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그대와 함께 춤을
건국제 행사는 성스러운 종소리가 세 번 울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제단 앞에 선 대신관이 여신께 제국의 무궁한 영광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이어서 황제께서 직접 귀족들 앞에 서서 기념문을 낭독하셨다. 건국제를 맞아 제국의 번영과 축복을 빌며, 새로 시작한 한 해를 무사히 보내자는 내용이었다.
황제의 인사가 끝나자 본격적인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제국 최고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곧 잔잔한 전주가 황궁 홀 안을 가득 채웠다.
대개 전주가 흐를 때, 귀족들은 처음 춤을 신청할 상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장미꽃을 들고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일리드와 헬리온. 그 두 사람이 내 앞에 섰다. 그리곤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게 꽃을 내밀었다.
“오오.”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상상해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두 남자의 꽃이 보이니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음…….”
나는 부채 끝으로 입을 가린 채 고민하는 듯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부채 깃털 장식 너머로 가족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보였다. 오빠 부부는 양손을 꼭 맞잡은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고모할머니는 세상 심각한 얼굴로 장미 꽃잎을 한 장씩 뜯어내고 계셨다.
알면서도 긴장되는지 로제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고, 실란다 백작은 돈이 든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폐하께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계셨지만, 내심 기대가 되는지 몸을 의자 끝에 걸치고 계셨다.
내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안달 난 귀족들의 탄성 소리가 다시금 터졌다.
“오오!”
오케스트라 연주자 몇 명은 날 보느라 엉뚱한 음을 짚기도 했다.
침을 꼴깍 삼켰다. 기대에 가득 찬 일리드의 얼굴과 애써 감정을 숨기려 하는 헬리온의 얼굴이 보였다.
“같이 추실까요, 헬리온 대공?”
내가 헬리온의 장미를 잡자 환호와 탄식이 동시에 들렸다.
올리버 실란다는 한숨을 푹 쉬며 형에게 돈주머니를 건넸고, 폐하께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남부 가신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반면 북부 가신들은-
“일동 대공 전하와 공작 부인을 향해 축하의 박수!”
또다시 우렁찬 군대식 박수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위협했다.
“다음 춤은 저와 함께해주시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패배를 받아들인 일리드가 담담한 얼굴로 말한 후 가신들 쪽으로 돌아갔다.
오케스트라의 전주가 끝나가고 있었다. 귀족들은 그제야 허둥지둥 파트너를 구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빼어난 미인인 투렌 남작 부인에겐 이미 나이에 관계없이 여러 귀족 남성들이 몰려있었다. 로제 앞에도 서너 명의 젊은 남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더 이상 볼 게 없는 릴체 후작 부인은 외투를 챙겨 홀연히 홀을 나섰다.
드디어 전주가 끝나고 왈츠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나는 멍한 표정의 헬리온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춤은 좀 늘었니?”
드레스 아래로 살짝 몸을 풀며 물었다.
“어릴 적에 춤 배울 때, 네가 맨날 내 발을 밟았잖아.”
나는 십여 년 전의 꼬마 헬리온을 떠올렸다. 추억과 달리,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헬리온이 성큼 내게 다가왔다.
“네 눈엔 내가 아직도 여섯 살로 보이는가 본데-”
그리곤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나도 먹을 만큼 먹었어.”
“고작 열아홉이잖아.”
“열아홉이면 성인이거든? 그리고 얼마 전에 생일 지나서 이제 스무 살이야.”
“어머, 꼬마 황손님. 설마 제가 어린아이 취급했다고 화나신 건 아니죠?”
어린 시절, 헬리온이 심술을 부릴 때마다 하녀들이 했던 말을 따라 해 보았다.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입을 삐죽이는 걸 보니 헬리온도 그때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왈츠에 따라 헬리온이 내 허리와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이곳 홀에서 나와 프리모스, 그리고 헬리온이 춤을 배웠었다. 파트너가 없는 헬리온을 위해, 나는 프리모스에 이어 그 애와도 함께 피아노 선율에 맞춰 춤을 추곤 했다.
헬리온은 세 걸음에 한 번꼴로 내 발을 밟았고 짜증이 난 나는 홧김에 그를 확 밀쳐버렸다. 그러면 또 싸움이 시작되었고 프리모스의 중재로 겨우 화해하곤 했다.
“잘하네.”
이제 발을 밟지 않는 것은 물론, 헬리온은 능숙한 솜씨로 나를 리드했다. 내심 감탄한 내가 발끝에서 시선을 떼고 헬리온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왜 나를 선택한 거야?”
“무슨 그런 질문이 있어. 너랑 추고 싶으니까 그런 거지.”
음악이 한껏 고조되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선 남성 귀족들이 파트너의 허리를 잡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헬리온의 푸른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를 제외한 세상이 핑그르르 도는 기분이었다.
“정말 나랑 추고 싶었던 거야?”
“그럼.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옛날 생각도 나고 아주 즐거운걸? 그러는 너는 어때? 나 말고 춤추고 싶었던 사람이 따로 있었던 건 아냐?”
“아냐, 그런 거!”
헬리온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럼 서로 마음이 맞았나 보네. 잘 부탁해요, 첫 번째 파트너.”
그 말에 헬리온이 살짝 피하고 있던 시선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두었다. 그의 푸른 두 눈동자에 살짝 기쁜 기색이 내비쳤다.
오늘만큼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즐거워야 하는 날이다. 괜히 복잡한 정치 이야기를 꺼내 헬리온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헬리온과 함께 첫 춤을 추는 것도, 지금 입고 있는 파란색 드레스도 사실 모두 계획된 것이었다.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곳도 정치의 무대로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이 공작 부인의 삶이었다.
내가 헬리온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은 처음 춤을 시작할 때보다 한결 밝아져 있었다. 그가 내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난 네가 일리드 형이랑 먼저 출 줄 알았어.”
“왜?”
“글쎄…….”
헬리온이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뭔가 느낌이…….”
오직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를 수 있다면, 그의 말대로 나는 일리드와 첫 춤을 추었을지도 모른다.
헬리온과 춤을 추면 즐겁지만, 일리드와 춤을 추면 설렐 것이다.
헬리온은 내게 형제 같은 사람이지만, 일리드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헬리온과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고 싶지만, 일리드와는 아무도 모르는 미래를 그려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 둘은 나에게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윽고 연주가 슬슬 마무리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춤을 멈추고 서로의 파트너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헬리온이 허리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나도 살짝 무릎을 굽혀 그에게 인사했다.
“이슈텔.”
막 뒤를 돌아설려는 찰나, 헬리온이 나를 불렀다. 그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옴짝달싹했다.
“오늘 굉장히…… 예…….”
“……?”
“예…… 그러니까, 예…….”
“예, 뭐?”
“예전처럼 춤 잘 춘다고!”
헬리온이 다짜고짜 버럭 화를 냈다. 그러더니 재빨리 몸을 돌려 북부 가신들을 향해 도망치듯 달려갔다.
“뭐야…….”
춤을 잘 추는 게 화날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 자기보다 잘 추니까 괜히 심술이 났나 싶었다.
‘역시 이상해. 정상은 아니야.’
얼굴이 새빨개진 헬리온이 덩치 좋은 북부 가신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주군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텔리아 경이 술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으며 뒷목을 잡았다.
텔리아 경이 헬리온을 향해 뭐라 뭐라 잔소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나 내심 궁금했지만 거리가 먼 탓에 들리지는 않았다.
“북부 가신들도 참 힘들겠어. 철부지 대공님을 보필하려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리드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내가 다가가자 일리드가 얼른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며 물 한 잔을 건넸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괜찮습니다. 공작 부인과 헬리온의 춤을 보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습니다.”
그 말에 하마터면 물을 뿜을 뻔했다. 내가 캑캑거리자 일리드가 재빨리 손수건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대공.”
“뭐가 말씀이십니까?”
“제가 대공을 첫 번째로 선택하지 않은 걸 비꼬신 거 아닙니까?”
“아뇨, 비꼬다니요? 정말 전 공작 부인의 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일리드가 오해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공작 부인의 드레스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드레스가 예쁘다는 게 아니라 드레스를 입은 그대가요.”
말이 헛나온 일리드가 다시금 손을 내저었다. 투렌 남작 부인의 조언이 맞았다. 확실히 일리드는 이 드레스를 좋아했다.
“그럼 이제부터 이 아름다운 드레스와 함께 춤을 춰 보실까요, 대공?”
내가 일리드의 손을 잡고 무대로 그를 이끌었다.
“참, 그만 놀리세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일리드가 민망한 듯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곧 오케스트라가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왈츠곡보다 좀 더 느리고 무거운 느낌의 곡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일리드의 목과 어깨를 감쌌다. 일리드도 천천히 내 허리와 어깨에 손을 뻗었다.
느린 선율에 맞춰 걸음 역시 조용하고 더디게 움직여졌다. 경쾌하진 않지만 서로를 느끼기엔 분명 좋은 분위기의 곡이었다.
나는 일리드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늘 아름다운 눈동자이지만 첼로 선율을 들으며 바라보고 있으니 더욱 가슴이 떨렸다.
“서운하셨습니까?”
내 물음에 일리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그리곤 음악에 맞춰 내 허리를 잡은 손을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몇 번을 돌고 돌아오셔도 좋습니다. 결국 내게만 와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