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32화 (32/160)

32화 : 그 밤 이후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커다란 베개를 집어 들었다. 단번에 일리드에게 달려가 베개로 그의 몸을 마구 때렸다.

“장난칠 게 있고 안 칠 게 따로 있지, 이런 걸 가지고 장난을 쳐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일리드는 연신 사과하며 내가 때리는 대로 맞고만 있었다. 몇 대 때리지도 않았건만, 터져버린 베개에서 나온 흰 깃털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맨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그래도 분이 가시지가 않았다.

“내 옷도 당신이 벗긴 거죠?”

“예?”

“당신이 아니면 내가 왜 이런 차림으로 있냐고요!”

“세상에, 절 뭘로 보시고!”

묵묵히 맞고만 있던 일리드가 처음으로 억울한 소리를 냈다. 그가 긴 소파에 있는 작은 베개와 얇은 담요를 가리켰다.

“저는 어젯밤 소파에서 잤습니다. 잠결에 들으니까 공작 부인께서 계속 ‘더워, 더워.’하고 중얼거리시던데, 그때 스스로 벗으신 거 같습니다.”

“……제가요?”

그러고 보니 술을 많이 마신 날이면 옷을 가볍게 입고 잠들곤 하는데, 하필 어제가 손에 꼽히게 독한 술을 먹은 날이었다.

“뒤돌아 계세요.”

“예?”

“옷 입을 거니까 뒤돌아 계시라고요.”

“아, 네네.”

일리드가 책상에 기대앉은 몸을 반대로 돌렸다. 아예 의심도 받기 싫은지 높게 쌓인 서류에 얼굴까지 파묻었다.

나는 침대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드레스와 속치마를 주워 들었다. 평소 입는 드레스보다 훨씬 간소한 네글리제였지만, 술이 덜 깬 상태로 입으려니 눈앞이 핑핑 돌아 죽을 맛이었다. 내가 한참을 낑낑거리자 다시금 일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예? 아뇨. 전혀요.”

매너가 좋은 건지 딴마음이 있는 건지 도무지 구별이 가지 않는 친절이었다. 나는 겨우 드레스를 걸쳐 입은 채 일리드 곁을 지나갔다.

“이제 고개 드셔도 돼요.”

내 허락에 그제야 일리드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직 물기가 남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베개에서 떨어진 하얀 깃털이 달라붙어 있었다.

끼이익-

긴 사다리를 들고 높은 책장 위로 올라갔다. 두께와 크기가 다양한 책들을 종류별로 섞어 대리석 바닥 위로 마구 떨어뜨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일리드가 떨어지는 책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물었다.

“우리는 밤새 무역과 상권에 대해 논한 것입니다.”

“예?”

사다리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마치 가정교사라도 된 것처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소리쳤다.

“우리는 어젯밤 테브론 제국의 무역과 상권에 대해 논한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아, 네…….”

“밤새 뭘 한 거라고요?”

“제국의 무역과 상권에 대해 논했습니다!”

일리드가 영리한 앵무새처럼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래요, 아주 좋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땅에 떨어진 책을 주워 품에 안았다.

“이건 알리바이를 위해 제가 빌려 가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지요.”

“그리고…….”

그의 처소 문을 나서기 전,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한참을 머뭇거리자 일리드가 궁금하단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어젯밤 일은…… 저희 둘 다 많이 취해있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다 잊어줄 수 있죠……?”

부끄럽지만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 같아 말을 꺼냈다. 그의 대답을 듣는 대로 처소를 나가려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일리드는 조용했다.

“음…… 그건 싫은데요.”

“싫다고요……?”

“네. 저는 그다지 안 취해있었거든요.”

“예……?”

“그럼 안녕히 가세요. 또 놀러 와요, 이슈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일리드가 나를 배웅해줬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얼굴이 빨개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럼 어제 일을 계속 기억하겠다는 거야?’

사람 신경 쓰이게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애타는 마음에 애꿎은 입술만 세게 깨물고 말았다.

‘쓸데없는 데 의미 부여하지 말자. 그냥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된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품 안 가득 안은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책이 너무 흥미로워서 시간 가는지를 몰랐다네. 역시 남부 하면 무역, 무역 하면 남부지. 자네들도 꼭 알아두게.”

처소로 돌아가는 길 곳곳마다 황궁 사용인들의 시선이 나를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일부러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낑낑거리자 하인 몇 명이 책을 들어주겠다고 다가왔다. 책을 건네는 와중에도 그 사람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주는 청초한 느낌과 흰 깃털이 내려앉아 있던 단단한 어깨. 의외로 능글맞은 구석이 있는 매혹적인 눈빛과 입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서로를 끌어안은 몸에서 느껴지던 체온, 뺨에 닿은 그의 손길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까지. 그의 몸이 닿았던 몸 구석구석이 아직까지도 이상하리만큼 뜨거웠다.

‘미친 거야. 내가 미친 게 틀림없어.’

얼굴이 다시금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마지막 하나 남은 책 한 권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언제 붙었는지 그 책 위에도 하얀 깃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 * *

“여러분 때문에 전 망했어요. 완전히 망했다고요. 이 일, 이거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예?”

황궁 서쪽 궁의 작은 방. 헬리온이 테이블에 빙 둘러앉은 여인들에게 한 맺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투렌 남작 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고, 로제와 슈리는 긴장한 얼굴로 테이블 아래 놓인 다리를 덜덜 떨었다.

반면 헬리온을 다시 만나 그저 행복한 몰리는 그를 다독여주며 자꾸만 잼이 든 쿠키를 내밀었다. 헬리온이 부루퉁한 얼굴을 한 채 안 먹겠다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요? 우유가 없어서 그러세요? 얼른 식당 가서 한 병 가져올까요?”

“애 취급 좀 그만해, 몰리.”

헬리온이 몰리를 찌릿하고 째려보았다. 그러나 몰리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운 듯 기특한 눈길로 헬리온을 바라보았다.

“야, 너.”

갑자기 헬리온의 지목을 받은 슈리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그리고 리세리 영애.”

슈리를 부를 때보단 훨씬 예의를 차려서 불렀건만, 로제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보시죠? 이슈텔과 할 만한 대화거리를 알려 달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렇게 분위기를 깽판 내는 이야기를 가져올 수가 있죠?”

“저라고 그렇게 될지 알았겠습니까?! 전 그냥 대공 전하의 부탁대로 요새 황궁에서 가장 뜨거운 가십거리를 알려드린 것뿐이라고요!”

로제가 눈썹을 팔자로 쭉 내리며 억울한 듯 징징거렸다.

“준비는 완벽했습니다. 그 하녀는 근래 황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란 말입니다! 게다가 공작 부인께서 그 하녀를 찾아오신 덕분에 폐하의 칭찬까지 듣지 않았습니까? 이만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대화 소재지요!”

“그래, 맞아. 너도 듣고 나서 흥미롭다고, 이 정도면 완벽하다고 좋아했잖아! 왜 우리 탓만 하고 그러냐?!”

슈리가 로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헬리온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저도 모르게 옆에 있던 쿠키에 손을 뻗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도 헬리온의 굳은 표정은 도무지 펴질 기미가 안 보였다.

“거봐. 아직 아기라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모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 있었던 제1차 이슈텔 최측근 모임에서 투렌 남작 부인은 헬리온의 문제점에 대해 상세히 읊어주었다.

무뚝뚝하고 냉철한 헬리온의 성격은, 다른 이들에겐 매력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슈텔에겐 아니었다.

황태자가 죽은 이후부터는 황태자비의 업무는 물론, 황태자가 해야 할 정치적 업무까지 담당해온 이슈텔이었다. 차가운 남자의 깊은 속마음까지 들여다볼 시간도 여유도 없는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투렌 남작 부인은 헬리온에게 좀 더 다정해지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헬리온은,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라고 되물으며 남작 부인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아, 보기와 다르게 여자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결국 투렌 남작 부인은 헬리온의 눈높이에 맞춰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세요.」

「흥미로운 대화 소재를 찾으세요.」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대화 중간중간에 질문을 해주세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세요.」

이론은 완벽했다. 실전에서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건진 모르겠다만.

“아무튼 이슈텔 최측근 모임은 해산입니다. 여러분들은 당최 도움이 되질 않아요!”

쿠키를 다 먹은 헬리온이 입가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동작 그만.”

얼음장처럼 차갑고 살벌한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개최는 대공 전하 마음대로 하셨어도 해산은 그렇겐 못 하십니다. 다시 자리에 앉으세요.”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투렌 남작 부인이었다.

“지금 전하께선 제 자존심을 건드리셨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며, 연애 상담 성공률 100퍼센트의 기록을 가진 제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요?”

남작 부인의 아름다운 초록빛 눈동자가 불타는 초원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헬리온은 물론 로제와 슈리, 그리고 몰리 마저 잔뜩 숨을 죽였다.

“제가 일리드 대공께 가면 어떻게 될까요?”

남작 부인이 반 협박조로 헬리온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남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신 분인데 제 코치까지 더해지면 참 좋겠지요? 그럼 헬리온 대공께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싫어요, 안 돼요!”

헬리온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일리드는 이미 이슈텔에게 점수를 많이 따놓은 상태였다. 여기서 더 이상 격차가 벌어졌다간…… 영원히 일리드를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럼 제가 뭘 어떡하면 될까요, 부인?”

헬리온이 간절한 눈빛과 목소리로 남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오늘만큼은 붉은 늑대가 아닌, 풀 죽은 대형견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남작 부인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얼마 후에 풍등 축제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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