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2화 (85/96)

<외전 12화>

성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있어. 본가에 네 방 있잖아. 집 놔두고 왜 여길 기어들어 와서 헛소리를 지껄여.”

“거기서 도망친 길이야. 할아버지가 너무 귀찮게 해서. 귀국하자마자 붙잡혀서 하루 종일 바둑에 장기에……, 상대해 주느라 눈알 빠질 뻔했어.”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지 유현이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다가 시차 적응도 아직 안 됐는데 어린놈이 낮에 드러누워 잠자는 꼴 보기 싫다고 방문 따고 들어와서 괴롭히잖아. 내 눈알 꼴 좀 봐.”

그가 보란 듯이 자신의 충혈된 눈을 검지로 가리켰다. 그리곤 거실 테이블에 던져 놓은 검은색 더플백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팬티만 몇 장 겨우 챙겨서 도망 나왔어.”

성현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인상을 구기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호텔 가.”

“아, 싫어. 나 호텔 싫어하는 거 알잖아. 누가 드러누웠는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침대 쓰는 거 질색이야.”

유현이 신경질을 부리며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나가라고 하면 거실에 드러누워 어떻게든 버텨 볼 생각이었다.

“내가 집안일도 도울 수 있고, 없는 것보다 나을 거라니까? 오랜만에 셋이 모이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유현은 회유 쪽으로 전략을 바꾸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시선이 마주치자 성현은 오히려 정색을 했다.

아무래도 쉬운 쪽부터 공략하는 게…….

유현은 고개를 돌려 아연을 향해 한껏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성현과 찍어 놓은 듯 비슷한 골격과 이목구비는 본능적으로 아연의 마음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그리고 옅은 색감을 띤 다갈색 눈동자와 머리카락 때문인지, 유현은 미색이 줄줄 흐르던 어린 시절의 인상이 훨씬 많이 남아 있었다.

세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절로 웃음 지어지는 몇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아연이 그들의 본가에 놀러 갈 때마다 어린 유현은 저도 같이 놀고 싶다는 얼굴로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성현이 가차 없이 쫓아내는 바람에 엉엉 울며 떠밀려 나갔지만.

“그래도 본가보다는 불편한 게 많을 텐데…….”

마음 약해진 아연이 중얼거렸다. 유현은 그런 아연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고 해맑은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다.

“내일 마저 필요한 짐 챙겨 오면 되지, 뭐. 걱정하지 마, 누나.”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성현을 흘끗 곁눈으로 살핀 유현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니, 이제 형수님이라고 불러야겠네.”

“아아…….”

“아무쪼록 우리 형 잘 부탁드릴게요, 형수님. 형수의 넓은 아량에 비하면 부족한 게 많은 형이지만.”

성질도 괴팍하고. 봐줄 만한 건 낯짝이랑 몸매 정도…….

유현은 하고픈 뒷말을 간신히 생략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팬티 몇 장만이 굴러다니는 가볍디가벼운 자신의 더플백을 훌쩍 집어 들었다.

이제 방을 고를 시간이었다.

* * *

“하…….”

긴 한숨을 내쉰 유현이 이불을 거둬 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시차는 그럴듯한 핑계일 뿐, 실은 지독한 불면증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옆으로 뻗은 손이 협탁 위를 더듬었다. 나뒹굴던 담뱃갑을 집어 든 그가 가장자리를 툭툭 쳐서 머리를 내민 담배 하나를 습관적으로 입에 물었다.

무의식중에 라이터를 켠 유현은 짜증 섞인 실소를 터뜨렸다. 제집에서 하듯 침대 위에서 불붙인 담배를 꼬나물었다간,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쫓아낼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을 권성현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유현은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문 채로 침대를 벗어났다. 몸을 일으키니 두통이 더 짙어졌다.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채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를 뒤로한 유현이 기다란 복도를 느릿느릿 벗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좁은 방의 답답한 공기를 벗어나서인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입에 문 담배가 위아래로 조금씩 흔들거렸다.

쿵.

그가 거실을 가로지르는 순간 이상한 소음이 들려왔다. 위아래로 흔들리던 담배의 움직임이 멈칫 멎었다. 입 안에서 장난치듯 필터 끝을 굴리던 유현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입에서 뱉어 냈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유현이 거실 건너편을 응시했다. 발코니를 통해 정원으로 나가는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야밤의 청량함을 담은 상쾌한 바람이 유혹하듯 밀려들어 두통을 잠시 앗아갔다.

쿵쿵.

잠시 멎는가 싶었던 소음은 재차 이어졌다.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정원 쪽으로 향하던 유현이 마지못해 걸음을 멈췄다.

규칙적으로 울리던 소리는 점차 규칙을 잃어가는 형상이었다. 점점 커지는 듯싶기도 했다. 변칙적인 리듬 사이에 들릴 듯 말 듯 한 무언가가 뒤섞였다.

“아…….”

유현이 작게 탄식했다. 처음부터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아마도 지독한 수면 부족으로 절여진 뇌가 생각을 멈춘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눈치가 없을 수가…….

침대 헤드가 벽을 쿵쿵 찧는 소리에 맞춰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유현은 담배 필터를 잘근 씹으며 피식 웃었다.

“침대 무너지겠네.”

어쩐지 이 2층짜리 저택에 넓고 넓은 방이 사방에 남아도는데, 어째서 그 흔한 발코니도 없는 2층 가장 구석탱이에 처박힌 방을 내주나 했더니.

유현은 제 형의 음흉한 속셈에 혀를 쯧 찼다. 집주인이 내준 방의 안락하지 못함에 대해 항의를 표하자, 성현은 맘에 안 들면 꺼지라는 식으로 인정머리 없이 그의 불만을 일축했다.

애초에 그딴 손바닥만 한 방이 아니라 최소한 발코니라도 있는 멀쩡한 걸 내줬으면 자신이 이 시간에 담배를 피우려고 굳이 여기까지 내려오는 일은 없었을 터. 그 바람에 본의 아니게 쿵떡거리는 적나라한 소리를 듣게 된 게 아닌가.

그가 다소 뻔뻔스럽게 집주인을 원망하는 동안에도 형제의 떡 치는 소리는 그의 귓가를 전전했다. 유현은 거실 한편에 덩그러니 서서, 정원으로 나가는 유리문을 흘끗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그는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몸을 돌려세웠다.

못 들은 척 원래 계획했던 대로 정원으로 나가 담배를 피울까도 생각했지만, 관두고 그냥 방으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저택의 구조를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탓에 껄끄러운 가능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여라도 주인 침실의 창문이 정원을 향해 나 있다면…….

제 형이 섹스하는 모습을 생 라이브로 보게 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형수가 될 사람을 놀라 까무러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고.

“……적당히 좀 하지.”

소음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절로 튀어나온 혼잣말에는 비꼬려는 의도는 없었다. 진심으로 약간 걱정이 되었다.

“짐승이냐. 저러다 한아연 기절하는 거 아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제 동생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지,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난스러운 과보호를 일삼더니. 사람이 변해도 너무 돌변한 게 아닌가. 고삐 풀린 맹수도 저것보다는 덜 흥분했을 것 같았다.

“……아니. 형수.”

유현은 뒤늦게 자신의 말을 정정하고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아직은 형수라는 호칭이 어색하기만 해서 그런지, 전혀 입에 붙질 않았다.

예전부터 형이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진짜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리라곤 사실 예상하지 못했다. 진작 눈이 뒤집혀 있던 형과는 달리, 아연은 늘 한 발짝 뒤로 훌쩍 물러나 벽을 세우고 있는 게 유현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미국에서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정말이지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직접 두 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나는 유현이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자세한 정황을 포착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늘 오후, 그가 예고 없이 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도 마찬가지.

헐겁게 여민 가운 앞섶 사이로 흉물스럽게 발기한 물건을 다 내놓고 있는 성현의 모습을 못 본 척해 주느라 진땀깨나 흘려야 했다. 온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으로.

탁.

2층 계단에 다 올라선 후에야, 유현은 기척을 죽이기 위해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사랑이 넘치는 1층의 상황을 마음으로는 충분히 이해하나, 그는 남이 섹스하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감상할 정도의 무뢰배는 아니었다.

내가 무슨 관음증 환자도 아니고…….

산만 한 덩치를 해 가지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걷고 있는 지금 자신의 꼴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가 막힌 유현이 바람 빠지는 듯한 실소를 흘렸다.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것 같은 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워 보려 고개를 잘게 털던 그가 돌연 얼굴을 들고 허공을 응시했다. 얼마 전 본인이 벌였던 한심한 짓거리가 문득 생생하게 그의 뇌리를 스친 까닭이다.

유현은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사람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와……. 나 완전 개새끼였네.”

자조적인 깨달음으로 유현이 낮은 침음을 흘렸다. 입매가 비틀린 조소로 일그러졌다. 이런 걸 죗값을 돌려받는다고 해야 하나?

그의 눈앞에 그리 달갑지 않은 기억이 재생되었다.

젖은 살갗이 부딪히는 천박한 소리와 물기 어린 신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질러대던 침대.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금속 재질로 마감된 침대 헤드가 침실 벽을 시끄럽게 쿵쿵 찧었다.

그런 와중에, 우습게도 그의 신경은 온통 침실 바깥에 쏠려 있었다.

“하…….”

그날, ‘그 여자’는 자신이 조금 전 1층에서 들었던 것과 유사한 소리를 죄다 들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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