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6화>
전화를 끊은 아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 빠른 성현이 어쩐지 의심을 시작한 듯한 분위기였지만, 어차피 완벽하게 속일 수 있으리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연은 몸을 돌려 규영과 민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손님이 한 명도 없는 한가한 카페의 조리대에서 머리를 가까이 맞대고 있었다.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민재 옆에서 규영이 한가로이 턱을 괸 채 그가 하는 것을 구경하며 중얼거렸다.
“어쩜 생일도 6월 7일이야? 하다 하다 생일까지 근사할 일이냐고…….”
민재가 흘끗 눈을 들어 규영을 쳐다보았다. 근사할 일도 많다……. 그는 불만스러운 눈빛을 겨우 숨기고 지나가듯이 물었다.
“6월 7일이 무슨 날인데요?”
규영이 손톱 옆에 난 거스러미를 뜯으며 대답했다.
“아무 날도 아닌데요.”
“뭐야…….”
황당한지 민재가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 날도 아니긴 한데, 그분 생일이라고 하니까 왠지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 있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모르겠는데요.”
민재의 냉정한 대답에도 규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 앞에 두 손을 가지런하게 모았다.
“이 정도면 크리스마스라든가 부처님 오신 날같이 나라에서 공휴일로 지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아, 내 남편도 아닌데 왜 내가 뿌듯하냐.”
규영이 한탄하듯 주먹 쥔 손에 뺨을 깊게 묻었다.
“그러게요. 규영 씨가 왜 뿌듯해하세요? 정신 차리세요.”
“뭐야? 왜 이렇게 까칠해? 질투해요?”
“……아닌데요.”
민재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연은 입술을 깨물어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두 사람 옆에 다가가 섰다.
“와아, 민재 씨는 정말 손재주가 좋구나.”
아연은 아까와는 몰라보게 달라진 케이크를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통화를 하러 가기 전 아연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케이크의 모습은 정말이지 볼품없었다.
옆면에는 생크림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고, 윗면은 균일하지 못해 군데군데 시트지가 드러날 정도였다. 얼핏 바닥에 떨어뜨렸다가 간신히 건져 놓은 것 같은 형편없는 모양새였는데, 이건 민재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민재가 케이크의 표면을 다듬던 스패출러를 내려놓고 돌림판을 빙글 돌렸다.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점검하듯 눈을 케이크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제 직업적 양심상 도무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조금만 손봤어요. 원래의 느낌은 살리되 너무 엉망인 곳만 대충 다듬었는데, 마음대로 만져서 죄송해요, 사장님.”
몹시 예의 바른 말투였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보면 아연이 만들어 놓은 졸작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었다.
아연은 아까보다 훨씬 보기 좋아진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어찌 됐든 이제야 좀 선물같이 보이는 모습인지라, 민재의 참견에도 화가 나기는커녕 마음이 뭉클했다.
너무 잘 만들었는데? 내가 만든 거 맞아?
본인의 솜씨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아연은 자화자찬하며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하긴요. 그 상태로는 남편한테 보여 주기 뭐해서 그냥 주지 말까, 살짝 고민이었는데 훨씬 예뻐요. 대신 그냥 내가 만든 척해도 될까?”
“그럼요. 제가 주제넘게 손댔다는 거 아시면, 기분 나빠하실 거예요. 절대 비밀로 해 주세요.”
민재가 돌림판에서 손을 떼어 냈다. 아연은 두 사람과 함께 나란히 서서 반쯤 완성된 케이크를 응시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맞는 성현의 생일. 아무런 부족한 게 없는 남자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것은 몹시 고단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갖고 싶은 거? 너.’
혹시 필요한 게 없는지 넌지시 묻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하등 쓸모없는 것뿐이었다.
‘너랑 하고 싶은 건 있어. 해 줄 거야?’
그리고 순 음란한 것들뿐.
성현은 이때다 싶었는지 평소라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귓가에 유혹하듯 늘어놓아 아연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와는 온갖 짓을 다 저지른 줄 알았는데 아직도 범접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간신히 생각해 낸 게 바로 이 직접 만든 케이크였다. 물론 직접 만들었다고 거창하게 말하기엔 이미 완성된 시트지 위에 생크림을 바르는 정도였지만.
“그리고 사장님이 만드신 거라면 아무리 못생긴 케이크였어도 엄청 좋아하셨을 거예요. 없는 솜씨지만 어떻게든 만들어 보려는 그 도전 정성이 기특하게 느껴져서…….”
민재가 말투만 공손하게 한 신랄한 힐난을 계속했다. 아연의 형편없는 손재주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요 며칠 성현이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늦은 시간까지 카페에 남아 요란하게 연습을 했는데도 실력은 늘지 않았다.
“이제 위에다가 장식하고 글씨만 쓰면 되겠다. 몇 시간 후면 남편이랑 집에서 만나기로 해서 얼른 완성해야…….”
아연은 긴장한 얼굴로 짤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민재가 그런 아연을 다급하게 막아섰다.
“잠깐만요. 곧바로 하지 말고 여기 옆에다가 먼저 짜 보세요. 제가 한번 봐 드릴게요.”
“음, 연습 많이 했는데…… 잘될지 모르겠네.”
아연이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동안 손목이 욱신거릴 정도로 연습했던 결과물들을 하나씩 선보인 후 고개를 들었다.
“…….”
민재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규영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다가, 아연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하는 척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기대감에 눈을 반짝거리던 아연이 울상을 지었다.
남편의 귀가까지는 고작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 * *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카페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성현은 문에 걸려 있는 클로즈드 팻말을 무시하고 손잡이를 밀었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유리문은 저항 없이 열렸다.
조명이 꺼진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도란도란 주고받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조리대 근처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다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에 고요한 시선이 가 닿았다.
가게 입구에 등을 지고 선 아연의 뒤쪽에 알바생이 바짝 붙어서 있었다.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져 있는 게 금방이라도 등 뒤에서 끌어안을 듯한 자세였다.
성현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마 저 알바생이 서 있는 자리에선 달짝지근한 아연의 체향이 진동을 할 터였다. 머리가 녹진해질 정도로 그 아찔한 단내를 다른 놈이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도와주느라 쉬지도 못하고 어떡해요. 나 혼자 해도 됐는데…….”
그때 아연이 살짝 고개를 돌려 알바생을 쳐다보며 종알거렸다. 카페의 입구 쪽에 서 있는 성현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옆에서 알바생이 무어라 대꾸하는지는 들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시키지도 않은 도움을 자처해 놓고 생색이나 떨고 있을 게 뻔하지.
알바생이 씨불이는 말에 아연이 환하게 웃었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당겨 왔다.
말랑한 그 귓불이 닳고 닳도록 다른 사내새끼들의 시커먼 속과 더러운 사상에 대해 주입시켜 왔건만. 그의 마음씨 좋은 한아연은 너무 세상의 밝은 면모만 바라보는 너그러운 여자였다.
그러니 제 남편이 투기와 집요한 광기로 똘똘 뭉쳐 있는 치졸한 사내란 것도 모르고 저렇게 허술하게…….
성현은 목을 답답하게 조이는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걸어 당겨 내리며 실소를 흘렸다. 지금껏 저 눈엣가시 같은 알바생을 치우지 않고 방치한 스스로의 안일함에 기가 막혔다.
그가 카페에 드나드는 손님을 관리하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였다. 아연의 손을 잡고 외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직후, 음습한 호기심을 가진 날파리들이 귀찮을 정도로 카페 주변에 얼레벌레 몰려들었다. 그 즉시 성현은 차근차근 계획해 오던 것을 실행에 옮겼다.
카페를 찾는 손님의 성비가 독보적으로 여자 쪽에 치우쳐졌다. 깜찍하게도 애초에 카페가 인기를 얻은 이유를 성현 때문이라고 믿는 아연은 다행히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점점 줄어가는 손님 수와 비루한 매출. 그 때문에 종종 아연이 울상을 짓기도 했지만, 손님이 많아서 몸이 힘든 것보다는 나았다.
매출 고민에 빠진 아연의 곁에서 성현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주변에 얼쩡거리는 유일한 남자인 알바생을 처리하지 못하고 남겨 두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연이 눈치챌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때 같이 치워 버렸어야 했는데…….
“어? 언제 왔어?”
한참 늦게 성현을 발견한 아연이 깜짝 놀라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덩달아 뒤를 돌아본 알바생은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고 허둥지둥 선반 위를 정리했다.
“집에서 만나자니까. 피곤할 텐데 왜 여기까지 왔어.”
아연이 그를 부드럽게 나무라며 등 뒤로 손을 움직였다. 귀엽기도 하지. 무언가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두 분 다 피곤하실 텐데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정리할게요.”
민재가 조리대를 등지며 아연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녀의 어깨에 닿은 손을 가만히 쳐다보자 찔끔했는지 후다닥 떨어져 나갔다. 명치 아래가 쑥 꺼지는 것처럼 기분이 바닥을 모르고 가라앉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아연이 카운터 문을 열고 나와 성현의 손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목줄을 끊고 뛰쳐나가 발광하기 직전의 맹수를 달래는 듯한 손길이었다.
성현은 아무런 말도 보태지 않고 기다란 눈매를 천천히 휘어뜨리며 나른하게 웃었다.
네 성질 나쁜 개새끼가 발광할 만한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아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