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준성은 담배를 뻐끔거리며 즐거운 듯 웃고 있는 놈들의 의도를 문득 깨달았다.
그가 내기 참여를 거절하면 죄다 두 사람이 헤어질 거란 쪽에 베팅을 거는 바람에 내기판이 나가리가 됐다는 소문이 불붙인 듯 퍼질 것이다. 그 꼴이 보기 싫다고 반대편에 돈을 걸면…… 결국 돈을 잃느냐, 기분을 잃느냐의 문제였다.
지금 당장 날려 먹어도 상관없는 여유 자금이 얼마나 있더라.
차라리 돈을 잃는 쪽으로 결단을 내린 준성이 머릿속으로 베팅액을 헤아리던 때였다.
“재미있는 거 하네?”
머리 꼭대기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준성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닫기 무섭게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입술 사이에 물고 있던 담배를 뚝 떨어뜨리는 놈. 사레가 들려서 콧구멍에서 허연 연기를 내뿜으며 방정맞게 콜록거리는 놈.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마시던 술을 입가에 줄줄 흘리는 놈. 팔을 들어서 이마를 짚으며 사색이 된 얼굴빛을 숨기는 놈까지.
준성은 통쾌한 기분으로 테이블을 살펴본 후에 고개를 돌렸다.
권성현이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꿰어 넣은 채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 핸드폰 안의 명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각의 이름이며 판돈의 크기까지 훑어 내리는 표정은 짐짓 흥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핸드폰 주인이 뒤늦게 화들짝 놀라 손을 벌벌 떨었다. 펄쩍 뛰어오를 기세로 허둥거리며 핸드폰 화면을 가리자 권성현은 아쉽게 됐다는 얼굴로 혀를 쯧 찼다. 그러고는 눈이 마주친 준성을 향해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
녀석의 잘나 빠진 낯짝에 가려 사람들이 보통 권성현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그는 뭐든 한 번 본 것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집요하고 무서운 놈이다.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는 걸 보니, 이제 데스노트나 다름없는 그 명단을 벌써 머릿속에 다 새겨 놓고, 어떻게 하면 더 고통스럽게 되갚아 줄지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성현이 엄지로 아랫입술을 느긋하게 쓸며 한가로이 웃었다. 그 모습을 흘끗 올려다본 준성은 내기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놈들의 명복을 빌기 시작했다.
너넨 다들 좆됐다.
저건 바로 권성현이 빡치다 못해 완전히 돌아 버렸다는 신호였다. 짜증과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을 때의 권성현은 마치 마지막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평소 그에게서 보기 드문 미소를 지어 주어 상대방을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평정심과 우아함을 잃지 않는 황태자. 어떤 이들은 그따위 낯간지러운 수식어를 붙이며 그가 퍽 너그러운 성정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실은 권성현의 더럽게 잘난 껍데기에 가려서 고약한 성질머리가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덜떨어진 녀석들이 성현의 입가에 걸린 나긋한 미소를 보고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는 악의로 가득 찬 험담을 지껄이더니, 막상 성현이 등장한 후로는 몹시 순종적인 태도로 열심히 그의 눈치를 살핀다. 그들이 성현에게 가진 열등감의 기저엔 그와 친해지고 싶은 거대한 욕망이 깔려 있었다.
“오, 오해하지 마, 권성현. 우리끼리 심심해서 그냥 재미 삼아 해 본 거니까. 혹시 기분 나빴으면…….”
명단을 작성했던 핸드폰을 슈트 안주머니에 다급히 쑤셔 넣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기분 나쁘긴.”
주눅 든 목소리를 뚝 끊으며 끼어든 성현이 남자의 어깨를 짚고 툭툭 두드렸다. 성현의 손길이 닿은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말했잖아. 재밌어 보인다니까?”
“…….”
“우선 좀 앉을까?”
“어어……. 여기 앉아.”
성현의 나긋한 목소리에 그에게 어깨를 잡혀 있던 남자가 후다닥 일어나 자리를 비켜 줬다. 성현은 당연하다는 듯 남자가 빼 주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담배 한 대 할래?”
기다렸다는 듯이 성현의 앞으로 담배와 술잔이 넘어왔다. 어떤 이는 이미 라이터를 찰칵거리며 그가 입에 담배를 물면 당장이라도 담뱃불을 붙여 줄 기세였다. 그러나 성현은 귀찮은 듯 손을 휘저었다.
“됐어. 그것보다, 나도 좀 낄까 하는데.”
그의 말에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자기를 주인공으로 한 내기판에 본인이 끼겠다니? 어이없는 소리를 듣고 황당해진 여러 개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켰다.
준성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현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아, 아무리 심심풀이 땅콩으로 하는 거라지만 판돈이 너무 귀여운 수준인데, 이래 가지고는 재미없지. 먼저 판돈부터 올리고.”
동의하냐는 듯 성현은 느른한 눈으로 테이블을 훑었다. 점차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남자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입술을 붙인 채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성현의 입가에 너그러워 보이는 미소가 짙어질수록 불길한 분위기가 퍼졌다. 테이블을 둘러싼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자리를 뜨고 싶은지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이들이 몇몇 눈에 띄었지만, 진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를 지닌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난 둘이 결혼한다는 쪽에 걸까 하거든.”
성현을 제외한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얼어붙었다. 적막 속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충격에 빠진 준성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결혼? 진짜 결혼을 한다고? 권성현이 한아연이랑?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조용한 테이블에서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은 사람은 성현뿐이었다. 조용하기만 한 반응에 김이 샌다는 듯 그의 입술 사이로 옅은 비웃음이 흘렀다.
“나는 학습 능력이라곤 없는 덜떨어진 놈들이 참 불쾌해.”
오래전부터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 게 있다는 건 익히 알려 준 것 같은데 말이야.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성현의 목소리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매섭도록 냉담했다.
“그런 놈들이 사업한답시고 설치는 같잖은 꼴을 안 보도록 하는 게 나라 발전을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
“여기 취지에도 맞는 것 같고. 안 그래?”
싱긋 미소 짓는 성현의 얼굴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만큼 냉혹하고, 천상의 선물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P 소사이어티는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창대했던 시작과는 달리, 그 끝은 허무하리만치 미약하였다.
회원의 대다수가 연이어 터지는 부실 자산 리스크와 기업 총수의 스캔들, 부채 상환 압박의 콜라보 속에서 연쇄 도산을 맞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10대 재벌을 포함하여 경제계 구조의 판도가 뒤바뀐 격동의 시기였다.
물론 그 모든 게 너그러움을 모르는 맹수의 더러운 성질머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 * *
「안아 줘.」
「……난 그럴 수가 없어.」
한쪽 벽면에 쏘아진 빔 프로젝터 화면 속에서 오래된 고전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를 모두 외워 버렸을 정도로 아연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다.
덕분에 성현 역시 덩달아 같은 영화를 벌써 몇 번째 반복해서 보는 것인지 셀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기실 지겨울 법도 하지만 그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는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를 보며 울고 웃고 즐거워하는 아연을 보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영화에 흠뻑 몰입한 아연은 촉촉이 젖은 눈을 글썽이며 성현의 팔을 끌어안았다. 허리를 휘감고 있던 그의 오른손이 달래듯이 다정한 압력으로 토닥거리는 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영화를 볼 때의 자세는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지만, 최대한 몸의 많은 부분을 서로 붙이고 있는 점만은 매번 같았다. 지금의 아연이 성현의 가슴팍에 등을 기댄 채 완전히 안겨 있는 것처럼.
거실의 소파에서 뒹굴거릴 때든,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든, 아연이 집 안의 가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성현은 으레 그녀를 제 몸 위에 아기처럼 올려놓고 모든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체력이 남아도는 남자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녀 또한 두 다리가 멀쩡한데 왜 그리 훌쩍 안아 들고 다니지 못해 안달인지 아연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현은 그녀가 제 다리를 사용해 걸어 다니는 것마저 아까워할 정도로 극성이었다.
아연은 단단함을 넘어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의 넓은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그 어떤 안락의자보다도 포근하고 아늑한 품. 바짝 감싸 안아 주는 느낌이 좋아, 아연은 고개를 올려 그의 턱에 입술을 부딪치며 꼼지락거렸다.
자극이 되었는지 성현이 끙 하고 침음을 흘리며 아연의 몸을 고쳐 안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끌어갔다. 시선은 여전히 장면이 바뀌고 있는 영화 화면에 고정한 채로.
“……뭐야.”
아연은 웃을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타박 아닌 타박을 던지며 성현의 손아귀에 붙잡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긴. 네 남편 좆이지.”
성현은 느긋하게 머리를 기댄 자세로 눈을 비스듬히 내리뜨고 말했다. 한껏 여유를 부리는 태도와는 달리 아연의 손 아래에 느껴지는 것은 여유 한 점 없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아직 결혼식까지는 일주일도 더 넘게 남아 있건만, 지난겨울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이후로 그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은 한결같이 앞서 나가 있었다.
손바닥에 비벼지는 기둥이 더욱 굵고 딱딱하게 부풀어 오르는 걸 보니, 제 입으로 스스로를 남편이라 명명하고는 착실하게 흥분을 더한 모양이었다.
“빨아 줄까?”
아연의 손등 위를 제 손으로 덮고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위아래로 훑어대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