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일리드
카리나를 살려두는 건 내게도 큰 모험이었다.
웬 거지 같은 여자 하나가 ‘친애하는 사촌에게’라고 적힌 쪽지를 들고 이슈텔 리젠트라를 만나러 왔다는 소문은 이미 황궁 하인들 사이에 쫙 퍼졌다.
나는 먼 친척 하나가 파산을 하여 돈을 빌리기 위해 하녀를 보낸 것이라 둘러댔다.
황궁으로 오는 길에 도둑을 만나 편지 아랫부분이 찢어졌고, 가진 돈을 전부 잃어 거지꼴이 되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럴싸하게 지어낸 거짓말이었기에 더 이상 의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카리나가 황궁에서 일한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다.
카리나를 마구간으로 보낸 건 일부러 고된 일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몸이 편해지면 다른 것에 욕심이 생기는 게 사람이었다. 나는 아직 그녀를 믿지 못했다. 그녀가 눈 돌릴 틈을 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마구간은 황궁을 드나드는 귀족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에 있으면 카리나를 알아볼 이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괜한 추파를 던질 이도 없을 터였다. 나를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이보다 안전한 곳은 없었다.
“오늘은 이브와 함께 어디를 가십니까?”
카리나가 나의 애마 이브를 끌고 나오며 물었다.
“황궁 뒤 숲을 달리러 가시나요?”
“아니, 오늘은 다른 곳에 갈 생각이다.”
짧게 대답한 후, 이브의 등 위에 올랐다.
“이럇!”
큰 울음소리를 낸 이브가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 * *
나는 이브와 함께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말을 타고 숲을 달릴 때면 모든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오로지 그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오늘은 숲을 지나 조금 더 먼 곳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답답한 황궁을 벗어나 내가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그곳으로.
“안녕, 프리모스.”
근처에 있는 나무에 이브를 묶어두고 그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바빠서 한동안 못 올 것 같아. 그래서 미리 온 거야.”
그는 대답이 없었다.
벌써 삼 년째, 황태자 프리모스는 내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프리모스는 어린 시절부터 나와 함께 자란 형제였고,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친구였으며, 또한 좋은 남편이 될 사람이었다.
신뢰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매 순간 긴장을 놓칠 수 없는 황궁에서, 그는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떠난 후에도 나는 종종 그를 만나러 왔다.
그의 옆에 누워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건넸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나와 카리나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나 곧 결혼할 거 같아. 신랑은 아직 모르지만.”
“…….”
“질투 나지?”
“…….”
“질투만 하지 말고 좀 알려줘 봐. 네 사촌 중에 누가 더 나은 사람인지.”
“…….”
“다들 너만 못하다고? 알았어, 잘난 척하기는…….”
그때, 저 멀리 나무 틈 사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나무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였다. 그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윈테라 공작 부인. 일리드 테브로니아입니다.”
“일리드 테브로니아……?”
멍하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아, 그제야 기억났다.
일리드 대공. 황제의 조카이자 황태자의 사촌.
그와는 단 두 번 마주친 적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난 곳은 황후 폐하의 장례식이었다. 돌아가신 황후 폐하께서는 일찍 부모님을 여읜 날 친딸처럼 아껴주시던 분이었다.
그 시절의 난 아직 감정을 자제할 줄 모르던 어린 소녀였고,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들 틈에서 하루 종일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런 내게 일리드가 다가왔었다.
「울지 마십시오.」
검은 상복을 입고 있던 그가 내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자신도 어린아이였으면서, 그는 사촌 동생인 프리모스와 나를 제법 어른스럽게 챙겨주었다.
「다음엔 결혼식에서 뵙겠습니다, 리젠트라 공녀.」
자신의 공국으로 돌아가기 전, 그가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때 마주친 푸른색 눈동자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곳도 장례식이었다.
프리모스의 장례식에 서 있던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고, 감정을 다루는 법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고 만 폐하를 대신해, 나는 황태자의 장례를 모두 진행했다.
슬퍼하고 있을 틈조차 없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장례식 막바지였다. 황실 근위병들이 프리모스의 관을 땅속 깊숙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내게 뒤에서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준 이가 그 사람이었다. 그때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가 황태자비 예정자와 황태자 후보라는 관계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일리드 대공.”
내가 일리드를 향해 변명 섞인 해명을 했다.
“만날 때마다 상복을 입고 계셔서……. 평상복 차림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리드가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는 검은 상복이 아닌 단정한 청록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요즘같이 좋은 날씨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그래도 조금 서운합니다. 공작 부인.”
일리드가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단번에 부인을 알아보았는데요.”
“대공께선 눈썰미가 좋으신가 봅니다. 겨우 두 번 마주친 것이 전부인 사람을 한 번에 알아보시다니요.”
말이 두 번이지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나를 바로 알아본다는 건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제가 눈썰미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윈테라 공작 부인께서 변함없이 아름다우신 거죠.”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한 내가 그를 향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과찬이십니다, 대공. 황태자께서 떠난 후, 홀로 황실의 일을 감당하느라 알게 모르게 고생이 많았습니다. 변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황태자의 반려로 정해진 사람이었다.
다른 귀족 여성들처럼 사교계에 데뷔할 수도, 다른 남성 귀족들의 구애를 받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래서 난 프리모스가 아닌 다른 이성이 보내는 찬사에 익숙하지 않았다. 보통 여인들은 자연스럽게 웃고 넘어갈 말에도 금세 얼굴을 붉히곤 했다.
“너무 겸손하십니다, 부인.”
그는 여전히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꽤 오래전,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때 그 눈빛으로.
헤브론 황제에겐 쌍둥이인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일리드 대공은 그중 남동생의 아들로 나보다 세 살 위였다.
하지만 황제의 조카임에도 그는 황궁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일리드뿐만 아니라 황제의 두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테브론 제국은 황제의 직계를 제외한 황족들이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한 제도를 만든 건 나의 할아버지 빌헬름 리젠트라였다.
말로는 황실의 권력이 분산되는 것을 막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지만, 실은 황족의 힘을 빼앗아 귀족과 평민회에게 나누어주기 위함이었다.
처음 이러한 처분이 내려졌을 때, 황제의 두 동생은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여동생 알렌시아 황녀가 극도로 분개해 나의 할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린 일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사건이었다.
비교적 유한 성격의 형제들과 달리 알렌시아 황녀는 성미가 매우 불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황족의 황궁 출입 금지는 황가를 기만하는 반역적 행위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나의 할아버지는 이미 모든 중앙 귀족들을 등에 업고 계신 분이셨다.
게다가 마지막엔 남동생 볼테로황자마저 할아버지와 대적하길 포기함으로써 사실상 황실은 패하고 말았다.
결국 황녀와 황자는 각각 북부와 남부의 변두리 땅을 공국으로 하사받고 중앙 정치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후 황실의 큰 행사가 아니면 수도에는 발도 붙이지 못했다. 그런 두 대공가가 이제 다시금 황궁으로 돌아올 기회를 잡은 것이다.
“도착 예정일보다 사흘이나 빨리 오셨군요.”
내가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며 말했다.
“수도에 오셨으면 곧바로 황궁으로 가 폐하를 뵙지 않고 왜 여기에……?”
“그게, 혼자 황궁에 들어가기가 퍽 부담스럽더군요.”
아…….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삼촌과 조카 사이여도 폐하와 일리드는 서로 떨어져 지낸 기간이 매우 길었다. 혼자 황제를 알현하기엔 어색할 만도 했다.
“괜찮습니다, 대공. 황제 폐하께선 두 대공 조카분들을 무척 아끼십니다.”
실제로 폐하께선 최근 들어 나를 불러다 놓고 조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잦아지셨다.
특히 첫 조카 일리드 대공이 어린 시절 얼마나 예쁘고 영특했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시곤 했다.
“만일 혼자 폐하를 뵙기 불편하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지요. 제가 대공 옆에 같이 있어 드리겠습니다. 황궁 구경도 시켜드리고요.”
“정말이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일리드가 제법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워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지금 바로 가실까요? 말을 타고 가면 금방 황궁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공작 부인. 사실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리드가 약간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쉽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기분이었다.
“기다리는 사람이요?”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헬리온을 기다리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