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광장의 무희(2)
“집이 누추합니다. 불편하지 않으셔야 할 텐데.”
카리나의 집은 누추하다는 말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여기에 있다간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냐옹?”
웬 고양이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노란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샤샤라고 합니다. 제가 기르는 고양이예요.”
주인을 닮아 호박색으로 빛나는 눈이 퍽 아름다우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나는 낡은 테이블로 가 의자를 꺼내 앉았다.
검은 고양이가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나를 따라와서는 드레스 끝자락에 작은 머리를 연신 비벼댔다.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이젠 아예 내 발밑에 자리를 잡고 누워버렸다.
“어머. 샤샤가 공작 부인이 무척이나 맘에 드는 모양입니다.”
제 주인에겐 귀여워 보이겠지만 내겐 아니었다. 검은 털이 묻은 드레스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몰리가 고양이 알러지가 있는데……. 황궁에 돌아가면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차가 입맛에 맞으실지 잘 모르겠네요.”
카리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초록빛 차를 내왔다. 그러나 나는 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너와 내가 마주 앉아 도란도란 차나 마실 사이는 아니지.”
“네. 저도 예의상 내온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 말을 여유롭게 받아치며 카리나는 자기 몫의 차를 홀짝였다.
“보기보다 더 잔재주가 많더구나. 약초에 해박하질 않나, 귀족들의 말투를 흉내 내질 않나. 거기다 광장에서 보인 춤까지…….”
“공작 부인껜 고작 잔재주일지 모르겠으나 폐하께선 재능이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 그럼 그 재주로 폐하를 현혹시킨 것이냐?”
“현혹이 아니라 폐하께서 제 재능을 높이 평가해주신 거라 해두지요.”
“여전히 당돌하구나.”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요.”
카리나가 손에 쥔 잔 너머로 눈웃음을 지었다. 사람 속을 긁어 놓는 화법은 여전했다.
“그건 그렇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를 찾아오셨을 것 같진 않은데. 어쩐 일이신가요, 친애하는 공작 부인?”
카리나가 테이블 위로 턱을 괸 채 비스듬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자신의 공간이라 그런가. 이제 그녀의 태도에선 가식적인 예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너야말로 아무 이유도 없이 그날 나를 찾아오진 않았겠지.”
그때는 그저 가여운 아이인 줄만 알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올 거란 건 상상도 하지 못하고.
“황궁에 들어온 목적이 무엇이냐?”
첫 만남 때 확실히 해두었어야 하는 질문을 결국 이제야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무릎을 꿇고 그저 일자리 하나만 달라고 했다. 제 한 몸 의탁할 곳 없는 불쌍한 여인. 죽음을 각오하고 나를 찾아올 만큼 절박했던 사람을 연기하며.
지금에 와서 보니 얼마나 멋진 연기였던가 싶다. 감쪽같이 나를 속이고 자연스레 폐하에게까지 접근했으니.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숨은 목적을 확실히 알아야 할 때였다.
“목적…… 목적…….”
카리나가 낭랑한 목소리로 같은 단어를 계속 읊조렸다. 그리곤 이내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람이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복수뿐이지요.”
역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죽은 제 가족의 복수를 하려고 날 찾아왔다고?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 한들 허황되고 기가 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뜻밖이었다.
“설마 제가 공작 부인께 복수를 하러 왔다고 이해하신 건 아니죠?”
“아니란 말이냐……?”
“역시…….”
카리나가 제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친애하는 공작 부인. 제가 지난 몇 달간 황궁에서 부인을 보면서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
“공작 부인께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너무나 귀족적이라는 겁니다.”
귀족적이라고? 대체 그게 무슨 의미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표현이었다.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하자 카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을 좀 둘러보십시오. 이 누추하고 허름한 방, 이곳이 제가 집이라 부르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살며 제가 감히 공작 부인께 복수 따위를 꿈꿀 처지가 되었겠습니까?”
“…….”
“그리고 저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뵌 적도 없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가족을 위해 인생을 걸 만큼 무모하진 않거든요, 제가.”
“…….”
“그런데도 공작 부인께서 제가 가족의 복수를 위해 황궁에 들어온 거라 생각하시니……. 이 얼마나 명예롭고 긍지 높으며 다분히 귀족적인 발상이지 않습니까?”
“…….”
“제가 처한 현실이 너무 막막해서 조상님들 사정 같은 건 살필 여유가 없었네요. 죄송합니다, 조상님들.”
소리 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카리나의 입꼬리는 묘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귀족적이라는 말이 이리도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수 있구나.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녀의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다분히 귀족적인 나는 가족의 복수 말고 다른 건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대체 황궁에 들어와 나를 척지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무어란 말인가?
“그럼 누구의 복수를 한다는 말이냐?”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복수하려는 대상은 또 누구고?”
“제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라서요.”
카리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낡은 침대 앞으로 갔다. 그녀가 침대 아래로 손을 넣더니 색바랜 종이봉투를 꺼내 왔다.
[시신 부검 결과서 : 에스메랄다]
카리나가 테이블 위로 봉투를 내밀었다.
“죽은 언니의 부검 결과서입니다. 없는 돈을 다 털어서 유명한 의사에게 공증받았죠.”
카리나의 언니가 몇 년 전 시신으로 발견되었단 이야기는 들었다. 단순한 사고사일 거라 짐작했는데…… 부검을 맡겨야 할 정도의 사건이 있었던 걸까?
“언니는 귀족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냥 귀족도 아니고 이곳 수도에 사는 중앙 귀족에게요. 그래서 언니의 복수를 하고 싶었습니다.”
“중앙 귀족에게?”
“예. 하지만 천한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 목숨을 버려가면서 그 귀족 놈 하난 죽일 수 있겠죠. 하지만 전 그놈의 집안 자체를 망가뜨리고 싶어서요.”
카리나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킬킬거렸다.
“그러려면 그 귀족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한데. 그러다 보니 리젠트라 공작가나 황가 말고는 선택지가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피 섞인 자르 리젠트라 공작을 유혹할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하하하.”
제 딴엔 농담이라고 던졌겠지만 듣는 내게는 무척이나 불쾌한 말이었다.
내 오빠 자르는 새언니 실비아밖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제아무리 절세미인이 유혹한다 하더라도, 오빠는 새언니와의 신의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쾌한 건 카리나가 나와 자신을 같은 선상에 둔다는 것이었다.
피가 섞였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동시에 부정하고 싶은 진실이기도 했다.
피가 섞였지만 나와 그녀는 절대 같은 곳에 설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은근히 나와 자신을 동등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것이 몹시도 불쾌했다.
“그러면 네 언니를 죽인 그 귀족은 누구냐?”
“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카리나가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말씀드리면 공작 부인께서 그 귀족에게 귀띔을 해주실 거 아닙니까? 복수는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도 못하게 해야 제맛이지요.”
어지간한 중앙 귀족들과는 전부 친분이 있는 나였다. 그중엔 더 밀접한 가문과 그렇지 않은 가문이 있을지언정, 잘못되길 바라는 가문은 없었다. 내가 카리나였어도 그가 누군지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한 가문에 피바람이 불겠구나.’
계급과 신분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는 제국이었지만 살인에 있어서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귀족이어도 살인을 한 자는 강한 처벌을 받는 것이 제국의 법이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건만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제 질문이 끝나셨으면 제가 했던 질문에 답을 해주시지요.”
카리나가 기다렸단 듯 말을 이었다.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이미 답을 알면서 굳이 내게 확답을 받으려는 모습이 너무나도 얄밉게 느껴졌다.
“내일 아침에 기사단장을 보낼 테니 환궁해라.”
“예? 그게 정말이십니까? 저를 다시 궁에 들이시는 겁니까?”
지극히 놀란 듯 꾸며낸 목소리와 과장된 몸짓. 카리나가 황금빛 눈을 크게 뜨며 재차 반문했다.
“진심이십니까, 공작 부인? 정말 제가 황궁에 가도 되는 건가요?”
말려들지 말자. 저 애는 보통이 아니다. 말려들지 말자.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 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 그래 좋다. 네가 그토록 바라는 복수만 하고 조용히 살아라. 그러면 나도 네가 뭘 하든 눈 감아 주지. 마치 없는 사람처럼.”
내 나름에선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복수를 하는 것도 방해하지 않고 그 복수에 폐하를 이용하는 것도 막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니.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카리나가 은빛 속눈썹을 깜빡이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엔 자신이 이겼다는 승리감이 짙게 배여 있었다.
“그런데 부인. 뭐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실은 처음 만난 날부터 궁금했습니다. 왜 제가 황궁에 있는 걸 허락하시는지요. 그저 단순한 동정뿐이셨습니까?”
처음엔 나를 놀리는 건가 싶었다. 그게 아니면 또다시 답을 정해놓고선 내게 질문을 건네는 걸까?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보자 알 수 있었다. 순진한 얼굴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을 때와 달리, 그녀의 눈은 진심으로 내 대답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네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확인받고 싶어 하는구나. 그럼 확실히 말해주지.”
카리나를 향해 칼로 벼려낸 듯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난 너란 사람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신중히 고민하고 생각해서 대해야 할 만큼, 넌 내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까.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