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34화 (34/160)

34화 : 풍등 축제

남부와 북부 가신들의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졌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중앙 귀족들의 찬반으로 진행되는 이 회의에 황당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럼 대공들의 중간보고는 제가 받는 것으로 결정하고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릴체 후작 부인의 명령과 실란다 백작의 기획, 그리고 리젠트라 공작의 연기로 이루어진 무대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고모할머니는 멀리서 온 대공들과 가신들에게 리젠트라 가문의 힘을 직접 확인시켜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제아무리 황족이라도 중앙에선 리젠트라 가문의 밑에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오늘 이 회의는 대공들과 가신들에게 큰 충격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도 이것이 언제까지고 효과적인 대응책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한 번쯤은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 * *

회의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왔을 땐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나는 가벼운 식사를 하고 평소보다 일찍 침대에 누웠다.

‘일리드와 헬리온의 심기가 불편했겠지.’

낮에 있었던 일을 곱씹어 보았다. 리젠트라 공작가의 힘을 눈앞에서 본 두 대공의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일리드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을 억지로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꾹 다문 입과 달리 날카로웠던 눈빛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반면 감정적으로 나올 거라 생각했던 헬리온은 의외로 침착했다. 조금 언짢은 듯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순순히 리젠트라가의 결정에 따랐다.

‘이상한 일이지. 두 사람 다 내 예상과 반대의 모습을 보이다니.’

두 대공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했지만 점점 밀려오는 졸음에 눈이 감기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꼭 덮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으음, 들어와.”

유모 몰리나 하녀장 애비게일이 온 건가 싶어 처소 문을 향해 소리쳤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 방문엔 조금의 틈도 벌어지지 않았다.

‘뭐지……?’

잠결에 헛것을 들었나 싶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쌩하니 불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활짝 열린 창문이 보였다.

하얀 유령처럼 흔들리고 있는 커튼, 창문 틈으로 넘어오는 은은한 달빛,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그림자.

“꺄악! 읍!”

비명 소리는 내 입을 덮친 커다란 손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쉿! 나야, 이슈텔!”

헬리온의 푸른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소리 지르지 마.”

고개를 끄덕이자 헬리온이 내 입에서 손을 떼었다.

“야, 너. 너 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들어오라며?”

“아니, 잘 있는 문 놔두고 왜 창문으로 들어와?”

“아, 그게…….”

내 방에 제멋대로 들어온 침입자는 처음 기세와 달리 꽤나 쭈뼛쭈뼛했다.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만 매만지더니 활짝 열린 창문을 가리켰다. 밤하늘 저 멀리서 터지는 불꽃놀이가 보였다.

“나랑 풍등 날리러 갈래?”

“풍등……?”

늦은 밤에 남의 방엘, 그것도 창문으로 몰래 들어와서 한다는 소리가 풍등을 날리러 가자고……?

“솔직히 말해봐.”

“뭘……?”

“너 오늘 회의 결과 맘에 안 들어서 나 암살하러 온 거지?”

“암살이라니, 무슨 그런 말을!”

헬리온이 절대 아니라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 강가에서 풍등 축제가 열리잖아! 사람들 몰래 같이 보러 가자 그러려고 온 거야.”

그의 말대로 매년 이맘때면 수도 세이더를 가로지르는 키비르 강에서 풍등 축제가 열렸다. 강가 곳곳에서 화려한 불꽃이 터지고, 각양각색의 풍등이 밤하늘을 별처럼 수놓는 날이었다.

강가에 놓인 작은 배를 타고 저마다의 소원이 적힌 풍등을 하늘로 띄우는 모습은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말인즉슨.

“너, 나 강에 빠뜨리려고 그러지?”

사람들 틈에 섞여 범죄를 저지르기에도 딱 좋은 날이란 의미였다.

“어쩐지 나한테 보고를 해야 한다는데도 너무 순순히 받아들이더라. 평소처럼 심술도 안 부리고.”

“아, 아니라고!”

헬리온이 억울한 목소리로 분통을 터트렸다.

“솔직히 황족으로서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네가 지난 삼 년간 해온 일이잖아. 익숙해질 때까지 네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그럼 익숙해지면 암살할 거고?”

“아, 암살 안 한다고!”

얼굴이 새빨개진 헬리온이 세게 고개를 저었다. 뒷말은 헬리온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덧붙여본 농담이었다. 내가 킥킥거리자 헬리온도 그제야 장난인 걸 깨닫고 입을 삐죽였다.

“가자, 이슈텔.”

헬리온이 활짝 열린 창문가로 다가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초승달이 뜬 밤이었다. 헬리온의 옅은 푸른색 눈동자가 달빛에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안 돼.”

그러나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 떨어지기라도 했다간 크게 다칠 거야.”

“아냐, 그럴 일 없어. 날 꽉 잡고만 있으면 돼. 내가 널 업고 벽을 내려갈 테니까.”

“싫어, 무섭단 말이야.”

“풍등 보고 싶지 않아?”

“보고야 싶지.”

하지만 정말 무서웠다. 날 업고 이렇게 높은 곳을 내려가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침대에 엉덩이를 붙인 채 단호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러자 헬리온이 창가에서 내려와 내게로 다가왔다.

“많이 변했네. 어릴 땐 밖에 몰래 나가고 싶다고 밧줄로 몸을 묶어가지고 창밖으로 뛰어내렸잖아?”

“그땐 내가 어리고 철이 없어서 그랬지. 봐봐, 너도 아직 철이 덜 들었으니까 이렇게 밤에 벽을 타고 내 방까지 몰래 오지. 좀 더 커봐. 이런 짓 절대 안 할걸.”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여기서 더 자라면 이런 짓을 안 할지도 모르지.”

“…….”

“그러니까 내가 더 자라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장난쳐보자, 응?”

헬리온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굳게 감긴 팔짱이 풀어지면서 몸이 그를 향해 빙그르 돌아갔다.

“가자, 응?”

헬리온이 어린 시절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목소리로 칭얼댔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기대에 가득 찬 눈길로 나를 보는 모습에 그만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서로 떨어져 지낸 시간 동안, 우리는 몸도 마음도 훌쩍 자라있었다. 몇 달 전 다시 만났을 땐 바보 같은 장난을 칠 나이도, 허무맹랑한 사고를 칠 시기도 모두 지나있었다.

나 역시 그립기는 했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고를 치던 그때의 밝고 순수했던 내 모습이.

나보다 조금 더 어린 헬리온에겐 아직 그런 모습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밤중에 성벽을 타고 내게 올 생각을 하지.

눈에 주고 있던 힘을 풀고 헬리온을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절대 나 떨어뜨리면 안 돼. 알았지?”

결국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리온이 씩 미소를 지으며 절대 그럴 일 없다고 자신했다.

그를 따라 창가 위로 올라갔다. 아찔한 그 높이에서, 나는 헬리온의 뒤에 선 채 두 팔을 벌려 그의 목과 어깨를 꼭 감싸 안았다.

“간다.”

헬리온이 성벽의 돌을 잡고 한 칸 한 칸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달을 올려다보자니 고개가 아프고, 아래를 내려다보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헬리온을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거의 다 왔어.”

헬리온이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 소리와, 헬리온의 신발이 벽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는 소리가 번갈아서 들렸다.

“됐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헬리온이 나를 안전한 땅 위에 내려놓았다.

“세상에, 우리가 저기서부터 내려온 거야?”

까마득한 높이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동시에 가슴 벅찬 두근거림도 함께 느껴졌다.

“거봐,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헬리온이 뿌듯한 표정으로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고 내 머리에 검은 망토를 씌워줬다. 그리곤 자신 역시 털 망토에 달려있는 모자로 얼굴을 깊숙이 가렸다.

“빨리 가자, 이러다 늦겠어.”

어느새 헬리온보다 더 신이 난 내가 그를 재촉했다.

우리는 어두운 숲속을 향해 달려갔다. 쉬지 않고 우는 개구리 소리가 걸음걸음마다 정겹게 따라왔다.

* * *

키비르 강은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사람들의 손에는 각양각색의 풍등이 들려있었다. 모두들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보며 곧 있을 풍등 행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 마침 저기 배가 하나 딱 남아있네.”

헬리온이 가리킨 곳에는 기다란 나무배가 놓여있었다.

얼마 전 로제가 그랬다. 풍등 축제 날 배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고.

그러니 누군가 축제 날 배를 구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함께 배에 탈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거라면서.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배가 남아있다고?

‘설마 미리 준비해 놓은 건가?’

사실 다분히 준비한 티가 팍팍 나는 상황이었다. 배 위에는 담요가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차와 간식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 운이 참 좋네. 그렇지?”

애써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헬리온의 표정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는 걸. 아는 척할까 하다 노력이 기특하여 그냥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사아- 사아-

헬리온이 강 가운데를 향해 노를 저었다. 우리처럼 배에 탄 사람들이 풍등에 소원을 적고 있었다. 나와 헬리온도 등을 하나씩 무릎에 올린 채 펜을 잡았다.

“음…….”

막상 풍등을 앞에 두니 무슨 소원을 적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헬리온 역시 펜을 손에 쥔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풍등을 날릴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소원을 만들어 내서 풍등 위에 적어 내려갔다.

“뭐라고 적었어?”

헬리온이 시험지를 훔쳐보는 학생처럼 힐끔거렸다.

“나중에 소원이 생길 때, 그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적었어. 일종의 소원 보관용 소원이랄까.”

아무 소원도 떠오르지 않는 지금에선 최선의 소원을 적은 것이었다. 그러자 헬리온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자신의 풍등에 글씨를 적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