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리젠트라의 힘
“안녕, 이슈텔! 안녕!”
시끄러운 수다쟁이 메이가 내게 목청껏 인사를 건넸다. 손에 모이를 담아 내밀자 녀석이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고마워 이슈텔! 사랑해 이슈텔!”
“하여튼 밥 주는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본다니까.”
내 어깨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메이가 작은 머리를 비비며 쉼 없이 사랑한다고 떠들어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칸이 횃대에서 날아와 근처 나뭇가지에 앉았다. 다정한 나와 메이의 모습에 질투가 났는지 칸은 부리를 딱딱거리며 열심히 울었다. 할 줄 아는 말이라곤 ‘구구’밖에 없지만 열정은 메이 못지않았다.
“바보 칸! 바보 칸!”
메이가 구구거리는 칸을 향해 놀리듯 소리쳤다. 칸이 메이를 노려보며 위협적으로 날갯짓을 했다. 겁먹은 메이가 재빨리 자기 새장으로 날아가더니 스스로 새장 문을 닫아버렸다.
“바보 칸! 바보 칸!”
안전이 확보되자 더 큰 목소리로 칸을 놀리는 메이였다. 약이 오른 칸이 메이의 새장으로 날아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새장 틀을 마구 흔들었다.
“그만 싸워, 이 녀석들아.”
조금 있으면 두 대공과 대신들을 만나야 할 시간이다. 머리 아픈 일을 하기 전에 기분 전환으로 새장에 왔건만, 어째 새들마저도 싸우는 것인지.
새장 중앙에 있는 긴 의자로 가서 몸을 뉘었다. 거대한 은빛 새장 아래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오늘 회의에선 일리드와 마주칠 수밖에 없겠네.’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자꾸만 뛰었다.
일리드의 처소에서 밤을 지새운 이후, 나는 의식적으로 그를 피해 다녔다. 그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은 일부러 돌아서 갔고,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황궁 도서관에도 발걸음을 끊었다.
황제 폐하와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도 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다 그가 내게 말을 걸면 딴 곳을 보며 횡설수설하기 일쑤였다.
한 번은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더듬은 나머지, 폐하께서 입에 경련이 온 게 아니냐고 심각하게 물어보신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 그 사람 생각나는 건…… 역시 내가 이상한 거겠지?’
그날 이후, 자꾸 입술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입술뿐 아니라 그의 손이 닿았던 몸 구석구석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이 마치 내게 한동안 심하게 앓아야 하는 열병을 옮긴 것만 같았다.
“어, 뭐야?”
순간 왼쪽 뺨에 따뜻하고도 까끌까끌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일을 떠올리다 이렇게 생생한 느낌까지 드는 건가? 이 정도면 중증이다 생각이 들 때 즈음, 이번엔 오른쪽 뺨이 뜨끈해졌다.
“냐옹!”
“아, 깜짝이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호박색 두 눈에 놀라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검은 고양이는 저가 더 놀라서는 쌩하니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관리인!”
내 부름에 새장 관리인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내가 의자 밑에 있는 검은 고양이를 가리켰다.
“이 고양이는 대체 뭔가?”
“아니, 저놈의 고양이가 또 새장엘 들어왔네?”
보아하니 관리인은 고양이와 초면이 아닌 듯했다.
“저 고양이는 황제전의 차 시중 하녀가 데려온 고양이입니다.”
“뭐? 카리나의 고양이?”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기분 나쁜 호박색 눈동자로 보아하니 그날 그녀의 낡은 집에서 본 고양이가 맞는 듯했다.
“예. 폐하께서 후원에서 길러도 된다고 허락해주셨답니다. 그런데 저것이 자꾸만 새장으로 들어오지 뭡니까? 고양이라 그런지 좁은 틈도 아주 잘 통과하고요.”
긴장이 풀렸는지 고양이가 다시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 발밑에 누워 배까지 내밀며 쓰다듬어 달라고 아양을 부렸다.
“칸이야 상관없지만 카나리아같이 작은 새들에겐 신경을 써주게. 괜히 저 고양이가 잡아먹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관리인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고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양이가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오늘 회의는 지금까지 내가 맡아온 황태자 업무를 두 대공에게 공식적으로 배분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따라서 중앙 귀족들은 물론 일리드와 헬리온, 그리고 남부와 북부의 가신들까지 모두 참석하게 되었다.
“에보니 블라딘도 참석하지요?”
항상 남들보다 십 분 먼저 도착해있는 실란다 백작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러나 백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블라딘 백작은 오늘도 황제 폐하와 독대를 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 볼 수 있나 하고 내심 기대를 했건만.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자주 폐하와 독대를 하는지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이윽고 중앙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몸이 좋지 않은 릴체 후작 부인의 대리인 자격으로 참석한 율리언. 외무 대신과 재무 대신. 남부와 북부 가신들을 이끌고 온 일리드와 헬리온.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두의 인사를 받으며, 나의 오빠 자르 리젠트라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해.”
자르를 향해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오빠가 걱정하지 말라며 눈을 찡긋했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선언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지난 삼 년간 내가 황태자의 대리인으로 수행한 업무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뉘었다. 황실 기사단 운영, 황궁 및 수도 경비, 타국과의 국제 교역 확보, 마지막으로 황궁 재무 감사 업무.
폐하와 나는 두 대공에게 어떻게 업무를 분배할지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심사숙고 끝에 기사단과 수도 경비는 일리드에게, 국제교역과 재무 감사 업무는 헬리온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일리드는 무역과 숫자를 다루는 데 강점이 있고, 헬리온은 군대와 규율을 다스리는 데 강점이 있었다. 서로에게 덜 익숙한 일을 배분함으로써 개인의 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폐하의 의도였다.
“앞으로 황실 기사단장 율리언 릴체 경이 일리드 대공을 도와드릴 겁니다.”
율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드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일리드 역시 율리언을 향해 짧게 묵례했다.
“외무 대신 마르텔 여자작과 재무 대신 케일런 남작은 헬리온 대공을 도와드릴 거고요.”
백발이 희끗희끗한 자작과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작이 일어나 헬리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헬리온 또한 정중한 자세로 두 대신에게 인사했다.
“자, 그럼 업무 분배는 끝난 것 같고. 이제 슬슬 보고 체계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회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갈 즈음, 자르가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의 업무는 배분하되 황제 폐하께 보고하기 전, 두 분 대공 전하 모두 윈테라 공작 부인의 승인을 먼저 거쳐야 한다는 의견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부와 북부의 가신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빠는 더 큰 목소리로 그들의 웅성거림을 단번에 일축했다.
“두 분 대공께선 모두 뛰어난 인재이시지만, 황태자 업무는 지난 삼 년간 윈테라 공작 부인께서 담당해 온 일입니다. 그러니 폐하께 결재를 올리기 전, 공작 부인의 승인을 받는 것이 대공들께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사료되는 바입니다.”
남부의 가신들이 모두 입을 틀어막은 채 안절부절못했다. 북부 가신들은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그나마 가장 밝은 성격의 아론 텔리아마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의 대리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나는 황가의 피를 물려받지 않았다. 또한 실질적인 황태자비라 하더라도, 아직 황실과의 혼인 관계가 없기에 신분 또한 대공들보다 낮았다.
그런 내게 두 대공이 결재를 올리고 허가를 받으라니. 일리드와 헬리온을 주군으로 모시는 가신들 입장에선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제국의 수도이며 황궁이다. 이곳의 권력자는 황제도 황가도 아닌 리젠트라 가문이다.
“테셀라 경, 떨떠름한 얼굴이신데 이의 있습니까?”
자르가 남부 가신 하나를 콕 집어서 시비를 걸었다. 젊은 테셀라 경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한 번 꼴깍 삼키더니 순진하게도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자 일리드가 손을 올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테셀라 경이 냉큼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남부는 이의 없는 거로 하고. 북부의 텔리아 경, 경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는…….”
텔리아 경이 자르의 집요한 시선을 받으며 말끝을 흐렸다.
“저는 헬리온 대공 전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아, 모르시나 본데 대공들의 의견은 투표에서 제외됩니다. 찬반은 중앙의 귀족들이 결정하거든요.”
답은 정해져 있는데 왜 물어보냐. 가늘게 치켜뜬 텔리아 경의 눈초리가 마치 그렇게 따지는 듯했다. 그러나 텔리아 경은 물론, 남부와 북부의 가신들 모두 자르에게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자르 리젠트라 공작의 유일한 장점은 외모와 연기력이었다. 동네 똥강아지 같은 성격과 달리, 오빠는 꽤나 냉소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얼굴은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를 꼭 빼닮은 덕분에,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대신들조차 오빠를 무서워했다.
황실 아카데미에서 연기 수업을 받아 암기력과 목소리 톤 또한 흠잡을 데 없이 좋았다.
학창 시절, 오빠가 전 과목에서 낙제를 거듭하자 할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학문 대신 연기 공부를 시키셨다. 가문에서 써주는 대본을 외우고 어전 회의에 나가 연기라도 잘 하라는 의도에서였다.
다행히 연기는 적성에 맞았던지 지금처럼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을 수가 있었다.
“그럼 의견이 나왔으니 다수결로 결정해볼까요?”
오빠가 판을 벌여준 덕분에 내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우리가 짜놓은 판대로 돌아가는 상황을 감상했다.
“리젠트라 공작가 가주, 자르 빌헬름 리젠트라 찬성합니다!”
“릴체 후작가 가주 대리, 율리언 레온하르트 릴체 찬성합니다.”
“실란다 백작가 가주, 루드비 엘리엇 실란다 찬성합니다.”
세 가문을 시작으로 중앙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