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3화 (96/96)

<외전 23화>

“저번처럼 2층 끝 방에 쥐 죽은 듯이 지내다 갈게. 그래 봤자 고작 일주일이야. 근데 이건 무슨 냄새야? 라자냐인가? 나 그거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그가 해맑게 히죽 웃었다. 성현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캐리어 들고 들어와. 밑에 끌지 말고.”

“당연하지.”

유현은 형에게 뒷덜미를 붙잡힌 탓에 모양이 상한 코트 깃을 툭툭 털어서 정리했다. 그러고는 캐리어를 훌쩍 집어 들고 당당하게 저택 안으로 입성했다.

현관을 지나 길게 이어진 복도에는 크리스마스랍시고 반짝거리는 장식이 꾸며져 있었다. 유현은 흥미로운 눈길로 장식을 구경했다.

생전 모든 공휴일에 심드렁한 태도를 유지하던 제 형제였는데, 저게 다 뭐람. 결혼을 하고 나니 어딘가 나사가 빠져 버린 게 분명했다.

물론 제 손으로 저걸 다 꾸몄을 리는 없지만…….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고 장식을 꾸미고 있을 성현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와, 너무 안 어울려.

유현은 고개를 가로저어 머릿속에 떠오른 망상을 지워 버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봐온 성현은 쓸데없는 장식과 조잡한 인테리어를 기피하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의 집치고는 굉장히 낯간지럽단 말이지.

세상 권태롭고 무심한 권성현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만들어 놓은 형수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형.”

“…….”

“형수랑은 어떻게 사귀게 됐어?”

“……뭐?”

앞서 걷던 성현이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형이랑 아연 누나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친구였으니까, 갑자기 관계가 변하게 된 무슨 계기가 있었을 거 아냐.”

“…….”

성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난감한 표정을 능숙하게 감췄다. 저렇게 직접적으로 두 사람이 사귀게 된 계기를 묻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두 사람의 교제와 결혼 소식이 공표되었을 때, 모두가 깜짝 놀라면서도 동시에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가까스로 납득하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모르는 사이에서 만나서 눈이 맞는 것보다 어려웠을 것 같은데.”

“뭐가 궁금한데.”

“어쩌다가 사귀게 되었냐고.”

“……기억 안 나.”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성현은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형수에 관한 일이라면 머리카락 개수까지 세서 기억할 지독한 인간이 무슨.”

유현이 씨근덕거리며 성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성현은 어깨를 가볍게 털어 그의 손을 간단히 떼어 내고 걸음을 계속했다.

“뭐야. 왜 말 안 해 주는데!”

성현은 입술을 꾹 다물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역시 저놈을 쫓아내 버렸어야 한다는 후회를 되뇌며.

그 계기란 게, 소꿉친구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좆을 꺼내서 보여 준 것에서 시작되었단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 * *

태송현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무언가를 잔뜩 실은 트럭들이 연이어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타고 그 앞을 지나던 주민이 창문에 코를 대고 쳐다보며, ‘오늘 태송현에 행사가 있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면, 이미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태송현 담장 밑에 대포 같은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야 마땅했으리라. 그런데 하얀 눈이 쌓여 있는 태송현 담장의 처마 아래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나 담장 안의 태송현은 묘하게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다. 직원들은 소리 없이 조용한 발걸음을 종종거리며 걸었고, 바쁜 와중에도 그들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짙게 배어 있었다.

오늘 손주며느리를 위한 행사를 준비하라 지시한 권 회장의 기분이 최고조에 다다라, 준비로 고생한 직원들에게 전에 없이 넉넉한 수준의 특별 보너스를 지급했기 때문이었다.

응접실 한편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전나무가 위풍당당하게 세워져 있었다. 성현과 아연의 신혼집에 꾸며진 크리스마스트리는 아이들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몹시 거대한 트리였다.

증손주의 베이비샤워와 크리스마스를 겸한 정찬이 길게 이어진 후, 태송현 식구들은 모두 응접실에 편히 자리를 잡았다. 아연 역시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마치 날 때부터 그들의 일가에 속해 온 사람인 것처럼, 아무런 위화감도 없었다.

권 회장은 트리 아래에 쌓여 있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선물 상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 저거 다 네 거다.”

“회장님께서 직접 다 고르신 거야, 아연아. 하나하나 일일이 준비하시면서 얼마나 즐거워하셨는지 몰라.”

은애가 웃으며 권 회장의 말을 거들었다. 그녀의 말에 회장의 맞은편에 앉아 바둑 대국을 하던 유현이 코웃음을 치며 검은 돌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우리 조카님 하루빨리 태어났으면 좋겠네. 나 대신 이 지루한 바둑 상대 좀 해 주라고 하게.”

“어허. 재수 없는 소리. 예정일이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네놈이 한 말이 씨가 되어서 조산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소릴 지껄여.”

권 회장은 유현이 바둑돌을 내려놓은 자리를 내려다보며 정색하고 말했다.

“그래.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달칵. 직접 찻잎을 우려낸 윤재가 아연의 무릎 맡에 따뜻한 다기를 밀어 주며 막내아들의 철없는 발언을 나무랐다. 아연은 입가에 미소를 띠어 감사를 표하며 대화에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아녜요. 황 박사님 말씀이 이젠 언제 태어나도 괜찮을 정도로 아기가 크고 건강하다고 하신걸요. 36주에 접어들었으니 조산도 아니라고 하고요.”

“그게 다 저놈의 무식하게 큰 덩치를 닮아서 그렇지. 아가 네가 고생스럽게 말이야.”

권 회장이 못마땅한 눈길로 성현을 흘겨보았다. 제 조부의 따가운 눈길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만삭의 아내를 애지중지 보필하느라 바빴다. 자신의 가족들이 무어라 떠드는지는 관심조차 없는 모습이었다.

“무식하게 커다란 덩치는 권씨 집안 내력인데, 누굴 탓해요. 그게 다 할아버지를 닮아서 그런걸.”

유현이 끼어들어 날카롭게 지적했다. 하나같이 커다랗게 태어난 사 남매를 낳느라 고생깨나 했던 은애가 웃음을 지었다.

권 회장이 끙 하고 침음을 삼키며 하얀 돌을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바둑알의 마찰음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 * *

사시사철 푸르른 태송현의 소나무 위에 두껍게 쌓인 흰 눈이 푸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키 높은 나무들이 쏟아 내는 눈송이가 눈발처럼 정원 위로 흩어졌다.

“추운데 안에 있지, 왜 나와 있어.”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아연은 고개를 돌렸다. 성현이 부드러운 캐시미어 블랭킷을 그녀의 어깨에 두르며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테라스의 찬 공기에 서늘해진 아연의 입술을 머금으며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입술 사이를 열고 혀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뜨겁고 성마른 살덩이가 뿌리까지 얽으며 입 안을 자유로이 유영했다. 따스한 숨을 넘겨주는 키스에 얼었던 몸이 금세 뜨끈하게 풀리는 것만 같았다.

바람 한 점도 용납지 않겠다는 듯 담요로 꽁꽁 감싸 놓은 것으로도 썩 만족스럽지 않은지, 성현이 아연의 몸을 빈틈없이 부둥켜안았다. 그의 따스한 온기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전해졌다.

“성현아.”

쪽. 성현은 대답 대신 아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나 조금 무서운 것 같아.”

꽤 의연한 태도로 임신으로 인한 몸의 변화를 겪어 온 아연이었다. 하지만 예정일이 가까워져 올수록 출산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커져갔다.

가족들 앞에서는 능숙하게 씩씩한 척했지만, 성현까지 속일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녀의 표정 하나도 허투루 흘리지 않고 민감하게 캐치하는 남편이니까.

그런 그에게 두려운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자, 성현은 그녀의 마음을 훤히 안다는 듯한 따스한 눈길로 가만히 시선을 맞춰 왔다.

“미안해.”

“……응? 뭐가?”

“멋대로 널 임신시켜서.”

아연이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임신 초기에 그들의 임신 소식을 접한 그의 둘째 누나, 주은이 전화를 걸어와 성현을 놀리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적이 있었다. 피임약도 뚫은 지독한 정자가 아니냐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핸드폰 밖으로 흘러나왔었지.

그때에도 낯빛 하나 흐트러짐 없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성현이었는데, 속으로는 저런 마음을 갖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우리 애기가 우리한테 와 줘서 행복한데? 그걸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열 달 동안 이 무거운 걸 배에 넣고 다니느라 고생인데. 안 미안하면 그게 사람이야? 짐승 새끼지.”

그의 자조적인 말투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아연은 성현의 목에 팔을 두르며 넌지시 물었다.

“……나 그냥 수술할까? 진통이 그렇게 아프다던데. 미리 수술 날짜 잡으면 진통은 안 겪어도 될 거 아냐…….”

“해.”

네가 원하는데 못 할 것이 뭐가 있겠냐는 듯 그가 짧게 대답했다. 이미 머릿속은 담당의인 황 박사를 닦달한 생각으로 가득한 듯 그의 눈동자가 느슨하게 풀렸다.

부드럽게 휘어진 그의 눈매만큼이나 아연의 입꼬리가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심장이 쿵쿵 뛸 정도의 두려움은 어느덧 흔적도 없이 스러져갔다. 토닥이듯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따스한 손길에 모든 걱정 따위가 단숨에 휘발되었다.

이렇게 든든한 남편이 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아연은 발꿈치를 들어 어떻게든 키를 맞춰 보려 애쓰며 성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성현은 당연하게 상체를 숙여 그녀에게 키를 맞춰 주며 고개의 각도를 기울였다.

키스하기 좋은 각도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남편의 잘생긴 얼굴 위로 눈발이 흩날렸다. 하얀 눈송이가 높은 콧대에 소리 없이 내려앉아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로맨틱했다.

내리뜬 눈꺼풀 아래 깊은 호수처럼 새까만 그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직시한다.

사랑해.

아연은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그 눈동자 안에서 그의 목소리를 읽었다. 성현의 눈빛엔 형용하기 어려운 이상한 힘이 있었다.

“사랑해.”

그 서늘하고도 따스한 빛에 사로잡히면 눈을 뗄 수도,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처럼 세상이 멈추었다.

“사랑해. 한아연.”

그저 멍하니 시선을 마주하고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낀다.

사랑은 고통을 수반했다. 수천, 수만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열락 같은 감각.

“나도. 사랑해.”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듯 입술이 빠듯하게 겹쳐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허기를 채우는 것처럼.

<굶주린 짐승을 건드리지 말 것> 외전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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