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말과 하녀(2)
“하지만, 공작 부인. 이 애가 뭐라고!”
애비게일이 절대 안 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이번엔 일리드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공작 부인, 곧 있으면 궁의가 올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려보시는 게-”
“하지만 폐하께서 고통스러워하지 않으십니까!”
그사이에도 폐하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내가 카리나를 폐하의 앞에 세웠다.
“궁의가 올 때까지 폐하의 고통을 덜어드려라. 더한 처치는 절대 하지 말고.”
“예, 부인.”
카리나가 어깨에 두른 소쿠리를 뒤적거리더니 잎이 많은 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 풀의 잎을 잘게 찢어 물에 넣은 후 폐하의 입에 흘려 넣었다.
“쿨럭- 쿨럭-”
약초 물을 마신 폐하께서 밭은기침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폐하의 숨소리가 눈에 띌 정도로 편안해지더니 괴롭게 뒤틀던 몸도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폐하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일리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한낱 하녀에 지나지 않은 여인이 풀잎 몇 장으로 황제를 진정시킨 모습에 크게 놀란 듯했다.
이윽고 궁의가 사냥터에 도착했다. 폐하께선 곧바로 황궁 안으로 옮겨졌다.
나와 일리드가 폐하의 뒤를 따라 황궁으로 돌아갔다. 사용인들도 모두 우리의 뒤를 따랐다.
“휴…….”
지친 카리나 역시 자신의 마구간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어딜 가?”
누군가 그녀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 * *
“폐하께선 막 잠이 드셨습니다. 이제 괜찮으시니 너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제의 침전에서 나온 궁의가 나와 일리드를 향해 공손히 인사한 후 돌아갔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일리드가 대리석 벽에 기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다치신 곳이 없어 다행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이제야 겨우 안도했다.
갑작스런 황제의 부상으로 사냥 일정은 다음으로 연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예정되어있던 어전 회의와 저녁 만찬 역시 줄줄이 취소되었다.
황제의 안부를 묻는 귀족들에게 폐하의 상태를 알려주는 것 역시 내 몫이었다. 조금 전, 나는 알현실에 모인 신하들에게 폐하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주고 왔다. 하지만 카리나에 대해선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리드가 주위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헬리온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까 사냥터에서 본 기억이 전부인데. 혹 일리드 대공께선 보셨습니까?”
“아니요. 저도 그때 이후론 그 애를 본 기억이 없네요.”
그의 말대로 헬리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애비게일을 불렀다.
“애비게일. 헬리온 대공께선 어디 계시지?”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애비게일이 난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헬리온 대공께서 카리나를 지하 감옥에 가두셨습니다.”
* * *
나와 일리드는 곧바로 황궁 지하에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그곳은 낮인데도 마치 밤처럼 어두운 곳이었다. 천장 곳곳에는 붉은 횃불이 켜져 있었고 차가운 돌벽에선 한기가 맴돌았다.
감옥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누군가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창살 너머로 울고 있는 카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윈테라 공작 부인!”
나를 발견한 카리나의 금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늘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창살 틈으로 보이는 얼굴엔 두려움과 당혹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녀린 목은 울음을 참느라 쉴 새 없이 떨렸고, 마른 어깨 역시 힘없이 들썩이고 있었다. 마음이 썩 좋진 않았지만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감옥 옆에는 헬리온이 서 있었다. 울고 있는 카리나와 달리, 헬리온은 냉정한 얼굴로 나와 일리드를 쳐다보았다.
“헬리온 대공. 이 하녀를 왜 감옥으로 데려왔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 물음에 헬리온이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표정이었다.
“뒤에 책상 좀 보지?”
헬리온이 살짝 고개를 돌려 감옥 가운데 있는 돌 책상을 가리켰다.
일리드가 재빨리 그곳으로 갔다. 돌 책상에는 여러 종류의 약초들과 금화 몇 닢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이 하녀가 왜 황실 사냥터에서 튀어나왔는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데?”
헬리온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나와 일리드를 쳐다보았다.
“사냥터지기도 아니고 마구간지기가 갑자기 사냥터에서 나타났는데 이상하단 생각 안 해봤어?”
“그건 그렇네.”
일리드는 그제야 의문이 드는 듯했다.
아까는 경련을 일으킨 폐하를 신경 쓰느라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저 하녀가 갑자기 사냥터에 나타난 건 확실히 이상했다.
“마치 준비했단 듯이 말과 황제 폐하를 진정시키는 게 뭔가 수상하다 싶어 조사해봤더니 방에서 저런 약초가 한가득 나오더군.”
“…….”
“추궁해보니 황궁 사냥터와 숲에서 약초를 캐다 시장에 팔았다던데……. 황궁에서 나온 물건은 모두 황실의 소유. 제아무리 조그만 물건이라도 손을 대거나 외부로 유출하면 처벌받는다는 걸 모르나?”
카리나의 흐느낌이 더욱 커졌다.
헬리온의 말이 맞았다. 황실은 황궁의 물건이 궁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매우 엄격했다. 그것이 작은 풀 한 포기일지라도.
“하지만 그보다도 이 하녀가 제일 잘못한 게 뭔지 알아?”
헬리온이 한 번 맞춰보라는 듯 말끝을 세게 올렸다. 내가 돌 책상 위의 금화를 보며 물었다.
“약초를 비싼 값에 팔았나요?”
“아니.”
“그럼 터무니없이 싼값에 팔았나요?”
“아니.”
“그럼 대체…….”
“내 앞을 가로막은 거야.”
헬리온의 대답에 카리나가 폐하의 말을 구하려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게 떠올랐다.
물론 카리나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다. 황제를 상처 입힌 자는 그 자리에서 당장 처결해도 되는 게 제국의 법이었다. 짐승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때 폐하의 말 루는 폐하뿐만 아니라 수석 마부와 여러 사용인들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그대로 놔두었다간 누구 하나는 말발굽에 밟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제아무리 황제가 사랑하는 말이라도 즉시 사살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었다.
“얼마 전에 새끼를 잃은 말이었습니다.”
철창 안에 있던 카리나가 울먹였다.
“몇 날 며칠 먹이도 잘 먹지 않고 이상 행동 징후를 보이길래 수석 마부님께도 미리 알려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마부님이 폐하께서 아끼시는 말이니 사냥에 데려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루가 말썽을 일으키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몰래 마구간을 빠져나와 약초를 들고 폐하와 공작 부인, 그리고 두 대공 전하를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러다 루가 이상 행동을 보일 때 끼어든 것이었습니다.”
“…….”
“루가 잘못한 건 맞지만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새끼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 루를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저런…….”
카리나의 말을 듣고 있던 일리드가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황족의 앞을 막아선 건 분명 잘못한 것이나 약초로 황제 폐하의 고통을 완화시킨 건 치하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이 하녀는 그만 풀어주도록 하자, 헬리온.”
일리드가 감옥 앞으로 다가가 창살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안 돼.”
헬리온이 일리드의 손을 막았다.
순간 두 사촌 형제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일리드가 자신을 막아선 사촌 동생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온화했으나 눈빛만큼은 달랐다.
그는 헬리온을 향해 이만 물러서라는 무언의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헬리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강경한 자세로 사촌 형을 가로막고 섰다.
“그 말은 사사했어야 했어. 그 앞을 가로막는 자도 물론이고. 그게 법이고 규율이야.”
“결과적으로 폐하께선 무사하시고 아끼시는 말도 진정됐잖아? 그 상황을 도와준 하녀를 이렇게 대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야.”
“결과로 판단하지 마. 이 하녀는 자기가 말을 달래겠다며 내 앞을 가로막았어. 그 말 때문에 다른 이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말 하나를 살리겠다고!”
“하지만-”
“말을 달래겠다고? 그럼 그 상황에서 우리가 ‘아, 그렇구나. 너는 말을 달래러 왔구나!’하고 자리를 비켜줬어야 했을까? 이 하녀의 뭘 믿고?”
헬리온이 일리드의 말을 날카롭게 받아쳤다.
“군대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어. 다른 이들이 다치고 죽어 나가는데 개인적 감정으로 윗사람의 총 앞에 뛰어들어?”
“황궁은 군대가 아니야.”
일리드가 헬리온의 말을 단번에 일축했다. 그 말에 헬리온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여긴 군대가 아니지. 군대보다 더한 곳이니까.”
“뭐……?”
“역시 대책 없이 밝기만 한 남부 사람과 규율에 대해 논의하는 건 무리인가? 하긴 피를 보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겁쟁이가 뭘 알겠어.”
“너……!”
발끈한 일리드가 반박하려 하다 돌연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하다간 더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될 게 뻔했다. 일리드는 화를 꾹 억누르며 다시 평소와 같은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너와 내가 이렇게 언쟁해봤자 어차피 소용없어. 결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으니까.”
헬리온에게서 몸을 돌린 일리드가 나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황제 폐하께서 황궁 내 사용인들에 관한 처분권을 모두 윈테라 공작 부인께 맡기셨다죠?”
난데없이 두 사람의 싸움에 내가 끌려 나오게 됐다.
당황한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드가 헬리온을 등진 채로 내게 다가왔다.
“그럼 부인께서 결정해 주시지요. 남부의 겁쟁이와 용감한 북부의 사내, 둘 중 누가 더 옳은지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