜 알려진 탓도 있었다.
“얼마 전에 부친으로부터 백작 위를 승계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번에도 백작이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주었다. 에보니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감사합니다, 하하. 막내딸이 가문을 이어받는다고 하니까 오라버니들과 언니들이 어찌나 길길이 날뛰던지, 휴. 공작 부인은 오누이 사이가 무척 좋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그만한 행운이 또 없지요.”
에보니가 능청스런 표정으로 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살짝 허리를 숙여 내 옆에 있는 에시를 보았다.
“아가, 네가 보고 있는 이 왼쪽 눈의 흉터도 그때 생긴 거란다. 아버지가 내게 작위를 물려준다고 하자, 화가 난 큰 오라버니가 그만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놨지. 정말 너무하지 않니?”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그만 실수를…….”
화들짝 놀란 에시가 내 뒤로 몸을 숨기며 다급히 시선을 숙였다. 아이 역시 나처럼 에보니의 흉터를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단다. 나도 거울을 볼 때마다 눈이 가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어찌 안 그러겠니?”
“그래도 정말 죄송합니다. 백작님.”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이야기해줄까? 내가 오라버니를 어떻게 했는지?”
에보니 블라딘의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다 못해 제법 즐겁게 들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손으로 검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검을 휘둘러 오라버니의 손목을 뎅강! 날려버렸다, 이거야! 그 피가 팍! 하고 요란하게 튀어서 저택 접견실이 온통 붉게 물들었지. 어찌나 높이 솟구치는지 천장 위의 샹들리에까지-”
“백작.”
듣다 못한 내가 결국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뒤에 선 에시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만하시지요.”
“아, 제가 그만 흥분하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미안하다, 아가.”
에보니가 손을 뻗어 에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참으로 귀족답지 않게 격의 없는 행동이었다.
‘이상한 사람이다.’
내 온몸의 감각 하나하나가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위험한 사람이라고.
무슨 이유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에보니 블라딘,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백작. 새로운 하녀에게 구경시켜줄 것이 많아서요.”
“어머, 공작 부인이 직접 하녀를요? 상냥하기도 하셔라. 부인의 그런 상냥함을 제게도 조금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수도를 떠난 지 꽤 돼서 사교 모임이나 귀족들의 행사에 대해 모르는 게 많습니다.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거 같은데 저도 종종 초대해주시지요.”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하지요.”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가자, 에시.”
나는 아이를 데리고 에보니의 곁을 지나갔다. 창가에서 불어온 찬바람에 에보니의 긴 검은 머리카락이 나부끼듯 흩날렸다. 불길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억누르며, 나는 그녀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아, 젠장. 어떡하지?”
에보니 블라딘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제 이마를 짚었다.
“저렇게 예쁘면 목을 치기 아깝잖아.”
* * *
비슷한 시각, 카리나는 자신의 처소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손님은 황제를 통해서 오는 사람이었다. 황제의 친척이라는데, 약초로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똑똑-
여러 가지 약초를 준비하던 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리나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블라딘 백작님. 오신다는 연락은 미리 받았습니다.”
카리나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처음 보는 여인을 맞이했다. 카리나의 황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에보니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오늘 눈 호강을 제대로 하네.”
“예……?”
“아니, 내가 자기를 만나러 오다가 우연히 윈테라 공작 부인을 만났거든?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놀랐는데 지금 자기도 되게 예뻐서 놀랐어.”
“하하, 과찬이십니다. 어찌 저를 그분께 비교하겠습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차부터 내오겠습니다.”
카리나가 작은 나무 의자로 에보니를 안내했다. 에보니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카리나가 건네는 차를 마셨다. 향긋한 차 내음을 먼저 맡고 혀끝으로 음미하는 모습이 꽤나 미식가인 듯했다.
“과연 차로 황제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하네. 내가 마셔본 차 중 손에 꼽히게 맛이 좋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자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카리나 리-. 그냥 카리나입니다.”
“아, 아직 성이 없구나. 그래도 곧 기사 작위를 받는다며. 이름 뒤에 성이 붙을 날이 머지않았네.”
“다 황제 폐하의 은혜입니다.”
“그럼 작위를 받게 되면 ‘레이디 카리나’라고 불러야 하나?”
“전 지금처럼 ‘자기’라고 불리는 쪽이 더 좋은데요?”
“그래? 그럼 앞으로도 그렇게 할까? 나도 그쪽이 더 편하고.”
“예, 좋습니다.”
두 여인이 크게 웃었다. 작은 처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자기 잔을 비운 카리나가 에보니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블라딘 백작님의 흉터를 치료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얼굴의 상처를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응, 물론이지.”
에보니가 갸름한 얼굴을 카리나에게 내밀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모자를 벗자 감은 눈 위로 길게 그어진 흉터가 적나라하게 보았다. 아직 붉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주 오래된 흉터는 아닌듯했다.
“죄송합니다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흉터를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상처가 꽤 깊거든요.”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최선을 다해줘, 자기.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황제 폐하께선 너무 안타까워하시더라고.”
“예. 최대한 상처의 붉은 기를 빼고 나면 화장으로 가려질 정도는 될 겁니다. 그래도 가까이에서 보면 티가 날 테지만요.”
“응응. 아무래도 상관없어. 노인네들이 불쌍하게 여길 정도만 안 되게 해줘.”
카리나가 에보니를 자신의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미리 짓이겨 놓은 검붉은 약초를 한 움큼 들고 그녀의 왼쪽 눈 위에 올렸다. 독한 약초라 쓰라릴 만도 한데 에보니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안 아프십니까, 백작님?”
“이거 아파야 하는 거야?”
“예. 보통은 고통스런 신음을 내지요.”
“아, 그래? 찔릴 때보다 아프지 않아서 그냥 참았는데. 다음부턴 자기를 위해서 예쁜 비명이라도 질러줄게.”
능청스런 에보니의 대답에 카리나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카리나가 고개를 숙여 에보니의 오른쪽 눈과 시선을 맞추었다.
“백작님은 무척이나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백작님은 아직 젊지만 가문을 이끌 만큼 유능하고 학식도 높다고 들었습니다. 백작님 같은 분이 재상이 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아유, 나는 머리 아픈 일은 딱 질색인데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게 건 기대가 너무 커서 문제야. 그래도 믿을 만한 자식이라곤 이 막내딸 하나밖에 없는데, 노력은 해 보려고.”
“실란다 백작께서도 차기 재상직을 노리고 계신다는데, 어떻게 준비는 잘 되어가십니까?”
“루드비 실란다. 그 인간 꽤나 청렴결백하던데? 학문도 깊고 가문도 좋고 경력도 좋고. 난 말이야 타고난 성격이 정정당당하지가 못해서 애초에 그 인간이랑 맞붙을 생각이 없었어. 그래서 쥐새끼처럼 놈의 뒷조사를 했거든? 근데 영 털리는 게 없네?”
“그러셨군요. 그것 참 안타깝네요.”
카리나가 침대 위에 팔을 기대며 에보니의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제가 실란다 백작을 망가뜨릴 단서를 가지고 있다면, 블라딘 백작님께선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역시 자기, 그냥 하녀는 아니네.”
벌떡 몸을 일으킨 에보니가 눈가에 올려두었던 약초를 떼어냈다. 검붉은 약초 물이 눈가의 흉터를 타고 흐르는 모습이 꽤나 섬뜩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백문이 불여일견이지요.”
의자에서 일어난 카리나가 침대 밑에서 두꺼운 서류 봉투를 꺼내 에보니에게 내밀었다.
“찬찬히 읽어보시지요.”
에보니가 서류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카리나의 눈이 그녀의 표정을 좇았다. 무심했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고 어두워지더니, 마지막 장을 넘길 때는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에보니가 카리나에게 서류를 넘기며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협상 타결이야, 아가씨. 앞으로 잘 부탁해.”
“감사합니다, 백작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카리나가 기꺼이 에보니의 손을 잡았다. 두 여인이 맞잡은 서로의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