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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13화 (13/160)

13화 : 푸른색과 붉은색

늦은 밤, 황궁 사용인들은 하나둘 하루 일과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그러나 카리나의 업무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정성껏 달여 낸 약초차를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잔에 옮겨 담았다.

조심스레 잔을 들고 향한 곳은 황제의 침소였다. 황제전의 하녀장 소피가 황제께 고했다.

“폐하, 차를 들이겠습니다.”

곧 무거운 문이 열리고 카리나가 황제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몸을 기대고 누운 황제는 몹시 지친 얼굴이었다.

“폐하, 오늘은 피로 회복에 좋은 약초와 체온을 높여 주는 약초를 함께 달였습니다. 요즘 밤낮으로 날씨가 변덕을 부려 기침이 부쩍 잦아지셨는데 내일이면 전부 괜찮아지실 겁니다.”

설명을 마친 카리나가 황제의 손에 찻잔을 쥐여 주었다. 황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차가 무척 쓰구나.”

“평소보다 약초의 뿌리 부분을 많이 갈아 넣었습니다. 아무리 써도 궁의들이 제조하는 약보다는 견딜만하실 겁니다. 조금만 참아 주시지요.”

카리나가 황제를 향해 고운 미소를 지었다. 황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차를 홀짝였다.

그러나 너무 쓴 탓에 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 바람에 카리나가 황제의 곁에 머무는 시간도 덩달아 길어졌다.

“저, 폐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카리나가 차를 홀짝이는 황제를 바라보며 주섬주섬 앞치마를 뒤적였다.

“제가 동화책 하나 읽어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의 손엔 작은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난데없는 동화책의 등장에 황제가 눈을 끔뻑였다.

“동화책을? 내게 말이냐?”

“예, 폐하. 예전에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는데, 그 댁 아이들이 쓴 약을 먹기 싫어할 때마다 책을 읽어주곤 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약을 다 마셔버리지 뭡니까?”

그 말에 황제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어디 한 번 읽어 보아라.”

카리나가 작은 의자를 들고 와 황제의 곁에 가까이 앉았다. 그녀는 책을 한 장씩 넘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동화를 읽어 내려갔다.

아빠 곰이 나오는 부분에선 낮은 울음소리로, 엄마 곰이 나올 때는 우아한 목소리로, 그리고 아기 곰이 나올 때는 정말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낭랑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마치 연극배우 같은 카리나의 연기에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동화 속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갈 즈음, 카리나가 의도한 대로 찻잔은 바닥을 보였다.

“거참 재미있는 능력이구나.”

황제가 손에 쥔 빈 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 따로 낭독 수업 같은 걸 받은 적 있느냐?”

카리나가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대답하자 황제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평민인 네가 귀족의 억양을 내는 것이냐?”

비록 어린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이었지만, 글을 낭독할 때 카리나가 낸 발음과 억양은 몹시도 귀족적이었다. 그것도 그냥 귀족이 아닌, 황궁에 출입하는 중앙 귀족의 억양이었다.

지방 귀족들은 물론, 제아무리 수도에 사는 귀족이라도 황궁과의 접점이 없으면 내기 힘든 발음이었다.

“제 언니가 가르쳐 준 억양입니다, 폐하.”

“언니가?”

“예, 폐하. 언니가 과거에 고위 귀족과 가까이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배운 억양을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언니가 제법 영리한 사람인가 보구나. 네 언니도 황궁에서 일하느냐?”

“아닙니다, 폐하.”

카리나가 황제에게 건네받은 잔을 손끝이 하얘지도록 세게 쥐었다.

“언니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런…….”

황제가 안됐다며 낮게 혀를 찼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나이 차가 좀 난다고 하더라도 아직 젊을 터인데 어쩌다가…….”

“그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오늘 밤 안에 다 들려드리지 못할 듯합니다.”

카리나의 아름다운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저와 폐하가 함께 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을 테니 천천히 모두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슈텔은 이 하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황제는 그녀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녀에겐 다른 하녀들에게선 볼 수 없는 영민함과 섬세함이 있었다. 게다가 보통의 사용인들이 황제를 무서워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을 겁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황제를 만나는 것을 기대하는 듯했고, 태도 역시 무척이나 적극적이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하녀였다.

“폐하.”

슬슬 자리를 떠날 준비를 하던 카리나가 황제를 불렀다.

“혹시 마구간에서 제게 바라는 것이 있냐고 물으셨던 걸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그때 저 하녀는 당황하여 자신의 소원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이제야 소원이 생긴 것인가? 황제가 어서 말해보라며 카리나에게 눈짓했다.

“얼마 후에 황궁에서 무도회가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카리나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 * *

카리나를 차 시중 하녀로 들인 이후, 폐하의 안색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폐하를 가까이에서 챙기는 하인들은 물론, 어전 회의에 참석하는 귀족들도 황제의 변화를 알아볼 정도였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간간이 황제전의 하녀장 소피에게 카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곤 했다. 최근 카리나는 폐하께 아침 신문 읽어주는 일을 하나 더 맡게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소피는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원래 폐하께선 새로운 사용인이 오면 관심을 보이다, 다른 사람이 오면 그 사람에게로 관심을 옮기신다고 하며.

사실 나 역시 카리나에 대해 더 이상 신경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조금 있으면 황실의 주도하에 건국 기념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

건국제는 예부터 황족들은 물론 중앙의 모든 귀족들이 참여하는 행사였다.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고 사교계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이니만큼 특히 신경을 써야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두 분 대공 전하께서 처음으로 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이니 더욱 특별하게 준비해야지.”

투렌 남작 부인이 우아하게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화려한 드레스를 가지고 내 앞에 쪼르르 섰다.

“자, 첫 번째 드레스는 롤랑드 지방에서 난 직물로 만든 드레스입니다. 은은한 푸른색이 감도는 옷으로 윈테라 공작 부인의 금빛 머리카락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드레스입니다!”

자작가 출신의 시녀 로제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내 눈앞에 들이댔다.

“부인의 아름다운 은회색 눈이 푸른색과 어우러지면 더욱 이지적인 분위기를 뿜어내죠! 촉감은 또 얼마나 좋은지! 개인적으로 전 이 드레스가 무척 마음에 들어요.”

“아니면 사람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이 붉은 드레스도 좋지.”

이번엔 투렌 남작 부인이 두 번째 하녀가 들고 있는 드레스를 가리켰다.

“이번 무도회에선 이슈텔 네가 주인공이야. 황궁에 모인 모든 귀족들이 다 너만 바라보고 있을걸?”

“맞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어느 대공 전하와 첫 춤을 추실지 다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라니까요.”

“그럴 땐 역시?”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야죠!”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합이 잘 맞는 로제와 투렌 남작 부인이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마치 나와 드레스를 결혼시키려는 뚜쟁이처럼 열정적으로 드레스를 소개했다. 결국 두 사람의 열정에 지쳐버린 내가 항복을 선언했다.

“전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두 분이 보시기에 가장 어울릴 것 같은 드레스로 골라주세요.”

“어라? 공작 부인, 아무거나라니요? 지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 소극적인 반응에 로제가 씩씩거리며 양손을 허리춤에 올렸다.

“아름다운 드레스는 희망하는 파트너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드레스를 고르지 않는다는 건, 무기를 고르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요!”

투렌 남작 부인이 동의한다며 작게 박수를 쳤다.

“이슈텔, 네가 선호하는 드레스가 없으면 상대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드레스라도 알아야 한단다. 그러니까 말해보렴.”

“어느 대공 전하와 먼저 춤을 추실 건가요?”

남작 부인과 로제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쉴 새 없이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부담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어요.”

내가 절망스럽게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얼마 전, 카리나의 처분을 두고 일리드와 헬리온이 대치했던 상황이 떠올랐다. 그때야 보는 눈도 없었고, 어떻게든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정확히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다. 애매하게 넘어갈 수도, 그렇다고 셋이서 손을 잡고 춤을 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발가락이라도 부러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건국제 때 춤을 출 필요도 없겠죠.”

“할까요?”

행동력 좋은 로제가 방 안에 진열된 묵직한 조각상을 가리켰다. 투렌 남작 부인이 기겁을 하며 로제를 말렸다.

“귀족들 성깔을 모르니? 그 사람들은 휠체어라도 타고 춤추라고 할 족속들이야.”

“하긴요…….”

로제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찌 됐든 이슈텔. 일리드 대공은 푸른색 드레스를 선호할 거고 헬리온 대공은 붉은색 드레스를 선호할 거야. 그러니 이 두 드레스 중에서 고르는 게 좋을 듯싶어.”

투렌 남작 부인의 말에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푸른색은 남부 대공령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차분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일리드는 은은한 색감의 푸른 드레스를 좋아할 것 같았다.

반면 헬리온이 자란 북부의 상징은 붉은색이었다. 더욱이 헬리온은 흔치 않은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개인적 선호가 어떻든 간에 붉은색은 북부와 헬리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일리드 대공과 춤을 추려거든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헬리온 대공과 춤을 추려거든 푸른색 드레스를 입으렴.”

“엥, 왜요? 반대로 입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을 그대로 로제가 했다. 그러자 투렌 남작 부인이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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