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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30화 (30/160)

30화 : 오래된 이야기

총과 칼이 많았던 헬리온의 방과 달리, 일리드의 방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 같았다.

가운데 있는 커다란 체리색 책상과 침대를 중심으로 높은 벽면 전체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책장 곳곳엔 기다란 사다리가 있었고 사다리 층층에는 다양한 색의 향초가 놓여 있었다.

또한 천장에는 황궁 벽화만큼이나 커다란 지도가 붙어있었다. 테브론 제국의 도시 곳곳이 표시된 지도였다.

“재미없는 방이죠? 헬리온의 방에는 멋진 장식물도 많은데 제 방은 보시다시피 책이 전부라…….”

“아닙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멋진 방이 어디 있겠어요.”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빌리러 오십시오. 황궁 도서관보다야 못 하지만 무역에 관한 책이라면 볼 만한 게 꽤 된답니다.”

일리드가 창문 아래에 있는 기다란 소파로 나를 안내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와 일리드는 나란히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창가에 뜬 달과 별을 바라보았다.

“아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들고 온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먼저 말을 꺼냈다.

“뭘 말씀이십니까?”

“헬리온 대공의 말을 멈춰주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거요…… 아닙니다. 저도 처음엔 헬리온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지 않았습니까. 제가 먼저 알아채고 말을 돌렸어야 했는데.”

일리드가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직접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미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셨습니까?”

옆에 앉은 그를 향해 물었다.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 든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일리드가 긴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톡톡 건드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뇌리에 스치더라고요. 사냥터에서 공작 부인이 제게 들려주신 이야기가요. 부인께서 황궁에 들인 몰락 귀족, 그 사람을 폐하께서 곁에 두고 싶어 한다고 하셨죠.”

“…….”

“사실 헬리온이 말하기 전까진 몰랐습니다. 폐하께서 아끼시는 하녀가 황궁에서 모습을 감췄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그 하녀가 공작 부인이 소속을 바꿔준 하녀인지는 몰랐으니까요. 그 말을 들을 때부터 뭔가 조각이 하나씩 맞춰져 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제 반응이 대공의 추리에 확신을 심어주었겠죠.”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황궁과 권력의 중심에서 살아온 나였다. 어지간한 상황에선 감정도 표정도 모두 절제할 줄 알았지만 왜 그녀에 관해서는 이리도 어려운 걸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일리드가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대답한 후, 손에 감긴 하얀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바보 같지 않나요? 고작 하녀 하나 때문에 이렇게 상처나 입고.”

“그건 하녀 때문이 아니라 잔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그 하녀에게도 그렇긴 하지만, 사실 폐하에 관해서도 제가 냉정하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대었다. 일리드가 내 잔에 술을 조금 따라주었다. 나는 한참을 까만 밤하늘만 바라보며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자 일리드도 나를 따라 소파에 머리를 기대더니 조용히 하늘만 보았다. 어서 말을 해보라고 보채지도 않았다. 지루한 기색 하나 없이 기다려주는 그의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은 황제 폐하와 제가 처음부터 무척 가까운 사이였는 줄 알지만 실은 아닙니다. 저는 폐하를 무서워했고 폐하께선 제게 무관심하셨죠.”

무거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이제는 아는 이가 거의 없는,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쉽진 않았지만 일리드라면……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리젠트라 공작가의 내전 후, 나의 할아버지 빌헬름 리젠트라는 중앙 귀족과 평민회를 모두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황실과 황가의 외척인 블라딘 가문마저 굴복시키며 명실상부한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이제 남은 건 황실과 혼인을 맺어 그 힘을 더욱 견고히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리젠트라 가문에는 여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릴체 후작 부인, 벨로나 리젠트라마저 아들만 내리 셋을 낳고, 그 아들들 또한 죄다 아들만 낳았다.

그러던 중 태어난 아이가 바로 나였다. 그토록 고대하던 여자아이의 탄생에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크게 기뻐하셨다. 두 분은 내가 걸음마를 채 떼기도 전에 황태자 프리모스와 약혼을 시키려 했다.

하지만 헤브론 황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차일피일 혼담을 미뤘다.

내전 후, 황권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도움이 되어야 할 외가는 풍비박산 난 상태였다. 황실의 편에 서야 할 중앙 귀족들과 평민회 역시 리젠트라 공작가를 따르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뿐인 며느리마저 우리 가문의 사람으로 들이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황태자가 점차 자라면서부터는 더 이상 혼담을 미룰 수 없었다. 황제는 다른 귀족가의 여식들을 황태자비 후보로 알아보려 했으나, 리젠트라 공작가를 두려워한 귀족들은 감히 황가에 혼담을 넣지 못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황실과 왕래하며 황후 폐하께 황태자비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황후 폐하께선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저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어요. 정말 친딸처럼 아껴주셨지요.”

파비엘 리젠트라를 돕다 몰락한 블라딘 가문과 달리,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친정은 완벽한 중립을 지켜 우리 가문과 척을 지지 않았다. 황후 개인적으로도 황태자 이후에는 자식을 보지 못해 특히 나를 더 귀여워했다.

“황후 폐하와 달리 황제 폐하께선 저를 탐탁잖아 하셨습니다. 제게 눈길도 주지 않으시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말도 걸지 않으셨지요.”

“정말 폐하께서 그러셨습니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 폐하와 공작 부인의 사이를 보면 피 섞인 조카인 저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지는데요…….”

일리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수려한 눈썹을 찡그렸다.

“못 믿으시겠지만 그땐 정말 그러셨답니다.”

나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잔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제가 예법에 맞지 않는 실수를 하거나, 황궁을 진흙밭으로 만들었을 때도 한 번도 혼내지 않으셨죠. 같이 장난을 친 프리모스와 헬리온은 엄하게 혼내시고선 그 옆에 서 있는 제겐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냉정한 눈길로 쳐다보시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셨죠.”

“…….”

“처음엔 좋았습니다. 저만 혼나지 않으니까 신이 나기도 했고요. 그러다 조금 더 철이 든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혼을 내는 것도 애정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요.”

“…….”

“화를 내는 거나 혼을 내는 것만큼 무서운 게 무관심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턴 황제 폐하가 무서워서 몰래 피해 다니곤 했지요.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할 때도 프리모스나 헬리온과 꼭 같이 다녔고요.”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일리드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기댄 몸을 완전히 내 쪽으로 돌리며 질문했다.

“그럼 황제 폐하와는 언제부터 관계가 나아진 겁니까?”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신 이후부터 조금씩 개선되었고 황태자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부터는 서로를 의지하며 지금과 같은 관계가 되었습니다.”

“…….”

“그래서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선 돌아가실 때까지 지금처럼 친밀한 저와 폐하의 모습은 보지 못하셨죠.”

“…….”

“그게 너무나도 마음에 걸립니다. 두 분이서 지금 같은 모습을 보셨다면 무척이나 좋아하셨을 테니까요. 특히 황후 폐하께서 몹시 좋아하셨을 텐데…….”

잠시 목이 메어 말을 멈추었다. 이제는 괜찮아졌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황후 폐하를 떠올릴 때면 이렇게 감정이 복받치곤 했다. 지금 몸에 돌고 있는 술기운과 밤하늘이 주는 공허함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가 돌아가신 후부터 황궁엔 저와 황제 폐하만 남게 되었죠. 그때부터 폐하께서 저를 챙겨주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황태자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황태자가 하던 업무를 제가 맡게 되면서 폐하와 대면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났고요.”

“…….”

“그 후로 황제 폐하께서 저를 인정해주기 시작하셨고 완전히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덕분에 황궁 생활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 있었지요.”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두 분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일리드가 술이 든 잔을 살짝 흔들자 포도주가 작은 회오리를 일으켰다. 나도 그를 따라 잔을 흔들었다. 잔잔했던 내 잔에도 붉은 회오리가 일었다.

“이런 말은 정말 쓰기 싫었는데…… 제가 질투 같은 걸 하나 봅니다. 저는 폐하의 신임을 얻는 데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는데, 그 애는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폐하의 마음을 얻었다는 게요…….”

‘질투’라는 건 내게 있어 무척이나 낯선 감정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 역시 여러모로 부족한 손자 자르보다는 나를 더 예뻐해 주셨다.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남은 기억은 별로 없지만, 부모님도 막내인 내게 신경을 더 많이 써주시곤 했다. 게다가 착한 오빠는 나를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칭찬해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런 집안에서 나고 자란 내게 질투란 감정은 몹시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 애는 약초학에 재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 거기에 낭독까지 소질이 있더군요.”

“…….”

“폐하께선 오직 그 애만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애에겐 제게 없는 생명력과 힘이 있더군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리드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작 부인께선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될 만큼 충분히 멋진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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