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5화 (88/96)

<외전 15화>

소싯적 자신도 나름대로 꽤나 열정적인 신혼 생활을 보냈다고 자부하는 김 실장은 본인의 추억을 되짚어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신혼의 달콤함은 누구나 겪는다 치더라도, 저 괴물 같은 체력만큼은 보통 인간의 영역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모듈 제조 설비를 갖춘 해외 법인을 순회하는 이번 출장 일정은 말 그대로 숨 가쁘게 이어졌다. 싱가포르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대만에서 마무리된 극악의 강행군.

각 나라에서 이틀이란 시간을 꽉 채워 모든 스케줄을 빡빡하게 소화하였고, 이동 시간을 줄일 목적으로 수면 시간을 아껴가며 밤에 이동했다. 총 출장 일정을 최소화하라는 권성현 본부장의 뜻에 따른 그야말로 미친 일정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저처럼 무한으로 샘솟는 강철 체력을 타고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지, 성현은 두 명의 수행 비서를 추가로 투입하도록 명했다. 덕분에 세 명의 비서진은 일정을 나누어 소화하며 그를 수행했다.

실질적으로 대만에서만 성현을 모셨던 김 실장은 지난 3일의 출장만으로도 완전히 진이 빠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아무 데나 머리만 뉘면 당장이라도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히려 평소보다 더 힘이 펄펄 넘치는 발걸음으로 아내의 곁으로 달려갈 생각을 하다니. 김 실장은 사뭇 경이로운 눈길로 성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보이는 것은 잘생긴 뒤통수뿐이지만,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을 눈동자가 눈에 선했다.

“카페로 데리러 갈게.”

성현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속삭였다. 왠지 모를 초조감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연은 아쉬움 한 점 없는 말투로 속 타는 소리를 했다.

- 아냐. 그냥 집에 가 있어. 공항에서 여기까지 왔다가 집으로 가려면 멀리 돌아가는 거잖아. 그냥 집으로 가는 게 훨씬 빠른데. 피곤할 테니까 내가 시간 맞춰서 갈게. 집에서 봐.

조곤조곤한 아연의 목소리에 성현이 피로감이 느껴지는 눈가를 문질렀다.

어디까지나 지금 그가 피곤한 건, 일주일이나 한아연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보지도 안지도 못한 지난 일주일의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그 풍성한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폐부 가득히 아연의 냄새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너무 오래 그녀를 안지 못한 탓에 몸 안의 생명력이 바닥난 기분이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아연을 만나야 비로소 멎었던 숨이 쉬어질 것처럼 가슴이 갑갑했다. 그런 자신의 조급함과 형편없이 비루한 참을성을 뻔히 알면서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깜찍한 배려가 미치게 사랑스럽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아연의 말대로 혼자 집으로 기어들어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안 피곤해. 일주일 동안 설렁설렁 놀다 가는 길인데 피곤은 무슨.”

심드렁한 성현의 말에 비서진 세 사람이 몹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널 안 봐서 피곤해.”

그는 낯간지러운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잘도 속삭였다.

그동안 성현의 칼 같은 모습만 보아 왔던 신규 비서진 두 사람이 놀란 입을 반쯤 벌리고 서로를 응시했다. 의미심장한 시선이 오가며 발걸음이 주춤주춤 멈추었다. 찬바람 쌩쌩 날리는 까칠한 돌부처 같던 본부장이 저런 말도 할 줄 안다니.

“널 봐야 힘이 좀 날 것 같은데.”

게다가 밀어를 속삭이는 목소리는 또 어떠한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양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냉정하게 업무 지시를 내리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직 김 실장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노련하게 두 팔을 휘저어 나머지 두 사람을 뒤로 멀찍이 물러나도록 했다. 권성현 본부장이 아내의 앞에서는 인격이 바뀐다는 사실에 신입들이 익숙해지려거든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멀찌감치 뒤처진 비서진을 일별한 성현은 통화를 이어가면서 무신경하게 앞서 나갔다.

“그거 알아?”

- 응?

귀엽게 되묻는 아연의 목소리에 그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어젠 너무 보고 싶어서 자위했어.”

듣는 귀가 사라지니 그의 밀어는 더욱 과감해졌다. 핸드폰 너머에서 말문을 잃고 입을 열었다 닫고 있을 아연의 모습을 떠올리니 배 속이 간질거렸다. 기다란 눈매에 서린 장난기가 짙어졌다.

“아내가 그리워서 밤새 좆이 까지도록 주물럭거리기나 했는데, 남편 물건이 여태 멀쩡히 잘 달려 있는지 보고 싶지 않아?”

- 보고 싶지. 보고 싶은데…….

“그런데?”

- 그래도, 오지 마.

성현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혼자 문질러대느라 까진 좆이 아프지 않게 입으로 불어 달라는 둥 실없는 농담을 지껄일 생각에 장난스럽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굳어졌다.

난감한 듯 머뭇거리는 아연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의 방문을 꺼리는 듯한 수상한 낌새였다.

게다가 싸한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젯밤 아연이 그와의 영상 통화를 거절했던 의심쩍은 일까지 연쇄적으로 떠오른 탓이다. 늦은 시간까지 카페에 남아 있다는 이유로.

지금 생각해 보니 몹시 어설픈 핑계에 불과했다. 카페 탈의실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그녀와 폰섹스를 주고받았던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주로 그가 음란한 언사를 지껄이면 못 이기는 척 받아 주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아연 역시 은근히 즐기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었다.

어젠 왜 이상한 걸 못 느꼈지?

아내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에 변태처럼 흥분해서 별생각 없이 좆 빠지게 자위나 하기 바빴던 전날의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성현은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가만히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그가 작은 숨소리의 변화 하나 놓치지 않을 것처럼 호흡을 낮추고 속삭이듯 물었다.

“왜? 이제 내가 부끄러워?”

덫을 놓듯 넌지시 던진 질문이었으나 반쯤은 진심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그동안 그녀가 부끄러워할 만한 짓거리만 골라서 신나게 저질러 온 것도 사실이니.

- 뭐?

아연은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었다는 양 가볍게 웃었다.

“부끄러워할 리가 없잖아. 권성현인데.”

권성현이니까. 그것으로 모든 대답이 된다는 것처럼, 아연이 뒷말을 줄였다.

그녀는 가끔 저렇게 알 수 없는 말로 그를 손쉽게 쥐었다 펴곤 했다. 이러니 멍청하게 얼이 빠져서는, 아내의 이상한 기색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해진 거겠지.

“그럼 왜? 예전엔 내가 카페에 가는 거 좋아했잖아. 매일 오라고 막 네가 먼저 유혹했으면서.”

한때는 아연이 그를 손님 끌어들이기용 얼굴마담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때마다 그녀는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아연을 부끄럽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잊을 만하면 그 사실을 살살 언급해 그녀의 양심을 건드렸다.

역시나 전화기 너머로 아연이 숙연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건 내가 너무 세속적인 인간이라 그런 거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노력하지 마. 누가 너한테 그런 노력을 하래?”

- …….

“난 네가 세속적인 게 좋아. 더 심하게 세속적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나보다 돈 없는 놈한테 한눈팔 일은 없을 테니까.”

- 누가 들으면 내가 돈 때문에 널 좋아하는 줄 알겠다. 그런 거 아닌데.

“알아. 돈 때문이 아니고 내 좆이 커서 좋아한다는 거.”

- 뭐?

아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내 좆이 네 마음에 들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성현은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자신의 하체를 응시했다.

- ……주변에, 사람들 있는 건 아니지?

잔뜩 불안감이 서린 목소리로 아연이 물어 왔다. 성현은 멀찍이에서 뒤따르는 비서진에겐 눈길조차 흘리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 까마득히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의 대화가 들릴 리 없건만 굳이 그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비서들은 있지.”

끙 하고 침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을 아연의 곤란한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끝도 없이 짓궂게 굴게 되는 걸 여태 모르는 모양이었다.

- ……이만 끊을래.

힘없이 중얼거린 아연이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 그리고 정말 괜찮으니까, 카페로 오지 말고 집에서 만나. 알았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역시 수상하기 짝이 없다. 마치 거기에 무얼 숨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성현은 전면 유리창 너머로 대기하고 있는 전세기를 가만히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연아, 나한테 숨기는 거 있는 건 아니고?”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민망한 듯 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아연이 말했다.

- 그, 그런 거 없어. 그냥, 손님들이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그래. 아무래도 나만 있을 때는 잘 몰라도, 네가 함께 있으면 알아보는 사람이 많으니까.

성현은 그의 아내가 조곤조곤 늘어놓는 허접한 변명을 들었다. 작은 새가 지저귀는 듣기 좋은 노랫소리라도 듣는 양 입가엔 미소마저 띄우고.

“그래. 그럼. 비행기 탄다. 끊어.”

여상한 목소리로 아연을 안심시킨 그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정장 재킷 안 주머니에 집어넣는 성현의 입매에 밴 미소는 그의 결혼식 날 머리 위로 쏟아지던 봄볕처럼 따스했다.

“본부장님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성현이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용케 들은 비서가 덩달아 고양된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집에 가고 싶으시겠어요. 신혼이신데.”

다른 비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김 실장 혼자 무언가 찜찜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그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성현의 새까만 눈동자가 오뉴월의 서리처럼 시퍼렇게 빛나는 것을.

성현은 세상 너그러운 얼굴로 전세기에 올랐다. 이윽고 이륙한 비행기가 정상 고도에 오를 때까지 느긋하게 기대앉아 조금 전의 통화를 곱씹었다.

그의 귀여운 한아연은 거짓말에 젬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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