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새 친구
일리드와 춤을 마친 후에도 건국제 행사는 계속됐다.
오랜만에 만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황태자비가 될 내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아첨꾼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까지도 적절히 다룰 수 있어야 하기에 나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로제. 로제 리세리, 어딨어?”
한참을 가식적인 대화를 주고받아서 그런지 편한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나는 로제를 찾아 사람들 틈을 돌아다녔다. 귀족들이 주는 술을 모두 받아 마시다 보니 걸음이 조금 꼬이긴 했지만, 아직 정신은 말짱했다.
“어, 이슈텔 공작 부인! 윈테라 공녀님, 여기예요!”
저 멀리서 뒤바뀐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북부 가신들 사이에서 잔뜩 술에 취한 로제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윈테라 이슈텔 님, 제가 뭘 찾았는지 아세요?”
로제가 날 아무렇게나 부르며 신난다고 손뼉을 쳤다.
“짜잔! 이슈텔 님께 제가 새로 사귄 친구를 소개합니다!”
로제가 미끄러지듯 옆으로 물러서자 그 뒤로 풍채 좋은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어깨에 두른 두꺼운 털 망토 때문에 처음엔 남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앳된 얼굴의 여인이었다.
“이 영애가 누군지 아세요?”
“글쎄. 나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바로 텔리아 영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윈테라 공작 부인! 북부 가신 소속 ‘슈리 텔리아’라고 합니다!”
슈리의 엄청난 사자후에 하마터면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것도 모자라 나를 향해 각 잡힌 경례까지 하고 있었다. 북부 장군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군기가 몸에 꽉 잡힌 모습이었다.
“아, 예. 텔리아 영애.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놀란 표정을 감추며 슈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로제가 시시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와 슈리를 마주 보고 앉게 했다.
가까이에서 본 슈리 텔리아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슈리를 상상할 때, 나는 약혼자를 빼앗긴 비련의 여주인공을 떠올렸다. 석 달간 두문불출하여 여윈 얼굴과 앙상한 몸, 그리고 독기 품은 눈.
하지만 그녀는 내 상상과 정확히 반대였다. 떡 벌어진 어깨와 근육 잡힌 구릿빛 몸매, 그리고 나보다도 더 큰 키. 날 보는 눈 또한 독기는커녕 오히려 겁먹은 토끼 눈빛이었다.
‘과연 장군 집안의 고명딸답구나!’
나는 슈리의 팔 근육을 한번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북부의 여인을 보는 건 처음이라 건강미 넘치는 슈리가 신기하고도 멋있게 느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아아아앙!”
갑자기 슈리가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또다시 터져 나온 그녀의 사자후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고, 로제는 재빨리 손을 들어 두 귀를 틀어막았다. 이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북부 가신들뿐이었다.
“가, 갑자기 왜, 왜 이러시나요?”
어지간해선 말을 더듬지 않는데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말에 슈리가 더 큰 소리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요.”
“네……?”
“공작 부인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눈물이 납니다!”
만취 상태인가? 나는 슈리를 향해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나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텔리아 경. 아론 텔리아 경, 지금 어디 계시지?”
이대로 있다간 슈리가 나와 로제의 고막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녀의 오빠를 불러다 놓고 얼른 자리를 떠나야겠다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슈리가 갑자기 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공작 부인, 사실 저 헬리온 대공한테 미련이 남아서 수도에 온 거예요.”
슈리가 빨개진 코를 훌쩍였다.
“오빠가 맨날 제게 편지를 보냈어요. 헬리온 대공께선 윈테라 공작 부인께 푹 빠져 있으니 이제 그만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요.”
“아이고, 아이고!”
로제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안 됐다며 혀를 찼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마음이 그리 쉽게 정리되지 않아서……. 그래서 오빠 말대로 충격요법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충격요법이요……?”
“네. 오빠가 그랬습니다. 공작 부인을 실제로 뵈면 헬리온 대공을 포기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고요.”
“예……?”
“그래서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공작 부인께선 어떤 분이시기에 그 무심한 헬리온 대공이 푹 빠졌나 궁금해서요.”
“그것참, 희한한 발상이군요…….”
북부 가신들 중 제일 붙임성 좋은 텔리아 경을 떠올려보니 대략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텔리아 경이 여동생에게 헬리온을 포기시키려 거짓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조금 미안하기도 하여, 반쯤 뗀 엉덩이를 다시 자리에 붙였다.
“그런데 이렇게 공작 부인을 직접 뵈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 진정이 됐는지 슈리의 목소리가 전보다 차분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신데…… 감히 저 따위랑 비교를 할 수가…….”
“무슨 말이에요? 텔리아 영애가 얼마나 매력적인데!”
내가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슈리를 혼냈다. 이렇게 젊고 멋진 여자가 실연의 아픔 때문에 자신을 폄하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저기 수도의 귀족들 좀 보세요. 하나같이 깡마른 체형에 꽉 조이는 드레스, 게다가 똑같은 화장을 하고 있죠. 술에 취하면 누가 누구인지 잘 구별도 안 가요.”
“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텔리아 영애의 모습이 가장 인상 깊어요. 전 오늘 텔리아 영애 말고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정말이신가요……?”
“정말이에요.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요. 한 번만 더 그런 약한 소리 하면 나 정말 화낼 거예요?”
“네…….”
슈리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애써 씩씩해 보이려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 사실 수도에 오기 전부터 공작 부인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어요.”
슈리가 술 한 모금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공작 부인께선 미인일 뿐 아니라 무척 똑똑하시고 마음씨까지 착하시다고 들었습니다. 황실 아카데미에서도 늘 수석이셨다면서요?”
“그렇긴 했지만……. 예, 뭐…….”
“거기다 백성들의 구휼과 고아들 문제에도 늘 힘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하지만 그건 황실의 일원으로 당연히-”
“존경합니다, 부인!”
슈리가 눈물 맺힌 갈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저도 부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텐데…….”
로제가 과자를 씹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풀 죽은 슈리가 힝 하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저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슈리, 당신다운 사람이 되세요.”
내가 슈리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렸다.
“텔리아 영애는 지금도 충분히 멋져요. 지금 영애는 뭐랄까, 그 우리 사이의 애매한……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알죠?”
헬리온을 사이에 둔 관계를 에둘러 말하자 슈리가 바로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애매한 관계 때문에 저와 스스로를 비교하다 보니 지금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인 거 같아요.”
“네…….”
“텔리아 영애 나이 땐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텔리아 영애가 제 나이가 되면 저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될지 누가 알아요? 그러니 자신을 믿고 자신다워지세요.”
“공작 부인…….”
헬리온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이 안쓰러워 위로해주었는데, 제대로 한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이쯤에서 애매하게 웃어넘기려 했는데, 갑자기 슈리가 와락 내 품에 안겼다.
“역시 수도에 오길 잘했어요! 공작 부인을 만나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그녀가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캑캑거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텔리아 경이 놀라 뛰어왔다.
“슈리, 놓고 말해! 공작 부인 놓고 말해!”
텔리아 경이 말리려고 했지만 오빠 정도는 한 손으로 가뿐히 제압하는 슈리였다.
“헬리온 대공을 잘 부탁드립니다, 부인.”
슈리가 마치 자식을 장가보내는 부모처럼 말했다.
“대공께서 말을 안 들으시면…… 저를 찾아오세요. 저흰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서로를 잘 알고 있거든요. 제가 부인께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무슨 도움인지는 모르겠다만 우선 알겠다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슈리는 그제야 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윈테라 공작 부인,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텔리아 경이 동생의 행동에 민망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동생이 참 귀엽네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파혼의 비극 속 예민하고 가련한 여인을 상상했던 내게, 슈리는 무척이나 신선하고 귀여운 사람이었다.
비록 나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나는 솔직하고 적극적인 사람들이 좋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 몰리와 로제, 투렌 남작 부인도 모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이었다.
슈리도 그런 성격의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텔리아 영애. 춤은 추셨습니까?”
“아뇨, 아직이요.”
내가 슈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저와 함께 한 곡 추시지요.”
슈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침 오케스트라가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추는 무곡이었다. 나는 슈리를 데리고 무대 가운데로 향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슈리도 나와 주변 사람들을 보며 조금씩 몸을 움직이더니 이내 활기차게 무대 위를 돌았다.
“뿌우- 뿌우-!”
술 취한 로제는 아예 오케스트라 연주자에게서 색소폰을 뺏어오더니 직접 불어 대기 시작했다. 나와 슈리가 로제의 형편없는 연주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헬리온, 그리고 일리드와 춤을 추었을 때와 달리 마음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정치니 후계니 하는 복잡한 생각은 모두 떨쳐버리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나 즐거웠다.
“공작 부인과 슈리가 친구가 되었다! 일동 축하의 박수!”
텔리아 경의 외침에 북부 가신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