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9화 (9/160)

9화 : 유년의 기억

카리나에 대한 처분권이 내게 있는 건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일리드와 헬리온 중 누구의 편을 들어도 다른 한쪽은 몹시 모욕적이라 생각할 터였다.

두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헬리온 대공의 말이 모두 맞습니다.”

고민 끝에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대공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결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황궁에서 말을 가장 잘 다루는 수석 마부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폐하의 말과 친하다 한들 하녀의 말을 믿는 건 모험이지요. 이 하녀가 폐하의 말을 진정시켰던 건 운이 좋았던 것뿐입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헬리온이 거 보란 듯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일리드의 눈썹은 묘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이번에 나는 좀 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언제나 규율을 따르는 것도, 그렇다고 섣불리 모험을 택하는 것도 현명하진 않습니다. 가장 좋은 건 상황에 따라 적절한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

“헬리온 대공께선 말에게 총을 겨누셨지만 결국 쏘지 않으셨죠. 말씀으론 규율을 따르셨지만 결국 본능은 모험을 선택한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 아시다시피…….”

나는 일부러 더 밝게 웃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께선 무사하시고 아끼시는 말 또한 진정되었죠. 폐하께서 깨어나셨을 때, 사랑하는 말이 사사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척 상심이 크셨을 겁니다.”

나는 일리드와 헬리온의 곁을 지나 카리나가 갇혀있는 감옥으로 다가갔다. 쇠문 고리를 잡아당기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감옥 문이 열렸다.

“헬리온 대공께선 현명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가여운 하녀에게 선처를 베푸는 것으로 이번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됩니다.”

말로는 헬리온을 치켜세우면서 결론적으론 일리드의 손을 들어준 셈이었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카리나를 빼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윈테라 공작 부인께 감사해라.”

헬리온이 감옥 문을 열고 나오는 카리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까지 해가며 널 구하고 계시니.”

이런. 나름 티 안 나게 한다고 했건만 헬리온은 이미 내 의도를 눈치챈 듯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나와 일리드를 뒤로한 채 차갑게 돌아서서는 지하 감옥을 나섰다.

“현명한 선택을 한 쪽은 헬리온이 아니라 공작 부인인 듯합니다.”

일리드가 헬리온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재밌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려운 문제였을 텐데 용케 최선의 방법으로 빠져나가셨습니다.”

“즐거우십니까?”

내가 잔뜩 화난 얼굴로 일리드를 째려보았다.

“남부의 겁쟁이와 용감한 북부의 사내 중 누가 옳은지 선택해달라고요? 어쩜 그렇게 자극적인 비유까지 써가며 제게 판단을 떠넘기셨습니까?”

“저도 모험을 한 번 해 본 것입니다. 저와 헬리온이 대립할 때, 공작 부인께선 어떤 방식으로 누구의 손을 들어주실지 궁금해서요.”

하, 이 사람이 지금 날 떠본 거야? 그의 대답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실란다 백작의 말이 맞았다. 일리드는 무척이나 영리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이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다음번엔 그러지 못하실 겁니다. 그때는…….”

“그때는 뭐요?”

톡 쏘아붙이는 내 말투에도 일리드는 늘 그랬듯 상냥하게 웃음 지었다.

“반드시 어느 한쪽을 선택하셔야 할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일리드는 돌계단을 올라 지하 감옥을 나갔다.

이제 어두운 감옥에는 나와 카리나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저를 보호해주시느라 곤란한 상황을 겪으셔서…….”

카리나의 목소리엔 여전히 물기가 잔뜩 맺혀있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헬리온 대공께 저를 쏘지 말라고 소리쳐주신 것도, 절 믿고 폐하께 약초를 드리게 한 것도 전부 다요.”

“착각하고 있구나. 네가 아니라 다른 누구였어도 난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나는 일부러 더 쌀쌀맞게 대꾸했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헬리온이 카리나를 겨눈 순간, 내 머릿속엔 그녀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내게 구두 안에 든 모래처럼 거슬리고 껄끄러운 존재였다. 오히려 완전히 지워내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건…… 아마 마음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동정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돌 책상 위에 놓인 갖가지 약초들과 금화를 가리켰다.

“정말 황궁 뜰에서 약초를 캐다 팔았느냐?”

“예…….”

“왜? 황실에서 주는 주급이 모자라서?”

“아닙니다. 그건 아닌데…….”

카리나가 얼굴이 빨개진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추궁했다. 결국 카리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돈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공작 부인께 목걸이를 되사려고…….”

아, 가문의 목걸이.

사실 난 그 목걸이가 내게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에겐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물건이겠지만.

“이번엔 운이 좋게 넘어갔지만 다음엔 그러지 못할 것이야. 약초 캐는 건 그만두어라.”

“네, 알겠습니다.”

“그만 돌아가 쉬어라.”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감옥을 나서기 위해 돌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공작 부인!”

그때, 카리나가 나를 불렀다. 그리더니 약초 한 줌을 쥐고 와서는 내게 내밀었다.

“이 약초를 황제 폐하께 달여 드리십시오. 지친 몸을 깊게 잠들게 하는 약초입니다.”

* * *

궁의에게 약초가 문제없다는 걸 확인한 후 차를 내렸다.

다행히 폐하께선 차를 마신 후 깊은 잠에 빠지셨다. 평소 불면증이 심한 분이셨다. 그런 폐하께서 이렇게 편안하게 잠드신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차가 조금 남았네.”

주전자에는 아직 한 사람분의 차가 남아있었다. 그냥 버릴까 하다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나는 작은 찻잔에 남은 차를 모두 따랐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직 괜찮았다.

잠시 후, 그 사람의 처소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대공 전하. 윈테라 공작 부인이십니다.”

헬리온을 모시는 하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

그러나 방 안쪽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인이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방을 향해 고했다.

“공작 부인께서 차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계속 밖에서 기다리시게 하면 차가 식을 것 같은데…….”

그 말에 드디어 헬리온의 방문이 열렸다. 그는 말없이 내게 들어오라며 고갯짓을 했다.

‘이렇게 꾸며놓고 지내는구나.’

나는 찻잔을 든 채 처음 와보는 헬리온의 방을 구경했다.

그의 방엔 동물의 털가죽으로 만든 장식품이 가득했다.

바닥에는 검은 곰 가죽으로 만든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 곳곳에는 수사슴과 들소 등 뿔 달린 짐승들의 머리가 박제된 채 장식돼있었다.

벽면 유리장에는 코끼리 상아와 맹수의 엄니로 만든 칼들이 크기별로 진열되어있었다. 옷걸이에는 헬리온이 자주 입는 늑대 털 망토가 걸려있었다.

북부 대공령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의 방을 보자 알렌시아 선대공의 성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오크색 의자에 기대앉은 헬리온이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깊이 잠들게 해준다는 차를 내려 보았습니다. 오늘 헬리온 대공께서도 꽤나 힘든 하루를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대공 생각이 나서 한 잔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거라면 일리드한테나 갖다줘. 그까짓 일, 남쪽 겁쟁이에게나 힘든 일이지 나한텐 아무것도 아니야.”

헬리온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처분에 반대한 일리드가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공 전하…….”

“그리고 제발 좀!”

‘전하’라는 말에 헬리온이 벌컥 짜증을 냈다. 그는 조금 전 쓸어 넘긴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성질을 부렸다.

“둘만 있을 때라도 제발 그 말 좀 놓을 수 없어? 어릴 때부터 치고받고 싸우면서 큰 주제에 머리 좀 컸다고 대공 전하니 공작 부인이니 하는 거 어색해서 못 들어 주겠네, 진짜.”

그러나 헬리온의 격한 반응과 달리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헬리온은 나보다 네 살이나 어렸다. 유년의 기억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희미하게 잊혀지는 법인데 그는 용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그때 기억나?”

그 시절을 추억하자 나도 모르게 말을 편하게 놓게 되었다.

“그때 너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기억하는 거지?”

“네가 날 그렇게 때리고 꼬집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하지.”

내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헬리온은 어린 시절에도 심술 맞은 작은 악마였다. 내가 아끼는 책에 낙서를 해놓는 건 다반사고, 내 방에 몰래 들어와 연못에서 잡아 온 개구리를 풀어놓기도 했다.

헬리온은 못 말리는 꼬맹이였고 나는 참지 않는 어린이였다. 그때만 해도 내가 헬리온을 체격적으로 압도하던 때라 그를 참 많이 때리기도 했다.

「헬리온이 너한테 관심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참아, 이슈텔.」

우리보다 좀 더 철든 프리모스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말을 들을 시간에 나는 헬리온을 한 대라도 더 때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때 너 정말 귀여웠는데…….”

내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황궁을 떠나고 나서 사실 네 생각 많이 했어. 맨날 같이 놀던 애가 한순간에 사라지니까 보고 싶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더라고.”

“…….”

“프리모스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날 달래줬는데, 참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지. 만날 때마다 좋은 일로 만난 것도 아니었고.”

“두 번 다 장례식이었으니까.”

장례식이라는 말에 나와 헬리온 사이의 분위기가 금세 무거워졌다. 나는 말을 멈추었고 헬리온은 저도 모르게 잔에 손을 뻗어 단숨에 차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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