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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36화 (36/160)

36화 : 감기

“어서 들어오시라 해.”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침대 머리맡에 둔 손거울을 꺼냈다. 눈가에 말라붙어있는 눈물을 정리하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강 묶었다.

곧 문이 열리고 일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대공? 콜록.”

일리드를 보자 아픈 와중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사람 눈엔 환자의 억지 미소 같아 보이겠지만 내겐 최선의 환대였다.

“네.”

그런데 일리드의 반응이 이상했다. 걱정 어린 눈빛과 다정한 안부의 말을 기대했건만, 그의 분위기는 어젯밤 강물보다 차갑고 밤바람보다 더 싸늘했다.

일리드가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내가 누운 침대에 다가왔다. 그는 옆에 앉은 헬리온을 흘겨보더니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망토가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나 봅니다?”

“예……?”

“아니면 키비르 강에 빠지기라도 한 겁니까?”

“……!”

순간 헬리온과 내 어깨가 동시에 움찔했다. 이게 뭔 말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헬리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헬리온도 나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끔뻑이는 그 눈빛에서 알아차렸다. 우리 둘 다 머리가 백지장 상태라는 걸.

“너 벽 잘 타더라?”

일리드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번엔 헬리온을 향했다.

“하마터면 암살자인 줄 알고 쏠 뻔했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내뺄 생각하지 마. 어제 다 봤으니까.”

말문이 막힌 헬리온이 멍하니 일리드를 쳐다보았다. 곧은 자세로 선 일리드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다시 나를 보았다.

“어제 풍등 축제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황궁 가장 높은 테라스로 갔습니다. 그런데 저편 성벽에서 뭐가 자꾸 얼쩡거리더군요. 자세히 보니 사람이지 뭡니까?”

“…….”

“암살자인 줄 알고 갖고 있던 총으로 쏠까 하다 머리카락을 보고 헬리온인 걸 알아챘죠. 저렇게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요.”

“…….”

“어딜 저렇게 몰래 가나하고 지켜보니 공작 부인의 처소로 가더군요. 그러더니 곧 두 사람이 함께 성벽을 내려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밤중에요.”

“…….”

“위험해 보여서 말리려다가, 그러면 헬리온이 놀라 공작 부인을 떨어뜨릴 것 같아서 그냥 냅두었습니다. 아주 신나 보이더군요, 둘 다.”

늘 온화하기만 했던 일리드의 푸른 눈동자가 지금은 얼음장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혼나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비수 같은 목소리가 뒤통수에 날아와 꽂혔다.

“어린애입니까? 그렇게 높은 곳에서 벽을 내려갈 생각을 해요? 황궁의 허가를 받으면 얼마든지 변복을 하고 나갈 수 있거늘. 헬리온이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면 공작 부인이라도 말리셨어야지 그걸 같이하고 계십니까?”

“이슈텔한테 뭐라고 하지 마. 싫다는데 내가 계속 같이 가자고 그런 거야.”

헬리온이 잔뜩 풀죽은 소리를 내며 사촌 형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조용히 해. 내가 왜 너한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줄 알아? 넌 말할 가치도 없어서야.”

일리드가 헬리온의 손을 탁하고 쳐냈다.

“몰래 사람을 데리고 나갔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던가. 너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고, 같이 나간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만들어?”

“…….”

“그때 황궁 수비대가 널 보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나처럼 네 머리카락을 보고 알아채서 사격을 중지했을 거 같아? 넌 그 자리에서 바로 사살이야. 너만 사살이면 다행이지 그러다 공작 부인까지 다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

“한심하긴.”

한 번도 이렇게까지 화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무서운지. 혼나는 헬리온을 도와주고 싶었으나 나도 겁이 나서 나서질 못했다.

가여운 헬리온은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 묵묵히 일리드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가. 그리고 다신 이런 일 만들지 마.”

내 방 처소인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퇴출 명령을 내리는 일리드였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마터면 나까지 나갈 뻔했다.

잔뜩 기죽은 헬리온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안한 마음에 그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시선이 여전히 바닥을 향한 탓에 보지 못한 듯했다.

헬리온이 떠난 의자에 일리드가 다가와 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어보더니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내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나셨습니까?”

“화난 게 아니라 속상해서 그렇습니다.”

일리드가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성벽을 다 내려왔을 때라도 말렸으면 괜찮았을 텐데.”

“아닙니다, 대공 말씀대로 저도 신났던걸요. 제 잘못도 큽니다.”

괜히 일리드와 헬리온의 사이가 나빠질까 봐 재빨리 덧붙였다. 그러나 일리드의 굳은 표정은 도무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헬리온은 재미있는 아이죠. 생긴 거와 다르게 아이같이 순진한 구석도 있고. 어디로 튈지 몰라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분명 그게 또 매력이기도 하고요.”

“…….”

“열정도 많고 의욕도 넘치지만 아직 어린 탓에 모든 면에서 서툴고 불안정한 것이 사실입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개인적인 부분에서도요.”

“…….”

“어제처럼 그런 악의 없는 장난으로 끝나면 좋지만, 사실 전 걱정이 됩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잠긴 목소리로 일리드에게 물었다.

“무엇이 걱정되어 헬리온을 그리도 호되게 혼내신 겁니까?”

일리드는 꽤 오랫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원래도 신중한 그였지만, 지금은 더욱 신중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고르고 있었다.

“황궁 출입이 금지되었던 지난 십여 년 동안, 저와 헬리온은 자주 교류하면서 지냈습니다. 이슈텔 당신은 헬리온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겠지만, 저는 당신이 보지 못한 그 후의 헬리온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한 헬리온.

그 말이 왠지 모르게 가슴 깊이 박히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일리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다시금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욕심이 많고 한 번 꽂힌 일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끝을 보는 아이입니다. 얼어붙은 북쪽 산맥 탐사도, 고모님께선 위험하니 철수하라고 명령하셨지만 헬리온이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추진한 일입니다.”

“…….”

“선발대를 꾸리고 투자자들을 모아 산맥을 계속 탐사하던 중 금광을 발견한 것이지요.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그 애는 자신의 직감을 믿은 겁니다. 헬리온의 집념이 긍정적으로 발휘되면 그런 성과를 이뤄낼 수 있지만, 좋지 않은 곳으로 발현되면 광기 어린 독재와 집착으로 변하죠.”

“…….”

“아직까지야 조금 전처럼 제가 한 번 혼을 내는 것에도 기가 죽긴 하지만, 좀 더 자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땐 누가 저 애를 통제할 수 있을지.”

일리드의 말을 듣는 순간, 사냥터에서 황제 폐하의 말이 날뛰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총을 든 헬리온은 폐하의 말뿐만 아니라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카리나도 죽일 기세였다.

내가 직접 나서서 헬리온을 말렸을 때, 날 내려다보던 그의 눈빛을 기억한다. 몹시도 냉혹하고 잔혹한 눈빛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제가 헬리온을 말리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리드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어 일부러 더 밝게 말하였다.

일리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저는 그 애의 집착이 이슈텔, 당신을 향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침대에 누운 나와 눈을 맞추었다.

“헬리온의 사촌으로서, 그리고 같은 남자로서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헬리온이 가장 원하고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당신이라는 걸.”

“그건 제가 예비 황태자비라서 보이는 관심일 겁니다.”

“글쎄요. 처음엔 저도 그런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리드가 침대 위로 손을 뻗더니 베개 끝에 있는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북부 사람들은 푸른 깃털을 가진 얼음독수리를 키우는 풍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독수리는 독립심이 매우 강해 사람을 잘 따르지 않죠. 북부 사람들이 그 독수리를 어떻게 길들이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길들이나요?”

“가장 강한 우두머리 한 마리만 남기고 무리의 다른 새들은 하나하나씩 죽입니다. 우두머리가 보는 앞에서요. 그렇게 홀로 남은 우두머리에겐 좋은 먹이도 주고 짝도 지어주는 등 무한한 애정을 쏟죠.”

“…….”

“그렇게 되면 우두머리는 점점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아무리 자기 무리를 학살한 자라도, 의지할 곳이라곤 그 사람밖에 없게 되니까요. 북부 사람들은 무언가를 길들일 때, 그런 방식을 쓴답니다.”

“헬리온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일리드의 말뜻을 알아차린 내가 재빨리 부정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지난 십여 년간의 헬리온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헬리온은 절대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아이가 아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일리드가 검은 속눈썹을 깜빡였다.

“다만 저는 만일 생길지도 모를 일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대공께서 절 도와주실 거죠?”

일리드가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이슈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에 놓인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다른 한 손을 뻗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더 불러주세요, 내 이름.”

“음, 그러면 당신도 내 이름도 불러줘야죠?”

“일리드 대공…….”

“뒤에 빼고.”

나지막이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았다.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작게 읊조렸다.

“일리드.”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의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그는 지난번보다 더 깊고, 황홀한 감각으로 나를 가득 채워주었다.

내 몸을 감싼 이 몽롱함이 감기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주는 열락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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