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봄이 절정에 다다른 5월의 어느 날,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길이 열렸다. 결혼식은 남해에 위치한 그룹 소유의 섬에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태강그룹이 섬을 매입했단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간에서는 태강이 리조트형 호텔 사업을 확장하려는 계획일 거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그에 한때 그룹의 주가가 치솟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권 회장이 일가의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한 별장으로 꾸민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룹 내에서도 얼마 되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한 남해의 섬은 내륙에서 외따로 동떨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프라이빗한 결혼식을 치르기에 적격이었다.
10여 년 만에 태강그룹 총수 일가가 치르는 행사인 데다, 언론의 주목도가 높은 황태자의 결혼식. 이를 사진이나 영상으로나마 엿볼 수 있기를 고대해 왔던 사람들은 안타까움의 탄식을 금치 못했다.
성현의 결혼 소식이 알려진 직후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결혼식 날짜만을 목 빠지게 기다려 온 언론에서는 연일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국민의 알 권리를 훼손하는 이기적이고 오만한 결정이라며 최소한 주요 언론을 상대로 한 보도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둥의 떼쓰기 식 논평을 내놓았다.
하지만 끝끝내 언론 관계자의 섬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었으며, 공식적으로 결혼식에 초대받은 언론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는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으리란 희망 속에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한강준 의원 측도 마찬가지였다. 의원 본인을 포함해 측근이나 가족 중 그 누구도 그의 유일한 딸인 아연의 결혼식 초대장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포기를 모르는 언론에선 결혼식을 취재하기 위해 섬 근처에 요트는 물론 헬기까지 띄워 올렸다.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지만, 운 좋게 사진 한 장이라도 건진다면 그 언론사는 천문학적인 광고 효과를 얻을 터. 그들이 손해를 감수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으리라.
전 국민이 칭송해 마지않는 태강그룹 황태자와 실직한 삼선 의원의 고명딸이 치르는 결혼식의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 여러 언론이 앞다투어 참전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남해의 섬 주변은 금세 눈에 불을 켜고 하이에나 떼처럼 몰려든 기자들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건진 유일한 소득은 권씨 사 남매 중 가장 성질이 고약하기로 이름난 막내아들이 카메라를 향해 심드렁하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는 사진뿐이었다.
“유현이 저놈은 여기까지 와서 또 전화통 붙들고 뭐 하고 있는 게야. 제 형 결혼식보다 중요한 일이 무어라고.”
권 회장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혀를 쯧 찼다. 그의 못마땅한 시선이 하객석을 등지고 서 있는 손자의 널따란 등에 꽂혔다.
“한국 와 있는 동안 미국에 있는 집을 봐주기로 한 친구랑 통화가 잘 안 되는 모양이더라고요.”
권 회장의 팔짱을 낀 채 옆에 붙어 서 있던 주은이 지나가듯 말했다. 주은의 말에 권 회장이 한심하다는 듯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는 집이 그사이에 도망이라도 간다더냐. 뭣 하러 전화까지 해서 집이 잘 있는지를 확인해?”
“거기에 무슨 꿀단지라도 숨겨 놓고 왔나 보죠.”
권 회장과는 달리 유현이 무얼 하는지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듯 주은은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줄곧 고개를 뒤로 빼고 무언가를 기다리던 그녀가 어느 순간 몸을 들썩이며 환하게 웃었다.
낮은 구릉의 끝에서 성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복을 갖춰 입은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근사했다.
찬란한 햇살이 그의 머리맡에 축복처럼 쏟아졌다. 바다 내음을 실은 바람 또한 코끝을 간질였다. 결혼하기에 완벽한 날이었다.
성현은 느긋한 눈길로 눈앞에 초록색 잔디로 뒤덮인 완만한 언덕을 바라보았다. 야트막한 오르막의 끝에는 장미 꽃잎이 바닥에 흐드러지게 깔린 채, 그가 곧 아내의 손을 잡고 걸어야 할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아내. 아내라고.
기분이 끝없이 고조되었다. 현실과 비현실에 경계에 선 듯한 묘한 감각에 심장이 지끈거렸다.
오늘 한아연의 법적인 남편이 된다.
그 사실이 그를 헤어나기 어려운 중독으로 몰아갔다. 미약에 취한 사람처럼 꼴사나운 웃음이 실실 흘러나오는데 도무지 자제가 되지 않았다.
딱히 참아야 할 이유도 없지.
성현은 태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를 중독시키고, 그를 미치게 만드는 위험천만한 존재가 그에게 시선을 마주쳐 왔다. 투명하리만큼 맑은 눈을 들어 그야말로 미약 같은 미소를 짓는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베일이 눈부신 햇살을 받아 은하수처럼 빛났다. 하지만 그 어떤 값진 다이아몬드도 베일을 늘어뜨린 아래에서 수줍게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보다 아름답게 빛나진 않았다.
구불구불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바다 내음을 실은 바람에 그림처럼 흔들렸다. 그 바람을 타고 아연의 달콤한 냄새가 그에게 닿자 숨이 멎을 듯이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누가 이렇게 예쁘래.”
결혼식장에 걸어 들어가는 길목에 서서, 숨 막히게 아름다운 아내에게 고작 이따위 한심한 말이나 지껄이다니.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탈한 실소가 흘렀다. 꾹 억눌린 목소리마저 멍청하게 들렸다.
“누가 할 소리를.”
그런 성현의 말이 웃겼는지, 아연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 애간장을 녹이는 웃음소리가 심장을 왈칵 쥐어짰다.
결혼식장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 정신을 빼놓으려고 작정을 했나.
심장의 울림이 흡사 고통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보다 난감한 것이 따로 있었으니, 습관적으로 하체가 심상치 않게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눈치도 없는 좆대가리에 바짝 힘이 실리며 바지 안에서 신나게 꺼떡거리는 게 느껴졌다. 성현은 그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제가 앞뒤 안 가리고 아내에게 좆을 세우는 정신 나간 놈이라지만, 발기한 채로 하객 앞에 서야 할 위기 상황에 봉착하자 뒤통수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연이 부케를 들지 않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살며시 감쌌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너무 행복해.”
“하……. 한아연 넌 진짜…….”
성현은 완전히 졌다는 얼굴로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뭐, 결혼식장에 좆 세우고 들어가는 놈이 어디 나 하나겠어.
그의 매끈한 뺨에 스며 있던 옅은 당혹감은 온데간데없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곤 이내 태생적으로 당당하고 뻔뻔한 천성이 드러났다.
성현의 변화를 감지한 아연이 불안한 눈동자를 살그머니 아래로 굴렸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아연의 눈이 더욱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아랫도리를 세울 줄은 미처 몰랐는지, 아연은 크게 당황하며 성현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얼른 떼어 냈다.
가녀린 손가락이 닿았다가 홀연히 떠나간 자리에 남은 감각이 서늘했다. 성현은 경직된 눈으로 아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단전 아래에서 솟구쳐 올랐다.
아연의 몸에 하늘하늘하게 감긴 드레스는 나비의 여린 날개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그 순간 배일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금색 햇볕을 받아 반짝 빛났다.
성현은 부신 눈을 감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마치 그녀를 잃기라도 할 것처럼.
요정 같은 자태의 아연은 마치 연기 같았다. 그녀가 하룻밤 꿈결처럼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불안감을 억누른 강한 손길이 아연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아…….”
그녀는 마치 잃어버린 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성현의 품에 쏙 안겨 들어 왔다. 마주 닿은 가슴이 속절없이 뻐근하게 차올랐다.
아내.
나의 아내.
나의 한아연.
단 한 번도 의심치 않았던 그 당연한 사실이 거대한 충격처럼 의식을 덮쳤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내가 정말 너의 남편이 된다니.
각각 흩어졌던 삶의 모든 순간이 결국 이 순간을 위해 쌓아 온 시간이라는 고양감이 크게 부풀었다.
그녀의 옆에 서서, 그녀의 남편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분명한 깨달음이 가슴 속에 불씨를 떨어뜨린 것처럼 삽시간에 퍼졌다.
“아앗!”
성현이 불쑥 팔을 뻗어 아연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때맞춰 시작된 현악기의 음악 소리가 낮은 구릉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아내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남자가 태연한 걸음걸이로 야트막한 오르막을 올랐다. 흰색과 분홍색, 붉은색 장미 잎이 뒤섞인 꽃길에 이르러서도 그는 아연을 내려 주지 않았다.
평소에 그녀가 걷는 것조차 아까워하던 성현이 결국 아연을 훌쩍 안아 든 채 식장에 들어서자, 그를 제외한 권씨 남매 세 사람은 차마 눈 뜨고는 못 보겠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손자들 옆에서 권민환 회장만이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 * *
“공항이야. 곧 비행기 타니까 어림잡아 네 시간이면 도착할 거야.”
성현은 공항의 VIP용 통로를 거침없이 걸으며 손목의 시계를 흘끗 확인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고 굵직한 허벅지에 고급스러운 정장 팬츠가 보기 좋게 들러붙었다. 한 발짝 뒤에서 성현을 뒤따르던 김 실장이 소리 없이 웃음을 삼켰다.
언뜻 보아서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태연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족히 남들의 두 배는 됨직한 너른 보폭을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걸이에서 그가 인내심의 한계치에 다다라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김 실장을 포함해 이번 출장에 동행한 두 명의 수행 비서는 성현을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듯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가 뒤따르는 비서진을 배려하여 적당히 제 속도를 조절한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김 실장이다. 그러니 그런 김 실장만이 캐치할 수 있는 미묘한 변화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이어진 첫 해외 출장. 가장 꿀이 떨어질 시기에 죽고 못 사는 아내의 곁에서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었으니 얼마나 몸이 달았을지.
권성현 본부장의 유난한 아내 사랑을 너무 잘 아는 김 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을 때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