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18화 (18/160)

18화 : 무도회의 유령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니 문득 황제 폐하가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폐하께서 침소에 드실 시간인데…….’

폐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니면 그분을 가까이서 챙길 이도 없을 텐데. 내가 너무 무도회 분위기에 취했던 모양이다. 나는 폐하께 저녁 인사를 드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 부인, 조심하십시오!”

내가 휘청이자 슈리가 얼른 다가와 나를 붙잡아주었다.

“괜찮아요.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고 있어요.”

기분 좋게 술이 오른 나는 슈리와 로제, 그리고 북부 가신들을 남겨두고 무도회장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황제께서 계셔야 할 자리는 비어있었다. 나는 빈 의자를 보며 하녀들에게 물었다.

“폐하께선 어디 계시느냐?”

“폐하께서는 조금 전 막 침소에 드셨습니다.”

“아, 이런. 저녁 인사도 못 드렸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무도회를 재미있게 보시다 가셨습니다.”

“맞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북부 가신들과 어울려 춤추는 모습까지 전부 보셨답니다. 부인께서 낯가림이 심한 북쪽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해주신다며 무척 흡족해하셨습니다.”

하녀들은 괜찮다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 황궁에서 폐하를 챙길 사람은 나 하나뿐인데…….

“폐하께선 처소로 잘 돌아가셨겠지? 누가 폐하를 모시고 갔느냐?”

“카리나입니다, 공작 부인.”

하녀의 말에 갑작스레 기분이 저조해졌다. 안 그래도 요새 들어 카리나와 폐하의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다는 소문은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더 폐하의 곁을 더 지켰어야 했는데. 왠지 모르게 카리나에게 선수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알았다. 너희들도 피곤할 텐데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 쉬어라. 무도회 뒷정리는 내일 해도 상관없으니까.”

나는 하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발코니 계단을 내려가 무도회장 뒤로 갔다. 다시 친구들에게 가려고 했으나 이내 몸을 돌려 황궁 복도로 향했다.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걸음을 재촉하자 아름다운 보석이 찰랑거리는 구두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났다. 별로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오늘따라 복도가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건너편 복도에서 무언가 스윽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뭐지?’

유령같이 길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에, 바닥까지 끌리는 붉은 드레스 자락. 얼핏 보기에도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취해서 헛것을 본 건가?’

하지만 그 드레스. 헛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익숙한 드레스였다.

나는 얼른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유령은 내가 있던 복도의 건너편에 있었다. 방금 모퉁이를 돌았으니 얼른 따라가면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도 끝을 돌았을 때, 유령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이상하다, 분명 내 드레스 같았는데.’

화려한 색감의 붉은 드레스. 투렌 남작 부인과 로제가 가져왔던 드레스 중, 내가 선택하지 않은 드레스였다.

나는 걸음을 옮겨 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발코니에 올라갔다. 곁에 있던 하녀에게 망원경을 건네받은 후,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붉은색은 눈에 잘 띄기 마련이었다. 오래지 않아 나는 그 드레스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드레스를 입은 유령을 본 순간, 술기운에 몽롱했던 정신이 한순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애비게일!”

날카로운 목소리로 하녀장을 불렀다. 파티는 끝났다.

* * *

‘즐거워 보이네.’

삼십 분 전, 찻잔을 들고 발코니로 향하던 카리나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시선을 내린 곳엔 연회장 한가운데서 즐겁게 웃고 있는 이슈텔이 있었다. 그녀의 곁엔 천방지축 시녀 친구와 처음 보는 낯선 여자가 있었다.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군.’

카리나는 처음 보는 이슈텔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가 아는 이슈텔은 늘 냉정하고 감정의 동요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즐거운 얼굴로, 그것도 처음 보는 낯선 이와 어울려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카리나는 이슈텔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발코니를 향해 걸었다. 하녀들이 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 홀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가 보였다.

“폐하,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카리나가 미소 띤 얼굴로 황제에게 차를 건넸다. 황제는 잔을 받아들며 카리나의 모습을 쓱 훑어보았다.

“잘 어울리는구나.”

황제는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카리나에게 짧은 칭찬을 건넸다. 카리나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칭찬은 짧았지만 황제는 내심 카리나의 모습에 크게 놀랐다. 하녀복을 입고 있었을 땐 전혀 몰랐는데,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어느 귀족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젊은 여인들 중에선 이슈텔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카리나의 모습을 보니 이슈텔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

카리나에게서 시선을 뗀 황제가 곁에 있던 하녀장을 불렀다.

“지금 이슈텔과 춤을 추고 있는 저 이는 누구냐?”

“텔리아 가문의 슈리 텔리아입니다. 헬리온 대공 전하를 따라온 북부 가신 집안의 영애라고 합니다.”

“텔리아……, 텔리아라……. 어디서 한 번 들어본 이름 같은데…….”

“헬리온 대공 전하와 혼담이 오갔던 영애입니다.”

아! 황제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하하. 이슈텔이 이번 기회에 북부와 화친을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구나!”

황제가 흡족한 얼굴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던 카리나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저렇게 웃고 떠들며 놀 수 있는 사인가?’

어이가 없었다. 어찌 보면 한 남자를 두고 연적으로 엮일 수도 있는 사이인데, 두 사람은 어색하기는커녕 마치 오래된 친구 사이 같았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안 좋았다.

정말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귀족들이란 원래 저렇게 감정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걸까? 지금껏 하층민의 삶을 살아온 카리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슈텔이 가까이 두는 자들은 모두 성격이 외향적이구나. 참, 의외야…….”

황제가 엉망진창으로 색소폰을 불어대는 로제와 박자를 무시하고 스텝을 밟는 슈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공작 부인의 본래 성격도 친구들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카리나도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황궁에서 지내면서 성격이 바뀌셨을 수도 있지요.”

“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몹시 씁쓸해 보였다. 이윽고 황제가 카리나가 들고 있던 은쟁반에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찾는 이가 누군진 모르겠다만 잘 찾아보아라.”

발코니를 나가기 전, 황제가 카리나에게 말했다.

“그 사람을 꼭 한 번 만나야 한다고 했잖느냐.”

* * *

카리나가 어수선한 분위기의 연회장에 발을 내디뎠다. 무도회는 점차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직 대다수의 귀족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카리나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어머, 저 레이디는 누구야? 너무 아름답다.”

“그러게,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근데 드레스 좀 봐. 보통 가문의 사람이 아닌가 본데?”

“아니, 저 정도 미모를 가진 사람인데 어떻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카리나는 점점 자신에게로 쏠리는 귀족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부채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누구 것인진 모르겠지만 우선 이걸로 얼굴을 가려야겠다 싶었다.

“오!”

그저 부채 하나 펼쳤을 뿐인데 귀족들 사이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카리나의 주변에 있는 귀족들은 남녀 할 것 없이 하나같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이는 은빛 머리카락과 화려한 다이아몬드가 수놓아진 붉은 드레스. 그리고 그림을 그려놓은 듯 섬세한 얼굴은 귀족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뒤에 선 귀족들이 어느 가문의 영애냐고 쑥덕거렸다. 하지만 그들 중 그녀의 출신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긴 없네.’

카리나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귀족들의 얼굴을 쭉 훑고는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자신이 찾는 사람을 찾아 홀 전체를 돌아다녀 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카리나가 손끝이 하얘지도록 세게 부채를 쥐었다. 건국제는 중앙 귀족들이 전부 모이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그 사람이 없을 리 없었다. 카리나는 초조한 마음을 겨우 다잡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리젠트라 공작! 여기입니다!”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단 한 번 들은 것이 전부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

카리나가 재빨리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바닥까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이 몰려왔다.

준수한 얼굴에 서글서글한 미소. 그리고 호탕한 웃음소리.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확실했다.

“저기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서 있는 카리나에게 우아한 귀부인 한 명이 다가왔다.

“처음 뵙는 분인 거 같은데, 어느 집안의 레이디이신가요?”

“아. 전 그냥……. 어느 집안의 사람도 아닙니다. 황제 폐하의 초대를 받고 온 것뿐입니다.”

황제의 초대라는 말에 귀부인이 눈을 반짝 빛냈다. 카리나의 사정을 모르는 귀부인에게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레이디로 보였다.

카리나에게 관심이 생긴 귀부인이 그녀의 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카리나의 시선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

“아, 실란다 백작님과 아는 사이신가요?”

귀부인이 카리나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며 말했다. 내내 차가웠던 카리나의 입꼬리가 그제야 살짝 올라갔다.

“네, 아주 잘 알다마다요. 이렇게 다시 볼 날만을 기다려온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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