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대공의 약혼녀
“로제. 이슈텔이 어느 한 대공을 선택해서 춤을 추면 다른 대공의 기분이 어떻겠니?”
“당연히 화가 나겠죠! 창피하기도 하고요!”
로제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지. 근데 한 번 상상해보렴. 로제, 네가 화가 난 상태인데 너무나 잘생긴 남자가 네 취향인 옷을 입고 눈앞을 왔다 갔다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니?”
“음…… 화는 나는데 자꾸 그쪽으로 눈길이 가고…… 계속 그 사람을 보게 되고, 웃음이 나고…….”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로제가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화가 좀 풀릴 거 같은데요?”
“바로 그거야.”
투렌 남작 부인이 기특하다며 로제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슈텔, 남자들은 은근히 단순하단다. 처음엔 거절당해서 부끄럽더라도, 한 번 눈길을 빼앗긴 이상 절대 시선을 떼지 못해. 그러니 내가 말한 대로만 하면 누구를 먼저 선택하든 그다음 사람까지 애간장을 태울 수 있을 거야.”
“와…… 부인,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로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기립 박수를 쳤다.
역시 사교계의 꽃 투렌 남작 부인다웠다. 하나가 아니라 둘을 내다보는 그녀의 설계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슈텔 들었니?”
불현듯 중요한 것이 떠오른 듯 투렌 남작 부인이 양손을 짝하고 마주쳤다.
“이번 무도회에 슈리 텔리아가 온다고 하더구나.”
슈리 텔리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나는 중앙의 귀족 가문과 그들의 가계도에 대해선 웬만하면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슈리라는 이름과 텔리아라는 성은 처음 들어보았다.
“아,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이번에 북부 대공령에서 보낸 가신 집안 중 하나라죠?”
그러고 보니 대공들을 따라 수도로 온 지방 귀족들이 있었다. 이번 건국제에 대공가의 가신들도 모두 초대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드레스를 쳐다보고 있는데, 투렌 남작 부인의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빤히 보았다.
“어머, 이슈텔은 슈리 텔리아에게 관심이 없나 보네? 아니, 헬리온 대공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하나?”
“왜 그런 얼굴로 보세요? 슈리 텔리아가 누군데요?”
“아, 공작 부인께선 아직 모르시는구나! 하긴 아직 귀족들 사이에서도 알고 있는 이가 극히 적답니다. 저와 남작 부인처럼 소식이 빠른 사람들을 제외하면요.”
로제가 거만한 얼굴로 한껏 눈썹을 치켜떴다. 별로 궁금하진 않은데 그녀의 표정을 보니 예의상 질문을 해줘야겠다 싶었다.
“슈리 텔리아가 누군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헬리온 대공의 약혼녀요!”
황태자 프리모스의 죽음은 우리뿐 아니라 두 사촌의 결혼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황태자가 죽은 후, 폐하께선 나를 차기 황태자의 반려로 공표하셨다. 그 말인즉, 황태자 후보인 일리드와 헬리온 모두 법적 미혼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두 대공 모두 약혼녀가 있었지만 얼마 못 가 파혼했다.
삼 년 전, 황태자가 사망했을 당시 헬리온은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아 비교적 쉽게 파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리드는 아니었다. 당시 그는 이미 성인이었고 나와 프리모스의 뒤를 이어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리드 역시 황태자 후보가 되는 순간 파혼을 해야 했다.
나는 일리드와 헬리온의 약혼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둘 다 중앙이 아닌 남부와 북부의 귀족이라는 것만 얼핏 들었을 뿐이다.
“슈리 텔리아는 북부 대공령의 장군 집안 출신이랍니다. 아버지는 대장군, 어머니는 전술가로 북부에서 손꼽히는 명문가라고 들었어요. 게다가 위로 오빠만 셋 있는 집에 고명딸로 태어나서 무척 사랑받고 자랐다 합니다.”
로제가 자신이 가진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헬리온 대공과는 열세 살 때부터 혼담이 오갔는데 황태자께서 사망하신 후에 바로 파혼했답니다. 그래도 대공가와 여전히 사이는 좋은지 헬리온 대공께서 수도로 내려오실 때, 그 집안 차남이 가신으로 따라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텔리아 영애도 수도로 내려왔나 봐. 헬리온 대공을 따라오진 않았는데 건국제에 참석하는 걸 보면.”
투렌 남작 부인이 로제의 말에 자신이 들은 정보를 덧붙였다.
“오빠가 수도에 있을 때 중앙 사교계에 데뷔시키려는 게 아닐까 싶어. 헬리온 대공이 황태자가 되지 않는다면 다시 텔리아 영애와 혼인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쪽도 다른 남편감을 찾아봐야 할 테니까.”
하긴, 맞는 말이었다.
파혼한 약혼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망부석처럼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을 노릇일 테니.
“어떻게 보면 나중에 제 사촌 동서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군요.”
“그쪽 입장에선 그렇게 되길 바라야겠지요. 안 그러면 애먼 약혼자만 뺏긴 꼴이 되잖아요.”
로제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텔리아 영애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성격에 대해선 들은 바 있어? 북쪽 사람들처럼 무뚝뚝하다거나 아니면 말수가 적다든가 하는 뭐 그런 거.”
“음, 성격은 모르겠고 재밌는 특징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뭔데 그게?”
“헬리온 대공이 무서워하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 슈리 텔리아라고 하더라고요!”
헬리온이 무서워하는 사람이 다 있다고? 오늘 들은 그 어떤 이야기보다 흥미 돋는 대목이었다. 나는 로제에게 더 말해보라 재촉했다.
“성격이 개판이라니?”
“아뇨, 그게 아니라 슈리 텔리아가 헬리온 대공한테 푹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거의 미쳤었다던데요?”
로제가 관자놀이 근처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렸다.
“열세 살 때부터 대공한테 첫눈에 반해 죽자 살자 따라다녔대요. 두 사람이 약혼하게 된 계기도 슈리 텔리아가 부모님한테 대공과 결혼시켜달라고 졸라서 된 거라던데요? 물론 그 집안도 명문가이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겠지만요.”
“와…….”
“아카데미를 가든 수련장을 가든, 가는 곳마다 대공을 따라다니고, 만날 때마다 엄청난 선물 공세를 펼쳤다고 합니다. 거기다 볼 때마다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니 대공 입장에선 좀 무서울 만도 했겠지요.”
“어머 어떡해. 연애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닌데…….”
연애 고수 투렌 남작 부인이 안타깝다며 중얼거렸다.
“여하튼 그러다 보니 파혼하고 나서 충격이 엄청나게 컸나 봐요. 석 달간 방에서 두문불출하면서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해서 그 집 오빠들이 마음고생 좀 했다고 합니다.”
“날 싫어하겠구나…….”
로제의 말대로 남의 약혼자를 빼앗은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했다. 나라고 이렇게 되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럼 일리드 대공의 약혼녀는?”
문득 일리드 쪽은 잠잠하다 싶어 물었다.
“일리드 대공의 약혼녀도 건국제에 와?”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건데 로제와 투렌 남작 부인이 나를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정말 몰라서 묻냐는 표정들이었다.
“왜요? 그 사람은 한 반년 칩거했답니까?”
분위기상 슈리 텔리아보다 더한 사람인 것 같아 아무렇게나 말했다. 그러자 로제가 투렌 남작 부인을 보며 눈짓했다. 무언가 떠넘기는 듯한 눈치였다.
“그 사람은 이 년 전에 죽었어.”
“예?”
투렌 남작 부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작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니 어쩌다가요? 일리드 대공의 약혼녀면 저와 비슷한 또래일 텐데.”
“파혼하고 반년 뒤에 병으로 죽었다고 들었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황족과 결혼할 사람이 반년 만에 죽을 수가 있어요?”
테브론 제국의 황실은 황족의 배우자를 매우 까다롭게 뽑았다. 가문과 출신은 물론, 배우자 본인의 학식과 덕망도 꼼꼼하게 따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건강이었다. 제아무리 명문가 출신의 뛰어난 인재라 하더라도 건강이 좋지 않으면 황족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대공비가 될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고……?
“그래서 한동안 소문이 무성했어요. 정말 병으로 죽은 거다 아니다 말이 많았죠. 타살이니 자살이니 하는 의혹도 있었고요.”
슈리 텔리아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달리 로제의 표정은 제법 심각했다.
“심지어 죽은 약혼녀가 일리드 대공을 너무 사랑해서 자살했다는 말도 있었어요.”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죠.”
로제가 여전히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작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일리드 대공께서 워낙 수려하시지 않습니까. 성격도 흠잡을 데 없이 좋으시고요. 그런 약혼자와 결혼을 얼마 앞둔 상태에서 파혼당하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죠.”
일리드의 약혼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건만 로제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죽음에 내가 어느 정도 관여되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동시에 프리모스의 무덤 앞에서 일리드를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에게도 나와 같은 아픔이 있을 줄 몰랐다.
약혼자를 잃은 아픔은 긴 시간이 지나도 쉽게 낫지 않는 상처였다. 만약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더욱. 마음 한구석이 날카로운 펜촉에 찔린 것처럼 아파왔다.
“아무튼 이슈텔, 드레스는 두고 갈게.”
내 표정이 좀처럼 밝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투렌 남작 부인은 자리를 피하고 싶은 눈치였다.
“내일까지 고민해보렴.”
“아니에요. 지금 결정할게요.”
나는 일리드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드레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푸른색 드레스로 하겠습니다.”
“오, 헬리온 대공을 선택하실 거예요?”
로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온을 선택하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북부 대공가와 리젠트라 공작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제국 전체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그런 인식을 허물어뜨리고 싶었다.
비록 할아버지와는 원수지간이었지만, 알렌시아 황녀는 할아버지의 일로 나까지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나를 볼 때마다 너 같은 딸이 있으면 좋겠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고, 나와 헬리온이 싸울 때도 내가 옳다며 아들을 혼낸 적도 많았다.
내가 헬리온과 먼저 춤을 췄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우리 가문에 대한 분노가 조금은 누그러질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동안 뜸했던 북부와의 교류도 다시 활발해질 것이다.
붉은 드레스를 챙겨 나가는 하녀들을 보고 있자니 못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드레스 한 벌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 하나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