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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28화 (28/160)

28화 : 세 사람의 방(1)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해가 뜨는 것까지 보고야 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만 있는데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을 감으면 어지럼증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사냥터에 가서 사격이라도 할까 하다 그마저도 포기했다. 괜히 지난번처럼 일리드와 헬리온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율리언이 카리나를 데리고 오고 있겠군.’

“아가씨, 왜 또 이렇게 아무것도 안 드세요? 속상하게!”

수저를 든 채 멍하니 있자 곁에 있던 몰리가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그냥 입맛이 좀 없네. 청포도 없어?”

청포도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유모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게 무슨 밥이 되냐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평소 같으면 과일이 뭐가 어떠냐고 말대꾸를 했을 법도 한데, 그럴 기분조차 아니었다.

나는 억지로 수저를 들어 음식을 입에 넣었다.

“공작 부인, 기사단장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애비게일의 알림에 잘됐다 싶어 재빨리 상을 치우라 했다. 몰리가 불만스런 얼굴로 툴툴거리며 자리를 비켜줬다.

“방금 플레코 광장에 다녀오는 길이야. 그 하녀는 황제전에 데려다줬고.”

방에 들어온 율리언이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코앞에 있었는데 여태껏 찾지 못한 거냐고 날 질책하셨어. 그랬더니 그 하녀가 자기가 몸을 숨긴 탓이라며 오히려 날 감싸주더군.”

“나 때문에 곤란하게 됐네.”

율리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부탁으로 광장을 수색하지 않은 건데 그 때문에 폐하의 꾸중을 들었다니.

그러면서 동시에 반발심이 들었다. 그깟 게 뭐라고 율리언을 질책하시다니…….

“아니, 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네 부탁을 따른 건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율리언이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네가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율리언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리자 율리언이 제법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그 하녀를 무척이나 아끼시는 게 맞나봐. 하녀를 보자마자 몹시 기뻐하시며 눈물까지 보이셨어.”

“우셨다고……? 폐하께서……?”

율리언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을 전하는데 과장이 없고 최대한 감정적인 부분은 배제하면서 말하는 이였다. 그런 율리언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폐하와 카리나의 재회가 얼마나 감동적이었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너 괜찮아?”

“응?”

“이슈텔, 너 괜찮은 거냐고.”

뚫어지라 나를 보고 있는 초록색 눈동자에 짙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티를 내지 않겠다고 했건만, 내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았나 보다.

“괜찮아. 고마워 율리언.”

괜찮아야지. 이제 와서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어.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래서 더욱 괜찮지 않아 보였겠지만.

율리언도 더 이상 카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릴체 후작 부인께서 나를 보고 싶어 하시니 시간 날 때 후작 저에 한 번 들리라 말한 후 처소를 떠났다.

-공작 부인.

율리언이 떠나고 얼마 후, 애비게일이 다시 내 방문을 두드렸다.

“황제 폐하께서 찾아 계십니다.”

* * *

‘차분하게…… 여유롭게…… 그리고 부드럽게……’

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황제전으로 향했다.

“공작 부인, 오셨습니까.”

황제전의 금빛 문 앞에 도착하자 소피가 나를 반겼다. 핼쑥해진 얼굴에 마른 입술, 덜덜 떨리는 어깨가 몹시도 안쓰러워 보였다. 카리나가 돌아온 탓에 마음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고하여 주게.”

그렇게 말하곤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게 할 테니.”

소피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폐하,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들라하라.

문 너머로 들리는 폐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밝았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황제전으로 들어섰다.

채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저 너머에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가 의자에 앉은 폐하의 뒤에 선 채 그분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카리나가 폐하를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건 들었지만, 정작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배 속에 수백 마리의 뱀이 뒤엉켜 있는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오, 이슈텔!”

나를 발견한 폐하께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내게 다가와 두 손을 덥석 잡으셨다.

“네가 릴체 후작가의 사병을 풀어 카리나를 찾게 했다고 들었다. 정말 고맙구나, 이슈텔.”

율리언의 말이 맞았다. 나를 보는 폐하의 눈에는 아직까지도 물기가 맺혀 있었다.

“예…….”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고개를 돌려 폐하의 시선을 피했다. 폐하께선 내 손을 잡은 채 의자로 나를 이끄셨다. 황제의 의자에 기대있던 카리나가 나를 보고는 특유의 예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부인.”

불과 어제 본 사람에게도 오랜만이란 말을 쓰는군. 짜증이 나는 걸 참고 나 역시 인사를 건넸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잘 돌아왔다.”

정말이지, 누가 더 가식적인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폐하께 팔짱을 끼며 그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를 보는 카리나의 눈동자가 묘한 빛으로 번뜩였다.

“제가 황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전부 공작 부인 덕분입니다, 폐하. 릴체 후작가를 통해 저를 찾으셨을 뿐 아니라, 제게 황궁을 떠난 이유를 묻지 않을 테니 돌아오게만 하라고 특별 지시까지 내리셨다 합니다.”

“오, 정말 그랬느냐 이슈텔? 이렇게 고마울 데가…… 정말 고맙구나, 고마워.”

폐하께선 여전히 내 두 손을 꼭 붙잡고 계셨다. 계속해서 고맙다는 말만 반복하시면서.

폐하께서 왜 이리도 내게 감사를 전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의심하셨으니까. 카리나가 떠난 걸 아신 날, 황제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차가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셨지.

‘어전 회의를 하다 쓰러지셨을 때도, 깨어나자마자 정말 카리나가 어디 있는지 모르냐고 묻기도 하셨고.’

폐하께 거짓을 고한 것이 죄송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적이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폐하께 대한 죄송함보다는 서운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공작 부인께선 폐하를 정말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를 이렇게 다시 폐하께 데려다주신 거지요. 그렇죠, 공작 부인?”

카리나가 폐하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순간 마주친 황금빛 두 눈동자가 경고하듯 깜빡였다. 마치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겠다는 듯. 하지만 다음번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는 것처럼.

그 짧은 순간, 그녀는 오직 눈빛만으로 내게 수많은 말을 건넸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입술을 세게 깨무는 것밖에 없었다. 분노도 설움도 억울함도. 그 어느 것 하나 표현할 수가 없었다.

카리나는 그런 나를 보고는 여전히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곤 폐하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폐하, 황궁을 떠나있는 동안 제가 누구를 만났는지 아십니까?”

“글쎄. 누구를 만났느냐?”

“예전에 제게 몰래몰래 춤을 가르쳐 주었던 무희를 만났습니다. 제가 악단을 떠나있는 동안 저 대신 무대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오, 연락이 끊겼다 했던 그 친구 말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그 친구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라…… 라…….”

“라일라입니다.”

“아, 그래. 라일라!”

“예. 거기에 리코, 리샤, 루시까지 모두 만났습니다!”

“아, 그들이 라일라와 함께 다니는 악단이라 했지?”

“맞습니다, 폐하!”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이름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대화 사이사이마다 웃음소리가 스며들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함께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꼭 누군가 나라는 존재를 지워낸 것만 같았다.

물 위에 퍼진 기름처럼, 흰옷에 번진 얼룩처럼. 나는 이 공간에 어울릴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럼 저는 돌아가…….”

내 뒷말은 또다시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뒤를 돌아 문을 나설 때까지 나를 찾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한 사람은 꼭 소외되고 마는 숫자. 세 사람의 방이었다.

* * *

음식은 식어 가는데 상석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비어있는 맞은편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후에야 애비게일이 내게 다가와 전했다. 폐하께서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럼 오늘은 저희끼리 하는 걸로 하죠.”

짧은 선언으로 세 사람의 저녁이 시작되었다. 술은 어느 것으로 준비하냐는 하녀의 물음에 가장 독한 걸로 달라했다. 곧 나와 일리드, 헬리온의 잔에 같은 술이 따라졌고 우리는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아흑!”

잔이 입술에서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일리드가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잔뜩 찡그린 눈으로 나와 헬리온을 곁눈질했다. 반면 헬리온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확실히 불덩이를 삼키는 것처럼 독한 술이었다. 그러나 혀가 마비된 건지, 아니면 머리가 멍해진 건지, 평소 같으면 마시지도 못할 술인데 나는 자꾸만 포도주를 홀짝였다.

“처음 있는 일이군요. 폐하께서 저희와의 식사 시간을 거르시다니.”

일리드가 와인잔을 옆으로 슬쩍 밀어놓으며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이 시간을 무척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다른 약속도 일부러 이 시간은 피해서 잡으시고…….”

그가 나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은 눈치였으나 나는 모른 척했다.

“소문이 느리나 보네?”

의외로 대답을 한 쪽은 헬리온이었다. 일리드의 시선이 내게서 헬리온 쪽으로 옮겨갔다.

“그 하녀 때문이잖아.”

헬리온이 그것도 모르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제 폐하의 차 시중 하녀가 제멋대로 자취를 감추고선 오늘에서야 발견돼 환궁했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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