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죽은 사람처럼 살아라
“복수…… 라고요?”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일리드가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논리적으로 볼 때, 그 하인의 출신은 공작 부인께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쪽이 숨겨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죠.”
“그렇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 부인께서 신경이 쓰인다는 건, 어쩌면 그자가 부인께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일 겁니다.”
일리드의 말처럼, 나 역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선대의 일을 복수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건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녀는 복수는커녕 하루하루 살아가기조차 막막할 만큼 비참한 상황이었다. 반면 나는 언제든지 그녀를 처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의심과 동정 사이에서 나는 후자를 택했다. 나는 그래도 될 만큼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하더라도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폐하의 하녀가 되든 하녀장이 되든, 아니 설령 그보다 더한 무언가가 된다 하더라도, 그녀는 내 적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봐온 카리나는 영리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궂은 마구간 일을 시켰음에도 힘든 내색 한번 없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여인의 몸으로 험한 마구간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러니 그녀에게 조금만 더 동정을 베풀어도 될 것이다. 그것이 황제 폐하를 위하는 일이라면 더욱이 그래야 할 일이었다.
“사람의 상상은 지나치게 현실을 앞서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하인이 복수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일리드가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저와 공작 부인도 너무 많은 수를 앞서가려고 하다가, 눈앞의 한 수를 놓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공작 부인, 폐하를 믿으십니까?”
“네.”
그의 질문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폐하를 믿고 하인을 붙이셔도 될 것 같습니다. 폐하의 신뢰는 가장 큰 힘이니까요.”
폐하의 신뢰. 일리드의 그 말 한 마디에 온종일 나를 괴롭혔던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일리드 대공. 대공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합니다.”
그제야 심각했던 표정을 풀고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나를 따라 덩달아 어두워져 있던 일리드의 표정도 조금은 밝아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인.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황족으로서 이런 말 하기 뭐 하지만…….”
일리드가 내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테브론 제국에서 리젠트라 가문에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황실조차도요.”
살짝 내리감은 그의 푸른 눈동자가 괜찮다며 나를 달래주고 있었다. 따뜻하게 미소 짓고 있는 입술도, 차분한 목소리도. 전부 지친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자 일리드가 부드럽게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고맙습니다.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제게 해주어서.”
이제 나와 일리드는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이러다 그가 알아차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 함께하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설레고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허리에 올렸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행복했다.
프리모스가 죽은 이후 처음이었다.
* * *
“온다… 안 온다… 온다… 안 온다… 온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약초잎 위로 마지막 잎새가 떨어졌다. 원하는 점괘를 얻었건만, 카리나의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하기만 했다.
“이상하다…… 지금쯤이면 소식이 올 만도 한데…….”
황제가 마구간에 다녀간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약초학과 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에 기대를 했건만, 여태까지 본궁에선 감감무소식이었다.
“가슴이 답답하네. 몸은 몸대로 편치 않고. 이 마구간 일은 어째 하루하루가 이렇게 고된 걸까. 이쯤 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길고 긴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해온 카리나였다. 그런 그녀에게도 마구간 일은 좀처럼 몸에 배지가 않았다.
그나마 순한 말들의 예쁜 눈을 볼 때면 피로가 싹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 그 힘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카리나가 약초 한 닢을 입술에 물고는 짚 더미 위에 기댄 채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카리나, 여기서 뭐 해?”
웬 남자의 목소리에 카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마구간 하인 중 하나인 로저였다.
“아, 로저 씨 안녕하세요.”
카리나가 밝게 인사를 건넸다. 로저는 카리나의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날씨 좋은데 뒷산이나 놀러 갈래?”
“아니요, 하하. 제가 요새 좀 바빠서…….”
카리나가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며 로저의 팔을 살짝 걷어냈다. 그러나 로저는 한술 더 떠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까지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나랑 결혼하자는 말 생각해 봤어? 너 어디 가서 나만 한 남자 못 만난다니까?”
“아하하…… 하하…….”
결혼 이야기에 카리나가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순진하고 어리숙한 하녀의 모습이었다.
저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얼굴일 때 얼른 낚아채서 결혼해야 하는데. 로저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카리나에게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카리나, 아무리 폐하께 약초를 갖다 바친다 한들 네 인생이 뭐 크게 달라질 것 같아? 어차피 하녀 인생은 하녀로 막 내리는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일에 힘 쏟지 말고 나랑 결혼이나 하자고.”
이번에도 카리나는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고된 마구간 생활 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바로 로저의 희롱이었다. 그러나 말단 하녀인 카리나에겐 그의 희롱에 맞설 힘이 없었다.
계속되는 로저의 치근덕거림에 지쳐갈 즈음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리 위에서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카리나라는 하녀냐?”
몸을 돌리자 더러운 마구간 하인들과 달리 정갈한 차림의 중년 남성이 보였다. 황실 사용인 중에서도 꽤 높은 사람인 듯 보였다.
“아, 네네. 제가 카리나입니다.”
놀란 카리나가 허둥지둥 자세를 고쳐 잡고 공손히 인사했다.
“나는 데릭 집사장이다.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나오거라.”
집사장이 카리나를 향해 명령했다.
“윈테라 공작 부인의 명에 따라 오늘부터 네 소속을 마구간에서 본궁으로 옮길 것이다.”
됐다! 감격한 카리나가 두 손을 마주 잡고 환하게 웃었다. 반면 로저는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구시렁댔다.
“집사장 님. 제가 어디 소속으로 배정되는지 혹 아십니까?”
“황제 폐하의 차 시중 하녀로 배정될 것이다. 폐하께서 네게 특별히 신경 써 주신 듯하니 감사한 마음 잊지 말고 앞으로도 잘하거라.”
그 말에 카리나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카리나와의 핑크빛 미래를 꿈꾸던 로저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황제전으로 배정되면 앞으로 그녀를 마주치게 될 일도 없을 터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적극적으로 결혼하자고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로저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로저 씨.”
카리나가 예쁜 얼굴에 천진한 미소를 띄우며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짐 챙기는 것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자 로저는 또 금세 헤벌쭉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마구간 안쪽의 좁은 방으로 향했다. 카리나의 방엔 짐이라고 할 것도 얼마 없었다. 낡은 옷가지와 헤진 모자, 닳은 구두 한 켤레가 전부였다.
“너도 참 너다. 가진 거라곤 이런 낡아빠진 옷밖에 없으면서 그동안에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놈들을 전부 마다한 거야?”
로저가 옆에 있던 커다란 가방에 옷을 아무렇게나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가방 안에 다 넣었어. 이것들만 챙기면 되는 거야?”
로저가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카리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짝-!
좁은 방 안에 날카로운 마찰음이 퍼졌다.
놀란 로저가 빨갛게 부어오른 자신의 뺨을 잡곤 믿을 수 없단 듯 중얼거렸다.
“카, 카리나……?”
그의 앞에 서 있는 카리나는 더 이상 순진한 하녀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는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와 경멸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이 천한 종놈 따위가…….”
돌변한 카리나의 모습에 로저의 온몸이 굳어버렸다.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있었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 더러운 입에 함부로 내 이름을 올리고 역겨운 손으로 날 만져?!”
카리나는 그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순간 돌변한 그녀의 모습에 겁에 질린 로저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뭐 결혼? 다시 한번 말해봐. 결혼이라고? 내가 너 따위 천한 놈들과 결혼이나 하려고 이 궁에 들어온 줄 아느냐? 같잖은 것들이 되도 않는 짓거리를 할 때마다 혀를 뽑고 손목을 잘라내고 싶은 걸 내가 겨우 참아준 것이다!”
분에 찬 카리나가 남자를 향해 다시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로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의 뺨은 멀쩡했다.
“죽은 사람처럼 살아라.”
로저가 실눈을 떠 카리나의 표정을 살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카리나의 얼굴엔 우아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내가 널 기억조차 하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