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남자 말고 황제
“뭐……?”
“너 왜 아까부터 나한테 자꾸 반말이시냐고요.”
헬리온이 나를 내려다보며 창백한 푸른색 눈동자를 끔뻑였다.
안 그래도 그의 말투가 계속 거슬리던 차였다. 아까는 황제 폐하와 일리드 대공이 있어 말하지 못했지만, 이참에 호칭 정리를 해둬야 했다.
나는 그가 더 생각할 수 없게 재빨리 다음 말을 이었다.
“보세요. 제가 대공께 반말을 하니까 기분 나쁘시죠? 그러니까-”
“아니.”
“예?”
“기분 안 나빠.”
정말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내 도발에 당황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의 말투를 고쳐야겠다는 깨달음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쭉 반말해.”
헬리온이 처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버렸다.
“잘 자. 이슈텔.”
서서히 닫히는 문틈 새로 태연하게 인사까지 건네면서.
‘뭐지, 이게……?’
할아버지께서 황녀한테 얻어맞으셨을 때 이런 기분이셨을까? 맞지도 않은 뺨이 얼얼하게 부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저 쪼끄만 게 이제 좀 컸다고 나를 놀려?’
하녀들만 없었으면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 머리에 꿀밤이라도 한 대 먹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마 키가 닿지 않을 것이다.
내 어깨치에나 겨우 오던 꼬마 헬리온은 이제 목을 뒤로 꺾지 않으면 얼굴을 볼 수 없을 만큼 크게 자라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황궁과 떨어져 살던 일리드와 달리, 헬리온은 비교적 황궁 출입이 잦았다.
나의 할아버지 리젠트라 공작에 의해 방계 황족들의 황궁 출입이 금지되었을 때, 일리드의 아버지 볼테로 황자는 할아버지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남부 대공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헬리온의 어머니 알렌시아 황녀는 끝까지 수도에 남아 할아버지와 충돌하며, 보란 듯이 아들을 데리고 황궁을 드나들었다.
자연히 나와 프리모스 황태자는 헬리온과 자주 마주치게 되었고 가까이 지냈다.
동생이 없는 나와 형제가 없던 프리모스는 꼬마 헬리온을 막냇동생처럼 귀여워해 주었다.
돌이켜보면 헬리온은 어린 시절에도 심술 맞고 예측불가능한 아이였다. 나와 황태자와 함께 소꿉놀이를 할 때면 제일 어린 주제에 꼭 아빠 역할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덕분에 형인 프리모스가 아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결국 할아버지에게 패배한 황녀가 북부 대공령으로 갈 때도, 헬리온은 황궁을 떠나지 않겠다며 복도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꼭 가야 한다면 사촌 형인 황태자를 데리고 가겠다고 생떼를 부렸다. 그건 안 된다고 하자 이번엔 나를 데려가겠다고 억지를 썼다. 결국 어머니에게 엉덩이를 몇 대 맞고 나서야 헬리온은 울며 황궁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로는 황후 폐하와 황태자의 장례식에서 본 게 전부였다.
귀여웠던 꼬마 헬리온은 볼 때마다 몰라보게 자랐고 점점 어린 티를 벗었다. 아기 새같이 낭랑했던 목소리는 북쪽의 전사들처럼 낮아졌고, 업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작았던 몸집은 이제 내 두 배는 거뜬히 넘을 만큼 커졌다.
키는 또 얼마나 자랐는지, 고개를 들고 봐야 할 때면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여자 중에선 키가 큰 편인데…….
그래도 심술 맞고 고집스러운 성격만큼은 그대로인 듯했다. 어린 시절 그때처럼, 여전히 날 이슈텔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 * *
황궁 안 처소는 오랜만에 날 찾아온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리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친오빠 자르 리젠트라 공작, 고모할머니 릴체 후작 부인, 오빠의 처남이자 내겐 사돈 되는 실란다 백작, 마지막으로 이모 투렌 남작 부인.
일리드와 헬리온이 황궁에 당도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가족들은 모두 대공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래, 이슈텔. 둘 중 누가 더 멍청하냐?”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릴체 후작 부인의 직설적인 질문이 들어왔다.
“누가 더 다루기 쉽냐는 말이다.”
“할머니도 참. 뭘 벌써부터 그런 걸 걱정하고 그러세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은 오빠가 손을 훠이 내저었다.
“그래 봤자 하나는 볕 좋은 남부의 베짱이고 다른 하난 서릿발 치는 북부의 야만인입니다. 제아무리 황족이라 해도 중앙을 떠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습니다. 한낱 촌뜨기들에게 정치 감각 따위 있을 리 없습니다.”
탁-!
릴체 후작 부인이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는 바람에 모두가 몸을 움찔했다. 언제나 마음에 평화가 넘쳐흐르는 투렌 남작 부인만 제외하고.
“이 멍청아, 황제의 조카들이 너처럼 덜떨어진 줄 아느냐?!”
노부인의 기세에 눌린 오빠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오빠를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고모할머니의 모습은 정말이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똑같았다.
“볼테로 황자의 아들은 남부 대공령을 제국 내 최고의 무역지로 만들었어. 남부 지방에서만 나는 특이한 과일과 곡물로 타국 상인들의 관심을 받더니, 항구를 개조해 배를 들이고 다른 지방의 생산품을 떼어다 팔면서 돈을 벌었다고! 고작 열여덟 살 때! 넌 열여덟에 아카데미 역사상 전례 없는 전 과목 낙제생이었는데!!!”
“아, 왜 또 옛날이야기를 하고 그러세요…….”
머쓱해진 오빠가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후작 부인은 폭주했다.
“알렌시아 황녀는 그 어린 아들을 데리고 북벌에 나서 세력을 확장했다. 그 아들이 자라고 나선 어머니가 했던 대로 계속 북쪽 영토를 넓혔지. 그때 네가 그들을 보고 뭐라고 했지?”
“……야만인들이 땅따먹기를 한다고요…….”
“그래, 그 야만인 땅따먹기를 하던 헬리온 대공이 얼어붙은 금광을 개발해 지금은 제국 내 최고 부자가 되었지! 지금 네가 양 손가락에 가득 끼고 있는 그 금반지도 전부 북부 대공령에서 나온 거라고!”
“후작 부인 말씀이 맞습니다. 두 대공 모두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실란다 백작이 모노클을 닦으며 거들었다.
“남부의 무역량은 제국 전체 무역 규모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북부 금광의 재산 가치는 제국의 십 년 치 예산을 거뜬히 넘을 거라 추정되고요. 남쪽의 일리드는 영리하고 북쪽의 헬리온은 용맹합니다. 저희로선 누구 하나 까다롭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와, 그렇구나.”
오빠가 입을 떡 벌린 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후작 부인이 금방이라도 찻잔을 집어 던질 듯 손을 떨자 투렌 남작 부인이 말없이 그분의 손에서 잔을 치워드렸다.
나의 오빠 자르 빌헬름 리젠트라는 심성이 나쁘진 않았으나 대신 머리가 나빴다.
천성이 노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지라 대외적으론 호탕한 이미지였지만, 사실 그는 가문을 이끌기엔 턱없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여러모로 부족한 손자였기에 할아버지는 손자며느리의 가문을 고르는 데 신중을 기하셨다.
여러 후보 중에 선택된 가문은 실란다 백작가였다.
실란다 백작가는 리젠트라 가문의 분쟁 당시 가장 먼저 할아버지의 편에 선 집안이기도 했고, 대대로 명재상을 많이 배출해 낸 명문가이기도 했다.
백작가의 세 남매는 모두 무척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새언니 실비아도 무척 박학다식한 사람이었고, 그녀의 동생 또한 명석한 두뇌와 준수한 인물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중에서도 할아버지가 특히 눈여겨본 사람은 새언니의 오빠 루드비 실란다였다.
루드비 실란다는 황실 아카데미에서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 없으며, 어떤 사람과도 잘 어울려 지내는 서글서글한 성격을 가졌다.
그는 매우 지혜롭고 또 어찌 보면 영악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었다. 오빠에게는 물론 훗날 황태자비가 될 내게도 무척이나 필요한 자였다.
“여하튼 윈테라 공작 부인께선 두 대공들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제 나름대로 알아보겠지만 저보단 부인께서 그들과 함께할 시간이 더 많으실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실란다 백작.”
“이슈텔, 절대 잊지 마라.”
릴체 후작 부인이 할아버지와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좋은 남자가 아니라 좋은 황제를 골라야 한다는 걸.”
좋은 황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릴체 후작 부인, 벨로나 리젠트라-릴체는 권력욕이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었다. 리젠트라가의 전쟁은 벨로나 리젠트라를 빼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공이 무척이나 컸다.
전쟁 내내 그녀는 친오빠 빌헬름 리젠트라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었고, 전후에는 적대 세력 축출에 앞장섰다.
그런 그녀가 가장 빼앗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황권이었다. 슬하에 여자 후손이 없던 벨로나 리젠트라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황태자와의 혼담을 밀어붙였다. 나를 통해 황가의 외척이 되어 리젠트라의 권력을 더욱 견고히 할 심산이었다. 그런 후작 부인에게 똑똑한 황태자감은 가장 견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똑똑-
처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녀장 애비게일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윈테라 공작 부인. 이제 곧 사냥에 가실 시간입니다.”
“저런, 이제 우리는 그만 돌아가 봐야겠군요.”
투렌 남작 부인이 손뼉을 짝짝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빠와 실란다 백작이 느릿느릿 외투를 찾기 시작했고, 릴체 후작 부인은 남은 차를 다 마시고 가겠다며 자리를 지켰다.
“이슈텔.”
내 곁으로 쓱 다가온 남작 부인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비록 정치적인 상황은 잘 모르지만 누가 좋은 남자인지, 나쁜 남자인지는 꽤 잘 구별한단다. 그러니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렴.”
투렌 남작 부인이 방문을 나서며 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투렌 남작 부인은 나의 이모이자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시녀였다.
황후께서 가장 아끼는 시녀였고, 젊은 시절 사교계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과 구애를 한 몸에 받은 매혹적인 인물이었다.
그녀 자신이 정치적인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녀는 정치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타인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잡아내는 예리함.
그녀의 능력은 오빠는 물론 실란다 백작과 릴체 후작 부인, 그리고 내게도 없는 특별한 능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