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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7화 (7/160)

7화 : 말과 하녀(1)

다리를 다치기 전, 황제 폐하께선 말을 타고 사냥에 나서는 걸 무척 좋아하셨다.

이제는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말 위에 오르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그분은 여전히 사냥터에 가는 걸 좋아하셨다.

오늘은 폐하께서 나와 일리드, 그리고 헬리온을 데리고 나서는 첫 번째 사냥이었다.

오래간만에 나도 치렁치렁한 드레스 대신 바지와 부츠, 그리고 챙 넓은 사냥 모자를 쓰고 황궁 사냥터로 향했다.

사냥터가 가까워지자 저 멀리 일리드와 헬리온이 보였다.

“어머, 저기 좀 봐! 일리드 대공이시다!”

“어쩜 총 닦는 모습도 저리 기품 있으실까?”

뒤따르던 하녀들의 소곤거림이 내게까지 들렸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하녀들이 쑥덕거렸다.

“저기 헬리온 대공이 더 멋있으시거든?”

“그래, 저 큰 키에 날카로운 눈매 좀 봐. 역시 북쪽 남자들이 멋있다니까!”

정치니 업적이니 따지는 내 가족들과 달리 하녀들의 기준은 간단했다.

‘더 멋있는 대공이 더 좋은 대공이다.’

간결하고도 명확한 기준에 따라 황궁의 하녀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한쪽은 남부의 일리드 파였고 다른 한쪽은 북부의 헬리온 파였다.

일리드를 흠모하는 하녀들은 그의 부드러운 성격과 다정함에 푹 빠져있었다.

따뜻한 남부에서 자란 일리드는 매사에 구김이 없고 마음이 넓었다. 황궁 사용인들을 함부로 대하는 법도 없었으며 자신이 먼저 나서 가볍게 대화를 붙이기도 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과 바다처럼 푸른 두 눈, 그리고 수려한 외모도 하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단단히 한몫했다.

반면 헬리온을 흠모하는 하녀들은 그의 차가운 성격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일리드와 달리 헬리온은 하인들에게 꽤나 까다로운 상전이었다. 말수도 별로 없어 함께 있으면 어색한 것은 물론, 어지간한 주문은 눈짓으로 해결해 사용인들을 당황시키기도 부지기수였다.

북부 사람들이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다는데 딱 헬리온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리드만큼 인기가 좋은 건 순전히 외모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헬리온은 무척 키가 컸으며, 눈빛이 깊고 날카로웠다. 창백하게 옅은 파란색 눈동자는 그의 붉은색 머리카락과 대조를 이루어 오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느낌. 하녀들은 그게 바로 헬리온의 매력이라고 떠들어 댔다.

“오셨습니까, 윈테라 공작 부인!”

일리드가 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반면 헬리온은 나를 한 번 쓱 흘겨보는 게 전부였다.

“일리드 대공, 사냥 준비는 잘하고 계셨습니까?”

“예. 그런데 황궁에서의 사냥은 처음이라 조금 긴장됩니다. 남부에 있을 때도 그다지 사냥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폐하께서 실망하진 않으실까 걱정입니다.”

일리드는 정말 긴장했는지 닦은 총을 닦고 또 닦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사냥을 좋아하시긴 하나, 오늘 보자고 하신 건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심이니까요.”

“그런 걸까요?”

“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세요.”

“잘해서 나쁠 건 없지.”

겨우 일리드를 달래놨더니 얄미운 심술쟁이가 끼어들었다. 헬리온은 능숙한 솜씨로 총알을 장전하며 덧붙였다.

“기왕 총을 들었는데 토끼 한 마리도 못 잡으면 폐하께서 형한테 실망하실 거야.”

“역시 그렇겠지?”

풀 죽은 일리드가 평소답지 않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내가 헬리온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나를 슬쩍 보고는 못 본 척했다.

“벌써 다들 모여 있었구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께서 애마를 데리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계셨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와 일리드, 헬리온이 폐하를 향해 인사했다.

“그래, 다들 일어나거라. 오랜만의 사냥이라 아주 즐겁구나.”

최근 몇 달간 국정에 치여 살던 폐하는 간만의 외출에 무척 들뜬 얼굴이셨다. 나와 두 대공은 어깨에 총을 메고 폐하의 말을 따라 걸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리드 대공.”

내가 일리드에게 작게 속삭였다.

“제가 몰래 한 마리 잡아드리겠습니다. 제가 사냥에 꽤 소질이 있답니다. 토끼든 오리든 사슴이든 보이는 대로 한 마리 잡아서 드릴 테니 대공께서 잡으신 척하십시오.”

“고맙습니다, 부인. 그런데 사실…….”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일리드가 머뭇거리더니 더 작게 중얼거렸다.

“제가 피를 무서워합니다.”

“푸흡.”

때마침 헬리온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형, 피를 무서워했어? 언제부터? 한 오 년 전쯤인가, 북부에 왔을 땐 나랑 같이 사냥터에 가곤 했잖아. 그때만 해도 안 그랬던 거 같은데.”

“…….”

헬리온의 말에 일리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말하고 싶지 않은 주제인지 이어지는 헬리온의 질문 공세에도 일리드는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괜한 말을 꺼냈네.’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일리드와 헬리온을 불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히이잉-!”

폐하의 말이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더니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어!”

당황한 황제가 말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말이 갑자기 앞다리를 하늘 높이 올리는 바람에 마부조차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깜짝 놀란 황제가 고삐를 세게 움켜잡았지만 말은 더욱더 거세게 날뛰었다.

“폐하!”

놀란 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사이, 누군가 재빨리 흥분한 말을 향해 달려갔다.

헬리온이었다.

그는 말의 앞발을 피해 뛰어올라 말고삐를 아래로 세게 잡아당겼다. 그의 힘에 재갈이 바닥으로 향하며 말의 머리가 땅으로 내려갔다. 그사이 마부와 하인들이 달려가 황제 폐하를 붙잡았다.

“폐하!”

나도 아연실색한 얼굴로 폐하께 달려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폐하께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계셨다. 안 그래도 건강이 좋지 않은 분이셨다. 폐하께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몹시 괴로워하셨다.

“당장 궁의를 불러와라! 당장!”

일리드가 사용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용인들이 위급 상황을 알리는 뿔을 불며 황궁 쪽으로 달려갔다.

황제의 말은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하인 몇 명은 말발굽에 치여 땅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이들은 겁에 질려 말 가까이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부가 진정시키려 해도 말은 도무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다들 물러서라!”

헬리온이 말 주위에 선 사용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손엔 총이 들려있었고 총구는 정확히 황제의 말을 향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안 돼요!”

갑자기 사냥터 숲속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헬리온만은 예외였다. 그는 여전히 말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앞에는.

“대공 전하, 제발 부탁입니다. 루를 죽이지 마십시오! 제가 루를 달래보겠습니다!”

카리나가 서 있었다.

“비켜서라.”

헬리온이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부터 죽이기 전에.”

“안 돼!”

카리나를 알아본 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쏘지 마, 헬리온!”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여전히 카리나를 향해 총구를 겨눈 채, 그는 언제라도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카리나에게 어서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곤 나와 헬리온을 번갈아보더니 세게 고개를 저었다.

“루, 착하지? 진정해, 루.”

카리나가 몸을 돌려 천천히 황제의 말에게 다가갔다.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해대던 말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더니 순간 멈칫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카리나가 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어깨에 메고 있던 소쿠리에서 초록빛 허브를 한 움큼 꺼내 말에게 내밀었다.

“이리 와. 네가 좋아하는 약초잖아. 착하지?”

카리나가 손에 쥔 약초를 부드럽게 흔들자 바람을 타고 허브향이 공중으로 퍼졌다.

거친 울음소리를 내던 말이 서서히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허브향을 맡고는 카리나에게로 다가갔다. 말이 카리나의 손에 입을 대고 허브를 먹기 시작했다.

“헬리온…….”

내가 천천히 헬리온에게 다가갔다. 떨리는 손을 뻗어 총을 쥔 헬리온의 팔을 잡았다. 그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제 괜찮아. 그만 내려놔도 돼.”

천천히 그의 손을 내려 총구를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그는 창백한 두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그랬냐고 추궁하는 듯한 그 눈빛이 몹시도 차갑게 느껴졌다.

“궁의는 아직이냐?!”

폐하의 곁에 있던 일리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폐하의 호흡은 여전히 불규칙했고 몸은 경련으로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대공 전하.”

마부에게 루를 넘기고 온 카리나가 일리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황제 폐하를 한 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뭐……?”

일리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카리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네가 뭔데?’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랫사람들에게 다정한 일리드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허튼소리 하지 말고 물러나 있거라.”

“하지만 대공 전하. 이 약초를 쓰면 폐하의 고통을-”

“입 다물어라, 카리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결국 참지 못한 하녀장 애비게일이 카리나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의사도 아닌 한낱 마구간지기인 네까짓 게 뭘 안다고 함부로 나서는 게야!”

“전 그저 폐하가 염려되어-”

“이것이 끝까지!”

애비게일이 사나운 기세로 카리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확 밀쳐버렸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카리나는 겁에 질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잠깐.”

애비게일이 카리나를 끌고 가려던 찰나, 내가 카리나를 향해 말했다.

“해 보아라.”

“예?”

“궁의가 올 때까지 폐하의 고통을 완화시켜 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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