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세 사람의 방(2)
“아, 그 소문이라면 나도 들었어. 폐하께서 무척 아끼시는 하녀라며?”
“그렇다고 하던데. 그 하녀가 사라진 일 때문에 폐하께서 무척이나 진노하셨다고 들었어.”
“황제전이 쑥대밭이 되고 관련된 하녀들도 다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던데……. 대체 뭐 하는 하녀길래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하신 걸까…….”
“기사단을 시켜 찾게 했으니 말 다 했지, 뭐.”
서걱- 서걱-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않고 생선만 자르고 있었다. 술을 따라주던 하녀가 정신 차리라는 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빈 접시에 대고 칼질을 하고 있었단 걸.
“그런데 진짜 재미있는 게 뭔 줄 알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건지. 평소와 달리 헬리온은 직접 나서서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 하녀, 내가 지하 감옥에 가뒀던 아이야. 폐하와 우리가 사냥에 간 날, 날뛰던 말을 진정시킨 그 하녀.”
“어? 약초를 들고 있던 그 마구간 하녀?”
일리드의 파란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헬리온은 사촌 형의 반응에 흥이 올랐는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마구간 하녀가 황제전으로 소속을 옮겼대.”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안 들려.’ 마음 같아선 헬리온의 말을 싹둑 잘라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그랬다가는…… 앞으로 헬리온이 식사 시간마다 완전히 입을 닫게 될 수도 있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저 이 불편한 대화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슈텔.”
결국 이름이 불리고야 말았다.
‘올 것이 왔구나.’
생선이 토막 난 접시에서 고개를 들었다. 헬리온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넌 뭔가 아는 게 있지?”
“응? 뭘?”
취기가 올라와서 그런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커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다시 가다듬었다.
“내가 알긴 뭘 알아? 난 아무것도 몰라.”
“그 하녀, 네가 마구간에서 황제전으로 소속을 옮겨 준 거라며.”
헬리온이 내 쪽으로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왜 그러긴 왜 그래. 마구간보다 차 시중이 더 적성에 맞아 보여서 그랬지.”
애써 가다듬은 목소리가 다시금 커지고 말았다. 나는 잔에 든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랫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본인과 더 맞는 업무에 배정시켜주는 것도 윗사람의 의무야. 내가 아주 의무 수행을 잘한 거지. 그렇게 좋은 하녀를 황제전에 배치한 걸 보면.”
이 말이 반어적이면서 자조적이라는 건 오직 나만이 알겠지. 고작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현실에 또 열이 받아 방금 채워진 잔을 단번에 비웠다.
일리드의 시선이 자꾸만 비워지는 유리잔을 향했다. 그는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걸 말려, 말아?’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 헬리온은 계속해 ‘그 하녀’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튼 요새 우리 북부 가신들도 그 하녀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없어. 어지간한 소문엔 무관심한 사람들인데 이번엔 아니네.”
“-잔이 비었다.”
“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만약 너였다면 난 그 하녀의 소속을 황제전으로 바꾸지 않았을 거야.”
“-잔이 또 비었다.”
“난 아직도 그 하녀가 사냥터에서 튀어나온 게 이상하단 말이야. 그렇게 제멋대로인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언젠가 한 번은 꼭 문제를 일으키지.”
“-그냥 내가 따라 마실 테니 병을 놓고 가라.”
“지금 일만 봐도 그렇잖아. 황궁에 적을 올린 하녀가 아무런 보고도 없이 황궁을 나가? 미치지 않고서야.”
“-병도 비었다.”
“황궁 사용인들에 대한 처벌권이 너한테 있잖아, 이슈텔. 대체 왜 그 하녀한테 벌을 내리지 않는 거야? 벌은 내리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슨 연유 때문에 황궁을 나간 건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아?”
“아, 오늘 요리가 아주 맛있네!”
갑자기 한껏 목청을 높인 일리드가 헬리온의 독백을 막아섰다.
“이 생선구이와 비슷한 남부 요리가 있습니다. 다음번에는 제가 남부식으로 식사 준비를 해보겠습니다.”
일리드가 나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재빨리 헬리온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헬리온, 그다음엔 네가 북부식으로 준비해봐. 폐하께서도 새로운 음식을 드시면 무척 기분 좋아하실 거야.”
“형, 지금 음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헬리온이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하냔 투로 빈정거렸다.
“이슈텔, 대답해봐. 폐하께서 그 하녀에게 벌을 내리지 말라고 하신 거야? 그래서 그러는 거야?”
“헬리온!”
결국 보다 못한 일리드가 정색을 하고 말았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식사 자리인데 즐거운 이야기 좀 하면 안 돼?”
“이게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면 뭐야? 나 황궁에 와서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보는데?”
갑자기 한 소리를 들은 헬리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제멋대로 황궁을 드나드는데 처벌은커녕 폐하의 총애를 받는 하녀라……. 흥미롭지 않아? 주변을 좀 봐. 황궁 사람들 모두 다 그 얘기를 하느라 정신없단 말이야.”
“아니, 내 말은 그런 말도 분위기를 좀 봐가면서-”
“그러니까 분위기 봐서 폐하께서 안 계실 때 얘기하고 있는 거잖아? 게다가 폐하께서 그 하녀를 무슨 거의 딸처럼 여기신다는 말까지-”
쨍그랑-!
순간 조금씩 높아지던 두 대공의 목소리가 단번에 조용해졌다.
“아…….”
손끝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느낌 때문에 깨달았다.
‘내 유리잔이 깨졌구나.’
붉은 피가 하얀색 식탁보 위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상처가 났나 보다.
“이슈텔!”
“공작 부인!”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괘, 괜찮습니다.”
나도 모르게 황급히 식탁 아래로 손을 숨겼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식탁 위에 살짝 내려놓았을 뿐인데 술기운에 힘 조절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피가 이렇게 나는데!”
헬리온이 식탁보 아래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을 피해 피 나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별거 아니야. 호들갑 떨지 마.”
“어디 봐봐.”
“정말 괜찮다니까.”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내가 보고 판단해!”
헬리온은 계속해 나를 잡으려 했다. 내 등 뒤로 손을 뻗더니 상처 난 손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헬리온의 뜨거운 손이 유리에 베인 상처에 닿았다. 쓰라리게 아팠다.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만큼.
“괜찮다니까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잔이 깨질 때보다 더 날카로운 소리가 만찬실을 뒤흔들었다. 그것이 내 목소리라는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몇 초 후였다.
“…….”
헬리온이 말없이 내 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입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두 눈동자는 갈 곳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화를 낼 때마다 겁을 먹던 그 얼굴이었다.
“미안해.”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이성이 돌아왔다.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웅얼거렸다.
“아파서…… 너무 아팠는데…… 손이 닿으니까 더 아파서…….”
내 손에서 흐르는 피가 계속해서 식탁보 위를 적시고 있었다. 나와 헬리온이 멍하니 앉아만 있자 결국 일리드가 나섰다.
“하녀장, 하녀장!”
일리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비게일을 찾았다. 곧 만찬실 밖에 있던 애비게일이 들어와 나를 데리고 치료실로 향했다.
“…….”
두 대공이 남아있는 만찬실엔 깊은 침묵만이 흘렀다. 일리드는 식탁보 위에 번진 피를 보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후, 그는 헬리온을 남겨 둔 채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헬리온이 자신의 손에 묻은 이슈텔의 피를 내려다보았다. 점점 말라가는 검붉은 피가 너무도 차갑게 느껴졌다.
* * *
“우리 아가씨 고운 손에 상처가 나다니, 이를 어쩜 좋아!”
몰리가 내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는 우는 소리를 냈다. 흉 질 상처는 아니라고 안심을 시켜도 유모는 자꾸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참, 일리드 대공하고 헬리온은 어떻게 됐어? 식사는 마무리하고 돌아갔대?”
“마무리는 무슨 마무리예요. 두 분 다 아가씨가 나가고 나서 얼마 안 있다 처소로 돌아가셨대요.”
유모가 말도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일리드 대공께서 엄청 놀라셨다 하더라고요. 만찬실 소속 하녀들이 그러는데 아가씨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움직이질 못하셨대요.”
“그 사람이? 아니, 왜-”
아, 피! 그래, 일리드가 피를 무서워한다 그랬지.
그러고 보니 상처에서 흐른 피의 양이 결코 적지 않았다. 거기다 하얀 식탁보 위에 떨어져 내렸으니 붉은 자국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를 어쩐다.’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냥터의 오리도 마음을 먹어야 쏠 수 있는 사람인데, 사람의 피를 봤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어디 가세요, 아가씨?”
“일리드 대공한테 가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자 몰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럼 헬리온 전하는요?”
“어?”
“헬리온 전하도 챙기셔야죠!”
유모의 말에 그제야 헬리온이 생각났다.
‘그래, 그에게도 가서 괜찮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그러나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오늘은 괜찮다는 말을 하기보단, 누군가의 품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었다.
“몰리가 나 대신 헬리온한테 가서 괜찮다고 전해줘. 그리고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고도 말해주고.”
“소리를 지르셨어요?”
유모의 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아기 황손님 많이 놀라셨겠네.”
“아무튼 유모 잘하고 와!”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모를 뒤로한 채 처소를 빠져나왔다.
* * *
“어, 윈테라 공작 부인?”
처소 문을 열던 일리드가 나를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네. 아까 식사 시간에 너무 경황도 없이 헤어진 것 같아서요.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요?”
일리드를 향해 들고 온 와인 한 병을 흔들어 보였다.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건 아니지요?”
“그럴 리가요. 공작 부인이라면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일리드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들인 후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