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집으로 가자
“일어나라.”
건조한 목소리로 내리는 명령에 카리나가 꿇었던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손에 들린 총에서 하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까딱하면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이었다. 조금만 방향을 틀었다면 정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그 어떤 공포심도 없었다.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커다란 총성에 귀가 멍해질 법도 한데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너무하십니다, 공작 부인.”
카리나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가진 거라곤 낯짝밖에 없는 계집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실 뻔했습니다.”
“내가 정말 너무했으면 상처로 끝나지 않았어.”
나는 아직 연기가 나는 총으로 그녀의 심장을 가리켰다.
“피가 흐르는 쪽이 뺨이 아니라 그쪽이었을 거다. 아니, 애초에 지금 넌 이 세상에 없겠지. 날 찾아온 그날 바로 처형대에서 목이 날아갔을 테니까.”
“그렇게 무서운 말씀 하지 마시지요. 고귀하신 분께서 잔인한 말씀을 하시니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래 고귀하신 분들이 더 잔인한 법이거든. 너랑 네 가족이 당해봐서 잘 알지 않나?”
“…….”
순간 카리나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를 놀릴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사용인들의 말이 맞았다. 본색을 드러낸 그녀는 더 이상 순진한 하녀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 계집에게 속지 마십시오! 가엾고 처연한 얼굴을 하고선 황제 폐하의 마음을 전부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카리나 그것이 폐하께 청해 공작 부인의 드레스를 내어 달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선 그 계집에게 조만간 귀족 작위까지 하사할 생각이시고요!」
「폐하를 현혹시키려고 작정을 하고 접근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도회에서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카리나를 발견한 날, 애비게일과 소피가 펑펑 울며 내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처음엔 나 역시 믿기 힘들었다. 늘 경계는 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그녀는 그저 영리한 하녀일 뿐이었다.
그저 운이 좋아 마구간에서 황제전으로 가게 된 하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그녀가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니.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무서운 계집입니다. 자신에게 거슬리는 말을 했을 때, 그 계집의 표정이 변하는 걸 공작 부인께서도 보셨어야 해요!」
문득 애비게일의 말이 떠올랐다. 방금 전, 제 가족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게 보였던 눈빛. 깊은 한이 맺힌 금빛 눈동자. 그것이 나를 향한 그녀의 숨겨온 본심일 터였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윽고 카리나가 눈에 힘을 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뭘 어떻게 해야 제가 이 사냥터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살려준다 말한 적 없는데?”
“살려줄 마음이 없다면 아까 그 한 발에 이미 절 죽이셨겠죠.”
“이젠 빌지도 않는구나.”
“빈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아서요.”
“겁도 없고.”
“겁은 이미 처음 뵌 날 다 먹었고요.”
기가 막혔다. 말하는 게 보통이 아니라는 건 이미 두 하녀장에게 들은 이야기였지만, 막상 내 눈으로 보고 나니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폐하께서 틀리신 듯합니다.’
폐하께선 내게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정말 직감이 좋은 사람이라면, 왜 처음 본 순간 그녀의 본심을 읽어내지 못한 걸까…….
“가라.”
총을 든 손을 내리고 반대편 산길을 가리켰다.
“두 번 다시 만나는 일 없게 내 눈앞에서 사라져.”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카리나가 나른하게 눈을 뜬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사라지면 폐하께서 몹시 슬퍼하실 텐데요.”
“…….”
“제가 없으면 밤마다 폐하의 차 시중은 누가 들며, 또 아침마다 낭독으로 폐하의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누가 할 건가요?”
“네가 아니어도 황궁에 하녀는 많다.”
“아뇨. 반드시 저여야만 할 텐데요?”
나를 보며 미소 짓는 카리나의 표정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폐하께선 오직 저만을 원하고 저만을 찾으실 테니까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폐하의 하녀장 소피 또한 내게 말했다. 폐하의 모든 관심은 온통 카리나에게 쏠려있다고.
그녀를 황궁에서 쫓아내면 한바탕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폐하께서 나를 의심하실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폐하와 나 사이에 금이 가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
“친애하는 공작 부인.”
여전히 낭랑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녀가 나를 불렀다.
“뭘 그렇게 망설이시는 겁니까?”
“…….”
“설마 제가 두려우신 건가요?”
“뭐……?”
“혹시…… 제가 폐하의 여인이라도 될까 두려워 절 쫓아내시는 건가요?”
탕-!
허공에 울려 퍼진 총성에 나무 위에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지막 기회다. 가라.”
이번에 내 총은 정확히 그녀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두려워한다고? 내가 고작 하녀 따위를? 카리나가 지껄인 같잖은 말 중 가장 어이없는 대목이었다.
나는 고귀하고 긍지 높은 리젠트라가의 유일한 공녀이며,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제국의 황태자비로 정해진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두려워한다고? 아무것도 아닌 너 따윌?’
폐하의 여인? 그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녀가 폐하의 정부가 된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총애받는 정부가 된다 한들 정부는 정부일 뿐. 황태자의 정비가 될 내게 감히 대적할 명분 따위도 없는 것이다.
황태자비와 하녀. 그것이 나와 그녀 사이에 놓인 간극이었다. 운명을 바꾸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절대 변치 않을 견고한 현실.
‘그런 주제에 감히 내게 그따위 말을 지껄여?’
내 인내심은 이제 모두 소진됐다. 그녀가 다시 한번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나는 정말로 그녀를 쏠지도 몰랐다.
다행히 카리나는 이제 물러나야 할 때임을 눈치챘다.
“지금은 이렇게 떠나지만 언젠가 제가 필요한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그녀가 나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남겼다.
“플레코 광장으로 오세요. 그곳으로 오면 어렵지 않게 저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 *
“제기랄.”
늦은 오후부터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장대비가 미친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플레코 광장에 도착한 카리나는 텅 빈 광장 무대를 보며 욕지거리를 했다.
“집으로 가야겠네.”
카리나는 잠시 근처 옷가게 앞에 서서 비를 피했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은빛 머리카락을 짜고 구두 안에 철렁거리는 빗물도 빼냈다.
잠깐 고개를 숙이자 빗물이 귓바퀴를 타고 귀 안으로 들어갔다. 카리나가 멍멍한 귀를 부여잡고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하여튼 냉정한 사람이야. 같은 여자끼리, 그것도 이렇게 예쁜 얼굴에 상처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
카리나가 가게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여자에게 아름다운 외모는 가장 큰 무기이자 동시에 약점이 될 수 있단 걸, 카리나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언니에겐 그것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지만 자신은 달랐다. 비록 지금은 혈혈단신으로 쫓겨났을지언정 이미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지 않았던가.
찰방- 찰방-
카리나는 광장을 가로질러 마을 가장 외곽 지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으슥한 골목, 나무 판대기를 대충 이어 붙여 구색만 맞춰놓은 곳. 그곳이 카리나의 집이었다.
끼이익 소리가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허름한 침대와 테이블이 보였다.
카리나는 작은 서랍을 열어 그 안에 있던 수건으로 머리카락과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밖에서 보기엔 낡았지만 내부는 그럭저럭 안락한 곳이었다.
“냐옹- 냐옹-”
몰아치는 천둥소리 사이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카리나가 홱 고개를 돌렸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창문에 몸을 기댄 채 울어대고 있었다.
“샤샤!”
카리나가 하루 중 가장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창문을 열고 고양이를 집 안으로 들였다. 고양이는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더니 카리나의 발밑에 와서 머리를 치댔다.
“요 깜찍한 것!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카리나가 고양이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꼭 껴안았다. 고양이는 그녀의 품에서 기분 좋은 갸르릉 소리를 냈다.
“그 여자가 좀 더 단순했으면 모든 게 훨씬 수월했을 텐데.”
카리나가 고양이를 안고 낡은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빗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고양이를 안고 있자니 지친 하루의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귀족 여자들은 곱게 자란 탓에 답답할 정도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조금만 아부해도 맘을 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 여잔 완전 반대더라고. 뭐랄까……. 좀 더 예민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카리나가 샤샤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처음엔 잘 속아 넘어가나 싶었는데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더라. 의심도 엄청 많고. 내게 좀 마음을 열었나 싶으면 또다시 선을 긋고, 잘 지내보려고 하면 차갑게 돌아서고. 제 친구들한텐 안 그러면서 말이야.”
무도회장에서 본 이슈텔을 떠올린 카리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게다가 날 황제 곁에서 떼어놓으려고 갖은 애를 다 쓰잖아. 그때 깨달았지. 아, 이 여자는 절대 내게 맘을 열 생각이 없구나. 좋게 좋게 가고 싶었는데 결국 너와 난 척을 질 수밖에 없겠구나.”
그녀가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냉담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이런 상황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왠지 모를 씁쓸한 기분에 카리나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래서 그냥 한 방 먹여주고 왔어.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지. 그래도 상관없어. 애초에 내 목표는 황제였고 난 그걸 달성했으니까.”
카리나가 생각만 해도 즐거운 듯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여자…… 겉으론 차가운 척, 얼음 같은 척하고 있어도 의외로 약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
“그래서 조만간 또 만나게 될 것 같아. 우린 그동안 앞으로의 계획이나 정비하면서 좀 쉬고 있자고.”
카리나가 고양이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작은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다음엔 나랑 같이 더 큰 집으로 가자, 샤샤.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이제 그곳이 내 집이 될 테니까.”
고양이가 몸을 움직이더니 카리나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그녀를 보며 더 큰 소리로 울어댔다.
카리나는 허리를 숙여 고양이의 매끈한 몸을 쓰다듬고는 침대로 갔다.
흰 천을 거두고 침대 아래에 손을 넣자 두꺼운 봉투가 나왔다.
[시신 부검 결과서 : 에스메랄다]
카리나는 씁쓸한 눈으로 종이 위에 적힌 이름을 매만졌다.
“이게 세상에 나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