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아연이 성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연회장에 나타나기 무섭게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일시에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뻣뻣하게 굳어지는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는 다정하고 든든한 손길이 없었더라면, 아마 5분도 채 버틸 수 없었을지 모른다.
후원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경매에서 성현은 최고가를 던진 후 제 할 일 끝났다는 듯 아연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나온 길목에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모여 수군덕거리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있었다.
그중의 몇몇은 아연이 또렷이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두 집 살림. 내연녀. 사생아. 자신을 향해 그런 악의적인 말을 던지던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학창시절 아연을 향해 들으란 듯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고 이죽거리는 데 스스럼이 없던 이들이 우습게도 성현의 앞에선 시선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다들 땅에 떨어진 돈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딴청을 피웠다.
아연과 성현이 그들을 스쳐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등 뒤에 따라붙는 끈덕진 시선이 느껴졌을 뿐.
“진짜 한아연이네.”
보랏빛을 띨 정도의 검붉고 얄팍한 입술이 비틀리며 남자가 의뭉스럽게 미소 지었다. 예기치 않은 큰 재미를 발견했다는 듯이.
남자는 아연이 허리춤에 맨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는 모습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적나라한 의도를 담은 시선이었다.
그날 그 무리에 섞여 성현과 함께 있는 아연에겐 말조차 걸지 못하던 소심한 남자와는 전혀 다른 인물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입맛을 다시듯 윗입술을 말아 문 남자는 주문대에 몸을 불쑥 기대며 건들거렸다.
“우와, 나 오늘 한아연이 만들어 주는 커피 마시는 건가? 가문의 영광이네. 기대되는데?”
계산대에서 결제를 마친 카드를 뺀 민재가 흘끗 눈을 들었다. 남자는 오로지 아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느물대고 있었다.
“살다 살다 내가 한아연이 타 주는 커피를 마시게 될 줄이야. 학교 다닐 땐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남자의 말에 민재와 규영이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민재는 시선을 내려 카드 표면에 양각된 이름 세 글자를 입 속으로 읊조렸다.
홍경욱…….
“얼마나 맛있을지 벌써부터 군침 도는 것 같다. 어쩐지 이상하게 요 옆을 지나가는데 커피가 마시고 싶더라니. 그냥 꼴리는 대로 들어온 카페에서 내가 한아연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 오늘 로또라도 사야 하나?”
“손님, 카드 받으세요.”
민재는 음험한 뉘앙스로 나불거리는 홍경욱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이만 커피나 받고 꺼지란 식으로 계산대 너머로 카드를 불쑥 내밀었다. 그러나 홍경욱의 뱀 같은 두 눈에 민재 따윈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홍경욱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여전히 아연을 빤히 바라보며 손을 뻗어 카드를 회수했다. 그러곤 그녀의 떨떠름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쉼 없이 떠들어댔다.
“애들한테 자랑해야겠다. 나 학교 다닐 때 같이 어울리던 애들 알지? 아직도 자주 만나거든. 다들 하는 일이 비슷하다 보니까.”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거들먹거렸다.
“이 바닥에서 비즈니스 한답시고 만나면 다 그놈이 그놈들이라. 아, 저번에 자선 행사에서 너도 봤지?”
그 당시엔 고개를 푹 숙여 눈도 못 마주치고 딴청을 부렸던 주제에, 홍경욱은 마치 그들이 무슨 살가운 대화를 나누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날 스쳐 지나갔던 일을 화제에 올렸다.
“다들 그날 깜짝 놀랐어. 너 졸업한 이후로는 통 그런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었잖아. 자주 얼굴 좀 비치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던 애들 많았는데…….”
그가 불현듯 아련하게 말꼬리를 늘이며 한참 뜸을 들였다.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으려고 하는 건지. 지금까지 와는 격이 다른 허기진 시선이 끈적하게 들러붙는다.
“권성현이 잘해 줘?”
은밀하게 낮춘 남자의 목소리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제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꼿꼿하기만 했던 여자를 향한 때늦은 찌질한 분노. 그런 여자의 옆을 떡하니 차지한, 누가 봐도 저보다 잘난 남자를 향한 시기와 질투, 뿌리 깊은 열등감. 거기에 음습한 희롱까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는 눈빛에는 성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아연이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카페를 오픈하고 서비스업에 종사한 지 햇수로 벌써 3년째.
그동안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유형의 손님들을 숱하게 겪어 왔다. 덕분에 이젠 웬만큼 당혹스러운 상황에도 평정을 유지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하지만.
조금 전 홍경욱의 치졸하고 건방진 발언은 그녀의 폭넓은 포용력과 너그러운 인내심을 기어코 초과하고야 만 것이다.
마침 커피를 다 내린 규영이 커피잔을 탁 하고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녀 또한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나불거리는 홍경욱이 마음이 들지 않는지 커피를 내려놓는 손길이 평소답지 않게 과격했다. 커피잔 뚜껑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갈색 액체가 역류하듯 찔끔 솟아 한 줄기 흘러내렸다.
남자의 못마땅한 시선이 지저분하게 젖은 컵에 흘끗 향했다. 아연은 규영의 어깨를 당겨 자신의 뒤쪽으로 보낸 뒤 말했다.
“손님, 커피 나왔습니다.”
이거나 받고 꺼져. 아연의 잠잠한 눈길엔 험한 속마음이 내포되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남자는 눈치 또한 없었다.
“손님?”
아연의 사무적인 대꾸에 홍경욱이 심술맞게 되물었다.
“딱딱하게 손님은 무슨 손님이야. 듣는 사람 서운하게? 그러고 보니까 아까부터 나만 혼자 떠드는 것 같네. 설마 날 기억 못 하는 건 아닐 테고.”
“…….”
그를 가만히 응시하는 아연의 눈매가 더없이 무미건조했다. 자신만만하던 홍경욱의 눈동자가 좌우로 거세게 흔들렸다.
그가 권성현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은밀한 뉘앙스를 띠었던 건, 한아연을 자극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자선 행사에 권성현과 한아연이 함께 나타나 두 사람이 기어이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분위기를 풍긴 일은,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여전히 뜨거운 화젯거리였다.
홍경욱 역시 그날 이후 문득 한아연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그 예쁜 얼굴을 뻣뻣하고 도도하게 굳히고 다니기로 유명했던 한아연이 과연 애인 앞에선 어떤 풀어진 표정을 지을까 따위가 엄청나게 궁금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의 우연한 마주침이 반가웠다. 마침 주인 지키는 개새끼처럼 늘상 한아연 곁에 버티고 서 있던 귀찮은 장애물도 없었다.
저도 이제는 여자한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조차 모르던 풋내기 시절도 아니니, 지금이 한아연과 친해지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경욱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들뜬 기분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그녀에게 말을 붙일수록 저 혼자 일방적으로 떠들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어 점차 심기가 뒤틀렸다. 젠틀한 척 다가서는 것을 집어치우고 일부러 희롱하는 말을 던진 것은 그래서였다.
저 고요하고 차분한 얼굴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바엔 당혹감과 수치심으로 물드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으니까.
다만 그가 기대했던 반응 중 그 어떤 것도 내비치지 않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설마, 기억 안 나?”
설마 자신을 기억 못 할 리 없다는 근거 없는 믿음과 얄팍한 기대감이 흔들렸다. 불안하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네. 그런 편이네요.”
아연은 건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평소 그녀가 손님을 대하는 나긋한 태도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었으나, 목소리만큼은 세상 차가웠다.
저를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고 나올 줄은 미처 몰랐는지, 홍경욱은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벙찐 얼굴이었다. 입을 벙긋거리며 어버버 더듬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쪽팔린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하는 걸 보니 적어도 수치심은 아는 모양이었다. 화르르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온 얼굴에 번진 홍조가 홍경욱의 귀 끝까지 터질 듯이 달궜다.
“뜨거우니 조심하시고요, 안녕히 가세요.”
아연은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안내했다. 홍경욱이 입술을 사납게 씰룩거리며 커피잔을 낚아챘다. 자존심에 훼손을 입은 남자가 욕설을 삼키며 몸을 홱 돌려세웠다.
화가 난 발걸음이 대리석 바닥을 쿵쿵 울렸다.
씩씩거리며 카페 유리문을 벗어난 홍경욱은 쪽팔림을 이기지 못하고 길바닥에 커피잔을 거칠게 내팽개쳤다. 난폭하게 발을 구르더니 뜨거운 커피가 튀었는지 손을 파르르 털어대기까지 한다. 지나가던 행인이 멀찍이 거리를 띄우며 경계 섞인 눈길로 그를 흘끗거렸다.
“뭐야, 저 미친놈은…….”
그 꼴을 유리문 너머로 지켜보던 규영이 황당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휴우.”
아연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움직였다. 그간 갖가지 이상한 유형의 손님들을 겪은 탓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권성현이 잘해 줘?’
무슨 상상을 하는지 제게 들러붙은 시선이 쉴 새 없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는 모욕감에 이가 갈렸다. 사실은 손님이라고 불러 주고 싶지도 않았다. 면상에 소금이라도 뿌리고 싶었지만, 죄 없는 직원들 앞에서 험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간신히 참은 참이었다.
아연은 청소 도구를 모아 두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는 눈치 없이 굴던 민재가 웬일인지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한발 앞서 앞을 막아섰다.
“제가 치울게요. 여기 계세요, 사장님.”
규영이 조금 의외라는 듯이 눈매를 늘이고 민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 여보세요.”
민재가 유리문을 열고 나갔을 때, 홍경욱은 여전히 카페 입구의 캐노피 아래에 서서 핸드폰으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나? 지금 서초동. 검단신도시 건축 투자 건 들어가려고 작업 중이라고 했잖아.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비쳐서 눈도장 찍으려고, 어어, 태강 본사 들어가려는 참이지. 야, 근데 내가 여기서 누굴 만났는지 알아?”
홍경욱은 청소 도구를 들고 나온 민재를 흘끗 곁눈으로 쳐다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시시덕거리는 통화를 이어갔다.
“시간이 좀 어중간하길래 시간이나 때우려고 잠깐 태강 본사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더니 글쎄, 여기에 한아연이 있네?”
다시금 자신을 무시하던 그녀의 반반한 낯을 떠올리는 경욱의 입술이 사납게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