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1화 (94/96)

<외전 21화>

어떻게 살살 꾀어내야 해답을 말해 주려나.

그는 복숭앗빛으로 상기된 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뻗었다. 불안한 사람처럼 꼼지락거리고 있는 아연의 손을 불쑥 끌어왔다. 손깍지를 끼우는데도 끝내 마주 잡아 주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로는 상처받지도 않는다. 성현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꾹꾹 내리눌렀다.

“아연아.”

“…….”

“한아연.”

“…….”

“자기야.”

기가 막힌 호칭에 아연이 졌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성현은 흡사 덩치 커다란 개가 아양을 부리듯이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뺨을 비볐다. 그러나 시선을 들어 아연을 바라보는 눈매만큼은 맹수처럼 사나웠다.

“무슨 일이야.”

“…….”

“말해.”

아연의 눈동자에 점차 물기가 차올랐다. 입 안의 속살을 깨무는지, 매끈한 뺨이 살며시 파였다.

성현은 참을성 있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을 기어이 외면하고는 고개를 숙인 아연이 핸드백을 열어 뒤적거렸다.

“뭔데 이게.”

성현이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당연히 뭔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아연이 슬그머니 내민 것은 초음파 사진이었고, 그녀가 왜 남의 초음파 사진을 갖고 있는지 의아했을 뿐이다.

‘요즘 추세는 혼수로 애부터 가지는 거라던데……. 우리 권 서방 생각은 어때? 참고로 나는 보기보다 생각이 트인 사람이라, 그런 쪽에 편견이나 고정관념 같은 거 전혀 없어. 찬성이야!’

결혼 전부터 대놓고 기대감을 내비치던 아연의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태송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직설적인 양반인 권민환 회장은 그 나름대로는 성질머리를 죽이고 우회적인 의견을 표출했다. 증손주 놀이터로 쓸 만한 가까운 섬을 매입했다는 식으로.

그의 부모는 점잖은 척 한 발 물러서 있는 태도를 유지하긴 했지만, 어차피 다 한통속인 게 뻔했다.

‘아연이 아직 어려요. 아연이가 어떻게 애를 가져.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아연의 앞에서 입이라도 벙긋했다간 태송현에 머리털 한 올도 보여 주지 않겠다는 협박으로 미리 입막음을 해 두었지만, 또 모를 일이다. 그 몰래 아연에게 은근한 압박을 가했는지도.

가장 유력한 범인은 권 회장. 불과 며칠 전에도 좋은 소식 없냐는 둥 넌지시 떠보는 전화를 걸었던 바였다. 성현은 어금니를 꾹 깨물며 아연이 손에든 초음파 사진을 낚아챘다.

이 노망난 노인네를 어떻게 해야…….

“……5주래.”

“어.”

“나는 엄마가 될 자격도 없는데. 어떻게 아기가 생긴 것도 모르고 매일같이 술이랑 약을…….”

아연이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어?”

성현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그답지 않게 머리 회전이 더뎠다. 이런 얼빠진 표정이나 짓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 지금 뭐라고…….

살면서 말문이 턱 막히는 듯한 무력한 기분을 느낀 적이 몇 번 없는데, 어떻게 된 게 죄다 아연과 관련된 경우였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의 아이 사진이고, 네가 우리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성현은 홀로 어깨를 움츠리고 흐느끼는 아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연은 그런 성현을 밀어내지 않고 품에 폭 안긴 채 그의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가녀린 팔에서 무슨 힘이 솟아나는지 신기할 정도로 꽤 야무진 주먹질이지만, 그에게는 기껏해야 귀여운 솜방망이질에 불과했다.

“기어이 널 임신시킨 남편이 그렇게 미우면 뺨을 때려. 그렇게 때려 봐야 네 손만 아프지.”

성현은 아연의 턱을 잡아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문지른 탓에 발갛게 부푼 눈가가 안쓰러웠다.

그렁그렁한 눈시울에 마구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비탄에 빠진 그녀를 달래 줘야 마땅한데, 어째선지 멍청한 표정만 나왔다.

“웃어? 웃음이 나와? 넌 아기가 걱정도 안 돼?”

뺨을 때리라는 의미로 고개까지 기울여 주자, 아연이 대노한 목소리로 그를 질책했다. 성현은 그제야 자신이 눈치도 없이 실실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기.

네 배 속에 너와 나의 아기가 살고 있다는데 어떻게 웃지 않을 수가 있겠어.

성현은 정확히 그의 명치를 노리고 날아오는 아연의 주먹을 낚아챘다. 파르르 떨리는 손목을 감싸 쥐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편 후 작은 손바닥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너 하나야.”

“……뭐? 나는 멀쩡한데 나를 왜 걱정해. 아기를 걱정해야지.”

“생명력 하나는 끝내줄 텐데 뭐 하러.”

성현의 태평한 소리에 아연이 기가 막힌다는 듯 탄식했다.

“온갖 역경을 이겨 내고 용케 이 작은 배 안에 자리를 잡았다잖아.”

그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으며 아연의 아직 납작하기만 한 배를 쓸었다. 음험하게 빛나는 눈빛에서 성현이 의미하는 역경이 기껏 술이나 약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지금까지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주 짐승같이 붙어먹었는데…….

매일매일 지진이 난 것처럼 뒤흔들렸을 배 속에 잘도 아기가 착상을 했다는 게 새삼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빠를 닮았다면 너한테 아주 잘 달라붙어 있을 거야. 끈질기게.”

황당한 소리이긴 하지만, 그의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성현은 마치 아기의 존재가 느껴지기라도 한다는 듯 그녀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연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눈가가 왈칵 뜨거워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차올라 흐릿해진 시야 안에 이상하게도 성현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흔들림 없는 눈길로 지그시 시선을 마주친 채로 말했다.

“내가 잘할게.”

넌 지금의 너로 충분해.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단 한 번도 그녀를 실망시킨 적 없는 이 남자는 늘 확고한 진실만을 말해 왔으니까.

온갖 불안이 일제히 씻겨 내려가고 대신 그 자리에 따스한 안도감이 채워졌다. 왠지 모든 게 잘되리란 든든한 확신이, 어떻게든 그가 그렇게 만들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연은 성현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가뿐하게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아앗.”

그의 허벅지 위에 내려지기 무섭게 아연은 깜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였다. 여전히 붉은 기운을 띤 눈시울이 껌뻑이더니 경계심을 담은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정말 이건…… 상황을 안 가리는구나?”

그녀의 말에 성현이 느슨하게 웃었다.

“내가 널 임신시켰다는 말에 자동적으로.”

“…….”

아연은 재빨리 아랫배를 손으로 덮었다.

아직 강낭콩 모양에 불과한 아기가 혹시라도 제 아빠의 음란한 언사를 들을까 봐서.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현의 다정한 손길이 그녀의 손등을 쓸었다. 쪽. 입술을 훔치듯 따스한 입맞춤이 온기를 남기고 멀어졌다. 아연은 저도 모르게 내리감았던 눈을 들어 성현을 마주 보았다.

차창 밖에서 쏟아진 후미등의 붉은빛이 남편의 잘생긴 얼굴 위로 불꽃처럼 일렁였다. 아연은 아기가 그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성현 역시 그녀를 따라 웃었다. 또다시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 * *

거실에서 테라스로 나가는 널찍한 공간에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가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받아 계속해서 색이 바뀌었다. 전나무 꼭대기에 놓인 별 모양의 크리스털 장식이 따뜻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티브이 화면에선 요맘때쯤이면 해마다 방영하는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때마침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이르렀지만, 애석하게도 정작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으……. 가슴 좀 그만 빨아. 흐윽!”

아연이 성현의 머리통을 밀쳐 내려 애쓰며 숨을 할딱였다. 그녀의 애원에도 성현은 꼼짝 않고 가슴을 쪽쪽 빨아 삼키고 유두를 있는 대로 괴롭혔다.

꿀렁. 무언갈 삼키듯 그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그제야 그는 입에서 젖꼭지를 뱉어 냈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스윽 훔치는 그의 얼굴은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미리 좀 뚫어 놓으려고 하는데 왜.”

“…….”

“갓 태어난 애가 뭔 힘이 있다고 젖을 빨겠어. 아빠가 빨아 놔야지.”

“…….”

“조만간 혀만 대도 모유가 줄줄 흘러넘치겠어. 이거 봐.”

성현이 조금 전까지 자신의 혓바닥 위에 놓고 잘근거리고 핥아대던 젖꼭지를 눈짓했다. 긴 애무로 붉게 부풀어 오른 젖꼭지에 연한 크림색 방울이 맺혀 올랐다.

“아연이 넌 정말 물이 많아. 알아?”

그는 젖꼭지의 끝을 적신 유즙을 손끝에 묻혀 유두 전체에 바르듯이 문질렀다. 성현이 이미 잔뜩 발라 놓았던 타액과 유즙이 뒤섞이며 통통한 젖꼭지가 번들거리고 난리였다.

하. 이러니 내가 안 빨고 참을 수 있겠냐고.

성현은 이성과 본능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서서 잠잠한 눈길로 아연을 내려다보았다. 가슴 두 쪽을 다 남편의 손에 내준 채로 울먹거리는 눈시울엔 야살스러운 정사의 기운이 배어 있었다.

임신으로 인해 원래 그녀의 것보다 더 커진 가슴 아래로 둥글게 부푼 배. 아연은 아기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손으로 배 아래쪽을 살며시 감싸고 있었다. 이 작은 몸으로 용케 아기를 품고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배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아연이 제 발로 여기저기 걸어 다니는 것조차 아까워서 그가 훌쩍 안아 들고 옮겨 주어도 부족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당장 앞으로 고꾸라진다 해도 놀라지 않을 만큼 배가 부풀어 오른 그녀의 모습을 보면 간담이 서늘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등골이 뻐근해지고 심장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담당의인 황 박사의 말에 따르면 비교적 순조로운 임신 기간이었다. 아연은 부쩍 먹는 양이 많아져 그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성현에게 옮기라도 한 듯 고기를 선호하는 쪽으로 거짓말처럼 식성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제 아빠를 닮으려나 보다. 내가 성현이를 가졌을 때도 어찌나 하루 종일 허기가 지던지, 밥을 배불리 먹고도 금방 돌아서면 입이 심심해서 혼났어. 틈만 나면 부엌을 전전했다니까.’

이따금 태송현에 얼굴을 비칠 때마다, 은애는 자신의 임신 경험을 떠올리며 배 속의 아기가 성현을 닮았으리라 주장했다.

사실 성현으로서는 그다지 달가운 소리는 아니었다.

언젠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슬쩍 챙긴 아연의 어릴 적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열어 보는 사람답게, 성현은 배 속의 아이가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를 닮았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막달에 다다른 지금으로선 은애의 주장에 큰 힘이 실렸다. 배 속 아기의 성별이 남자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주기적인 검진 때마다 아기는 같은 주 수의 평균 키와 몸무게를 훌쩍 뛰어넘는 압도적인 체격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닮아도 왜 무식하게 커다란 덩치를 닮아서…….’

‘아기한테 무식하다니! 배 속에서도 다 들어. 무슨 아빠가 이래.’

‘네가 힘들잖아.’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가 아연으로부터 괜한 미움만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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