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동정의 결과
“헬리온 대공을 선택한 차기 황태자비, 북부와 손을 잡다.”
카리나의 낭랑한 목소리가 황제전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황제는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의 옆에선 카리나는 오늘 발행된 신문 기사를 낭독하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신문은 헬리온을 선택한 이슈텔에 대한 기사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대부분 리젠트라 공작가가 먼저 북부 대공령에 화해의 손길을 내민 거라 쓰여진 기사들이었다.
“어제와 비슷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폐하. 아직까지 사람들의 관심은 건국제 무도회에 쏠려있는 것 같습니다.”
낭독을 마친 카리나가 신문을 접어 황제의 옆자리에 올려두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리나를 보았다.
“찾고 싶다던 귀족은 찾았느냐?”
“예, 폐하. 폐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찾을 수 있었습니다.”
“왜 그 사람을 찾았느냐?”
“오래 전에 봤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첫눈에 반한 사람이라도 되느냐?”
황제의 물음에 카리나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도 종종 사교 모임에 나가거라. 내가 힘을 써줄 테니.”
황제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능력 있는 사용인들은 종종 황제를 보필한 공을 치하받아 세습되지 않는 귀족 작위를 받을 수 있단다. 준남작 정도의 작위 말이다.”
“준남작……?”
“그래. 그 정도 작위면 중앙 귀족은 어려울지라도 지방 귀족과는 어렵지 않게 혼담이 오갈 수 있을 것이다.”
“폐하…….”
카리나의 금빛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황제가 하녀의 공을 치하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며 감사할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보다 더 나아가 그녀의 미래를 걱정해주고, 작위까지 하사해 혼처도 구해줄 마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관심과 걱정을 받아보는 일. 카리나에겐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폐하, 저는 죽는 날까지 폐하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카리나가 황제의 곁에 다가가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리곤 긴 망토 끝에 입을 맞추었다.
“평생 폐하의 옆에서 폐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제게 가장 큰 치하이고 작위입니다.”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가식이 섞이지 않은 진심 어린 말투였다. 이렇게 서툴고도 직설적인 칭송을 받아본 것은 무척 간만의 일이었다. 황제는 하녀의 말에 뭉클한 감동마저 느꼈다.
‘이슈텔도 이 아이처럼 조금 더 솔직했으면 좋으련만…….’
황제는 이슈텔과 함께했던 점심 식사를 떠올렸다.
황제 역시 이슈텔이 의도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허락 없이 드레스를 내어준 것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끝내 어떠한 해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슈텔이 카리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는 이슈텔이 그녀를 쫓아낼까 봐 걱정됐다.
황제는 카리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제 그녀의 차 없이는 밤에 잠을 이루기도 힘들었고, 그녀의 낭독 없이 아침을 시작하는 것도 쓸쓸했다.
하지만 정작 황제가 이슈텔에게 사과를 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슈텔과 시선을 마주한 채 긴 침묵을 지키는 동안, 황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드레스 따위를 두고 벌이는 노인과 아가씨의 기 싸움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일종의 정치 싸움이었다.
그날 황제는 이슈텔에게서 죽은 리젠트라 공작의 모습을 보았다. 황제 위에서 군림하던 최고 권력자를. 그렇기 때문에 더욱 카리나를 내어줄 수 없었다.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황제가 카리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곧 있으면 재상을 만날 시간이다.”
“예, 폐하.”
카리나가 공손히 절을 한 후 황제전의 문을 나섰다.
무거운 황금빛 문이 닫히자 카리나의 붉은 입술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을 닦아냈다.
“재밌네.”
실소가 새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순조로워 오히려 재미가 없을 지경이었다.
“카리나.”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하녀장 소피가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와 갈 곳이 있다. 따라오너라.”
* * *
나는 사냥복을 입은 채 황실 사냥터 안쪽에 서 있었다. 출입에 각별히 주의를 준 덕분에 보초병 말고 다른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공작 부인.”
저 멀리 소피와 애비게일이 보였다. 두 하녀장은 검은 망토를 씌운 사람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아 끌고 왔다.
“데려왔습니다.”
애비게일이 망토를 벗기자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카리나가 나타났다.
“고, 공작 부인!”
붙잡혀 온 카리나가 나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더니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사냥터가 아닙니까? 저를 왜 이곳에……?”
나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한 채 소피와 애비게일에게 돌아가라 눈짓했다. 두 하녀장이 재빨리 황궁 사냥터를 나서더니 철제 출입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사냥을 해본 적이 있느냐?”
내가 총 한 자루를 챙기며 묻자 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부인.”
“그럼 오늘 나랑 같이해보자.”
나는 앞장서서 사냥터를 걷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영문도 모른 채 내 뒤를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공작 부인?”
길이 점점 험해지자 카리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험한 숲길을 선택했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 때문에 이른 오후임에도 마치 밤처럼 어둡고 쌀쌀한 곳이었다.
“카리나.”
걸음을 계속해 걸으며 그녀를 불렀다.
“리젠트라 공작가의 내전이 왜 일어난 줄 아느냐?”
“예……?”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당황한 듯 카리나의 말끝이 높아졌다.
“어, 그건 공작 자리를 두고 두 형제분이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니, 틀렸다.”
“아, 그게 아니라면……?”
“죽은 사람처럼 살지 못해서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내가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감정에 휘둘려 동정을 베풀어서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나무 사이로 우두커니 서 있는 카리나가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나, 감히 다시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듯했다.
“파비엘 리젠트라는 본디 서출이었다. 내 할아버지의 가정교사였던 여인이 증조부님의 정부가 되면서 낳은 자이지.”
나는 오래된 이야기를 시작하며 주머니 속의 목걸이를 꺼냈다.
“모친이신 리젠트라 공작 부인께서 돌아가시자 나의 할아버지는 새어머니 자리에 파비엘의 친모를 추천했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이자 아버지의 정부가 된 그 여자를. 왜인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부인.”
카리나가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께서 다른 귀족 가문의 새어머니가 들어오는 걸 원치 않아서 그랬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내 할아버지는 서자인 네 할아버지를 동정하셨거든.”
“동정이요……?”
“그래. 공작가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서출이란 이유로 가문의 냉대를 받던 이복동생을 안타깝게 여기신 거지. 그렇기에 이복동생을 자신과 같은 적자로 만들어주고 싶어 하셨다. 온전한 리젠트라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
“네 할아버지의 엄마. 낮은 신분의 일개 가정교사 따위가 공작 부인이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내 할아버지의 도움 때문이었어. 어린 시절의 정을 생각하여 새어머니로 모실 수 있겠다고 판단하셨던 거지.”
“…….”
“처음엔 모두가 행복했지. 정부와 서자라고 손가락질 받던 파비엘 모자는 내 할아버지께 더없이 감사해했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파비엘 모자는 점점 많은 것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지. 마치 리젠트라 가문의 모든 것이 본디 자신들의 것인 것처럼.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건, 전부 내 할아버지의 동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고 말이야.”
“…….”
“결국 그들은 적장자의 자리인 공작 위마저 넘보게 되었지. 리젠트라가의 전쟁은 그렇게 벌어진 것이다. 동정에 의해 한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불러일으켜서!”
탁-
손에서 던진 황금 목걸이가 흙바닥에 처박혔다.
“아!”
자신의 것임을 바로 알아본 카리나가 재빨리 바닥에 주저앉아 목걸이를 들었다. 나는 카리나와 그녀의 목걸이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너는 더 많은 걸 바라게 되겠지. 폐하의 총애를 업고 마치 그 모든 게 원래 네 것인 양 착각하며. 그 옛날 네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말에 목걸이를 닦던 카리나의 움직임이 돌연 멈추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친애하는 공작 부인.”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티 없이 맑고 순수했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요…….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뭐라고……?”
“제가 무얼 어쨌다고 공작 부인께서 그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는지 잘 모르겠어서요.”
어이가 없었다. 카리나는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이가 아니었다.
“친애하는 공작 부인, 제가 뭘 욕심내고 바랐다는 건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제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오직 폐하의 건강과 안정밖에 없어서요.”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녀 된 자로서 황제 폐하를 걱정하는 마음도 욕심이 될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설마…….”
카리나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과장된 표정으로 양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가렸다.
“공작 부인께선 황제 폐하를 사랑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저와 제 약초가 폐하께 도움이 되는 게 언짢으신 걸 보면요!”
“뭐, 뭐라고……?”
“역시 그런 것이지요? 귀족들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이라면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처단한다고 들었습니다!”
“…….”
“황실과 리젠트라 공작가는 어찌 보면 정적이나 마찬가지니 공작 부인께서 그런 맘을 품으신 것도 아주 무리는 아니네요. 그렇지요?”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동시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이윽고 떨림이 잦아들자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면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웃음이 난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나는 차디찬 웃음을 지으며 눈앞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 역시 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말로 해선 안 되겠구나.”
코트 품으로 손을 넣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철컥-
방아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카리나의 얼굴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