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두 개의 초상화
“아… 헬리온 대공…….”
알렌시아 황녀의 아들 헬리온은 북부 대공령에서 수도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춥고 척박한 북부 대공령은 남부 대공령보다 수도와의 거리가 멀었다. 헬리온은 거리상 일리드보다 늦게 황궁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이목이 모두 저와 헬리온에게 집중되는 시기인 만큼 행동에 신중을 기하고 싶습니다.”
일리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찍 도착했다고 황궁에 먼저 들어가면 뒷말하기 좋아하는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십상이지요. 황제의 눈도장을 받으러 일찍 왔다느니, 사촌의 뒤통수를 치고 먼저 궁에 입성했다느니 하는 말들 같은 거 말입니다.”
일리드의 말이 맞았다. 두 대공 중 누가 황태자가 될지 모르는 시점에서 섣부른 행동은 자제하는 것이 좋았다.
‘참으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구나.’
그의 속 깊은 행동을 겨우 ‘황제와 단둘이 있기에 어색할까 봐’라고 해석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아까 하신 말씀은 계속 유효했으면 하는데…….”
“아까 한 말이라면……?”
“직접 황궁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하신 말씀 말입니다.”
그가 내심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 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는 매우 만족한 듯 보였다.
“수도에 당도하니 황태자 전하가 떠올라 이곳에 온 건데, 뜻밖의 행운이었네요. 여기서 공작 부인을 만나게 되다니.”
일리드가 프리모스의 무덤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함께 어울린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선 참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형제가 없으셔서 그런지 만날 때마다 저를 무척 좋아해 주시기도 했고요.”
“…….”
“그리고 공작 부인께도 따뜻한 분이셨나 봅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혼자 찾아오시는 걸 보면요.”
“좋은 분이셨지요, 황태자 전하는요…….”
내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립습니다. 그분의 상냥한 목소리가요.”
나와 일리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프리모스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의 무덤가에서 핀 민들레꽃이 바람에 흩날려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 울지 않으시는군요.”
일리드가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위로도 손수건도 이제 필요 없으신 듯합니다.”
“흘릴 눈물도 더는 남아있지가 않네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웃어 보이려 했다. 그게 잘 안 돼서 더 씁쓸해 보였겠지만.
“그럼, 저는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흘 후에 뵙지요.”
내가 인사를 하자 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내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다음엔 황궁에서 뵙겠습니다, 윈테라 공작 부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빨려 들어갈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 * *
“오셨습니까, 공작 부인!”
이브가 마구간으로 들어서자 카리나가 재빨리 다가와 고삐를 잡았다. 말에서 내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부인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가세요?”
“내 얼굴이……?”
“어휴, 그늘로만 다니시지 참…….”
카리나가 내 얼굴을 살펴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 가을볕이 더 무서운 법이에요. 귀랑 목뒤까지 다 빨개지셨어요.”
그러더니 이브를 제자리에 두고 와서는 나를 마구간 뒤편으로 이끌었다.
“황실 사냥터와 마구간 주변에 약초가 많습니다. 어디 보자…… 이 근처에 분명 있었는데…….”
허리를 숙이고 풀숲을 이리저리 헤치던 카리나가 작은 풀 한 포기를 꺾더니 내게 건넸다.
“찾았다! 열이 오를 땐 이 약초가 최고입니다. 잠시만 코밑에 대고 있어 보세요.”
“이렇게……?”
카리나가 건넨 풀을 코밑에 수염처럼 대보았다. 곧 알싸한 풀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더니 이내 깊은 향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박하처럼 시원한 향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제법이구나.”
효과는 확실했다. 후끈거리던 두 볼의 열기가 가라앉았고 이마에 맺혀있던 땀도 금세 식었다.
“이런 효과가 있는 약초는 처음 본다. 카리나, 넌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약을 살 돈이 없을 땐 약초로 상처를 치료하곤 했습니다. 약초를 캐다 시장에 내다 판 적도 있고요.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풀들의 효능은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자 카리나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이 약초는 해열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약초입니다. 열을 내려주는 데 효과가 탁월하여 한여름에 입에만 물고 있어도 제법 땀을 많이 식혀준답니다.”
“그렇구나.”
“감기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좋고, 화상을 입은 자리의 열기를 빼주는 데도 좋습니다. 중년 부인들 사이에서는 갱년기 때문에 얼굴에 열이 오를 때 많이 사용한답니다. 그리고 젊은 아가씨들은 사랑의 열병에 시달릴-”
“콜록- 콜록-”
갑자기 재채기가 나오는 바람에 아까운 약초가 죄다 공중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공작 부인, 괜찮으세요? 이게 재채기를 유발하는 풀은 아닌데!”
화들짝 놀란 카리나가 새된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약초가 아니라 자신의 말 때문이란 건 상상도 못 한 채.
* * *
사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갔다. 황궁은 두 대공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이른 아침부터 몹시 분주했다.
사실상 황실의 안주인인 나 역시 새벽부터 일어나 궁전 곳곳을 정비했다. 평소엔 황실의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 의무적으로 느껴지곤 했는데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몸은 피곤하고 신경은 예민해졌으나 마음만큼은 몹시 두근거렸다.
“몰리, 나 어때? 괜찮아?”
깨끗한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고 하녀들이 정돈해준 머리를 만져보았다. 몰리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는 기쁜 얼굴로 박수를 쳤다.
“말해 뭐 해요, 우리 아가씨가 제일 예쁘지! 두 대공 전하께서 우리 아가씨를 보고 한눈에 반하시는 게 아닌지 몰라!”
나에 한해서는 못 말리는 팔불출인 몰리가 끊임없이 찬사를 늘어놓았다. 거울 앞에 서서 몸을 한 바퀴 빙그르 돌며 일리드를 떠올렸다.
‘그 사람을 어서 다시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하녀들이 볼까 괜히 민망해진 나는 유리잔에 든 찬물을 한 잔 마시고 폐하를 모시러 황제전으로 향했다.
“이슈텔, 이리 와서 이것 좀 보거라.”
황제전으로 들어서자 폐하께서 나를 반기셨다. 황제께선 의복도 대강 걸치신 채 내 손을 잡고 두꺼운 벨벳 천 앞으로 걸음을 재촉하셨다.
“이것 좀 보거라. 정말 근사하지 않니?”
폐하께서 주름진 손으로 벨벳을 걷어내자 그 아래 있던 커다란 액자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대공들의 초상화가 아닙니까?”
나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초상화가 보였다. 일리드와 헬리온이었다.
“어젯밤에 남부와 북부 가신들 쪽에서 아이들의 초상화를 보내주었단다. 삼 년 전에 비해 다들 몰라보게 변했더구나.”
“정말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폐하.”
나는 일리드의 초상화에 시선을 고정했다. 며칠 전에 보았던 그의 모습과 똑같은 그림이 나를 향해 은은히 미소 짓고 있었다. 바다처럼 깊은 두 눈과 부드럽고 수려한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초상화였다.
‘그래도 실물을 다 담아내진 못한 것 같네.’
이번엔 옆에 있는 헬리온의 초상화를 보았다.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있던 일리드의 초상화와 달리 헬리온은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 몰라도 정말 헬리온이랑 똑같네.’
시릴 듯 푸른 두 눈과 대조적인 붉은 머리카락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만한 듯 자신만만한 표정과 강인한 느낌이 드는 자세가 꼭 실제 헬리온과 마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그림들은 황궁 초상화 방으로 보낼 예정이다. 네 초상화 옆자리가 비어 있잖니. 거기에 걸어둘 생각이다.”
폐하께서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둘 중 누구의 초상화가 네 옆자리에 남게 될지 나도 무척이나 궁금하구나.”
* * *
커다란 뿔피리 소리가 다섯 번 울리는 것으로 대공들의 환영회가 시작됐다. 황궁의 정문이 열리고 기사들이 각 잡힌 인사로 대공들을 맞이했다. 일리드와 헬리온이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황좌와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저기 오는구나!”
편치 않은 몸을 이끌고 친히 황좌에서 일어난 황제가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황제의 눈이 향하고 있는 곳엔 남부와 북부 대공령에서 보낸 가신들과 사절단들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행렬 맨 앞에 선 기수들이 하늘 높이 뻗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남부의 상징인 푸른 깃발과 북부의 상징인 붉은 깃발이었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처음 만날 날처럼 한쪽 어깨에 청록색 망토를 두른 일리드와, 검은 늑대 털 망토를 입은 헬리온이었다.
“어서 오너라. 일리드, 헬리온!”
폐하께서 내 부축을 받으며 조카들에게로 다가갔다.
“테브론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두 대공이 무릎을 꿇고 황제께 인사드렸다. 대공들을 뒤따르던 가신들도 황제께 절을 올렸다.
“어서 일어나거라.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황제가 조카들의 손을 하나하나 꼭 잡으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황제의 힘이 부족한 탓에 조카들이 부축하는 모습이 되었다. 일리드가 황제의 자세를 바로 세워드리며 옅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리드 대공 전하. 그리고 헬리온 대공 전하.”
내가 치맛단을 잡고 일리드와 헬리온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내 뒤에 있던 귀부인들과 하녀들도 황족인 대공들을 향해 예의를 표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윈테라 공작 부인?”
“예, 저는 잘 지냈습니다.”
일리드의 부드러운 시선이 내게 와 닿았다. 나도 그를 향해 살며시 눈인사를 했다.
“헬리온 대공께서도 잘 지내셨지요?”
살짝 고개를 돌려 헬리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서 궁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너희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구나.”
폐하께서 지팡이를 들며 앞장섰다. 나는 폐하를 부축하며 대공들을 데리고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