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바깥의 겨울 날씨가 무색하게 얼음을 한가득 넣은 레모네이드에 빨대가 푹 꽂혔다. 음료를 쭈욱 빨아 삼킨 규영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아연이 그런 규영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비교적 바쁜 시간이 지나가고 가게가 한가해졌을 때 갖는 휴식 시간.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규영의 낯빛이 어두웠다.
늘 먼저 종알종알 떠들던 규영에게선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허공을 응시하며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깨물던 규영이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규영 씨, 무슨 일 있어요?”
아연이 커피잔을 가까이 당겨 쥐며 넌지시 물었다.
“아아.”
규영은 괜스레 빨대를 흔들어 컵 안을 휘저으며 뜸을 들였다.
“실은 고민이 있어서요.”
“무슨 고민?”
“그게……. 휴우, 남자 친구 문제예요.”
규영의 남자 친구라면 종종 카페 앞으로 그녀를 데리러 오던 걸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아연이 아는 한, 규영이 가장 오랜 기간 교제를 이어가고 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한 달 전쯤엔가 남자 친구가 세종시로 직장을 옮겼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예전만큼 자주 만날 수 없는 데서 서운함이 생긴 걸까. 아무래도 장거리 출퇴근을 하다 보면 피곤할 수 있을 테니…….
아연은 울적해진 규영에게 초콜릿 한 알을 살그머니 건넸다.
“남자 친구가 왜요? 얼마 전부터 세종시로 출퇴근한다고 했죠?”
“네. 그것 때문에요.”
규영은 초콜릿을 냉큼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예전만큼 자주 보지는 못할 테니까. 주중에는 만나기 어렵죠?”
아연의 위로조의 말에도 규영은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이틀에 한 번씩은 만나기는 하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세종시에서 출퇴근을 하는데 이틀에 한 번씩 데이트라면 그래도 꽤 자주 만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만나는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규영의 표정이 퍽 심각했다.
규영은 목이 타는지 음료 컵의 뚜껑을 열어 레모네이드를 쭈욱 들이켰다. 무언갈 곱씹듯 인상을 찡그리더니 이윽고 툭 내뱉듯이 말했다.
“……그게 안 서요.”
푸학!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민재가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커피를 힘차게 내뿜었다.
콜록콜록.
얼굴이 시뻘게진 민재가 허리를 굽힌 채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다. 그가 흘린 커피를 닦기 위해 아연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크게 당황한 민재가 허둥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심하게 사레가 걸렸는지 잔기침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민재는 아연의 손에 든 휴지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그가 재빠른 몸짓으로 계산대에 뿜은 커피를 닦아 냈다. 그러곤 반쯤 젖은 휴지로 제 턱까지 벅벅 닦았다. 규영의 폭탄 같은 말을 듣고 여간 당황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안 선다니.
예기치 않게 다른 사람의 사적인 속사정을 알게 되어 당혹스러운 것은 아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멀쩡하던 남자 친구의 갑작스러운 신체 변화에 얼마나 놀랐으면 그런 고민을 털어놓았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연은 덩달아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낯빛이 시무룩한 규영과 여전히 기침을 콜록거리는 민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잘 서지도 않고, 어찌어찌해서 세워 놔도 하다 보면 금방 죽어 버리거든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냥 축 늘어져 버려요. 예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안절부절못하는 민재는 안중에도 없이 규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얘기하면 할수록 기가 막힌지 규영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자기 딴에는 매일 장거리 출퇴근을 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아직 서른도 안 된 남자가 좀 피곤하다고 갑자기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거예요?”
규영이 통탄스럽다는 듯 얼음만 남은 컵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아연은 난감함에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연이 아는 올해로 딱 서른이 된 남자의 경우를 보면 그곳이 서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너무 자주, 줄곧 세차게 발기해서 혹시 아프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남는 게 체력이라던 본인 말처럼 성현은 도통 피로라고는 모르는 사람 같았다. 어디 그뿐인가. 보통 사람 같아서는 지쳐 쓰러질 정도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난 직후의 권성현은 도리어 더욱 통제 불가능한 괴물처럼 굴고는 했다.
마치 그녀를 안음으로써 에너지를 얻는다는 듯이.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안에 깊숙이 들어온 후에야 성현이 비로소 나직하게 내쉬는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을 들을 때에는 어쩐지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래를 사납게 꿰뚫을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는 성기의 강직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찌 됐든 자신이 아는 유일한 표본인 성현이 정상 범주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아는 바인지라, 아연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저 곤란함에 코끝만 찡그렸다.
규영은 물방울이 맺힌 컵 표면을 문질거리다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자기 나름대로 대책이랍시고 하는 말이 당분간은 주말에만 하는 게 어떠냐는데, 저는 그럴 거면 걔를 왜 사귀나 싶거든요.”
아연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말에만 하자니, 그건 좀 아니지.
“다른 남자 같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텐데,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졌나 봐요. 새로운 회사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겠지 싶다가도……, 근데 또 그 힘없이 축 늘어진 걸 보면 천년의 정도 팍 식는다니까요!”
규영의 미간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원래는 진짜 잘 맞았었거든요. 분명 예전에는 안 그랬었는데 자꾸 하다가 죽으니까, 사실 자존심도 상하고…….”
“아니, 그게 왜…….”
아연이 끼어들어 규영의 자존심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일축하려는 찰나였다.
“규영 씨가 왜요?”
그새 낯빛이 원래대로 돌아온 민재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말했다. 규영과 아연의 시선이 동시에 민재를 향했다.
“남자 친구분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병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민재가 의자를 드르륵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걸음에 규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민재의 손이 빈 컵을 쥐고 있는 규영의 손가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민재는 그녀의 손안에서 훌쩍 컵을 빼내며 흘리듯 말했다.
“그리고, 규영 씨가 아까워요.”
규영이 손가락을 펴며 몸을 움찔 움츠렸다. 민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빈 컵을 개수대에 던지듯 놓는 민재의 뒷모습을 규영이 멍하니 응시했다.
미간을 좁힌 채 조금 전 민재가 한 말을 잠시 곱씹던 규영은 퍼뜩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민망하다는 듯 검지로 콧잔등을 쓱 훔치며 웃었다.
“아,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네. 죄송해요, 사장님. 너무 많이 놀았죠? 이제 휴식 끝! 다시 일할 준비 할까요?”
아연은 규영과 민재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에 잠자코 뒤로 빠져 있다가 규영을 따라 일어났다. 앉아 있던 자리를 정리하며 흘끗 분위기를 살폈다. 규영은 여전히 마음이 복잡한 눈치였다.
“어서 오세요.”
손을 깨끗하게 씻고 먼저 주문대 앞에 선 민재가 때마침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드시고 가시나요?”
“아뇨.”
“네, 그럼 테이크아웃 잔에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카드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주문대 너머로 성의 없이 내밀던 남자가 문득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떴다.
“한아연?”
개수대에서 손을 씻던 아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손끝에서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연은 무심코 젖은 두 손을 말아 쥐었다.
사납게 들린 눈매와 반대로 축 처진 입꼬리.
고등학교 시절 아연이 혼자 있을 때면, 마치 그 시간을 노린 것처럼 어김없이 나타나 주변을 맴돌며 시답잖은 말을 걸어 오던 남자애.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 반가운 듯 씨익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 위로 어렴풋이 겹쳐졌다.
이름 같은 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그가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것은 학창시절 그들 사이에 딱히 특별한 접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얼마 전 스치듯이 마주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도성그룹의 창립 기념일 후원 행사가 떠들썩하게 치러졌다. 정·재계의 주요 인사가 모이는 자리인 만큼 성현은 매년 참석하는 행사였고, 아연은 올해 처음으로 그 자리에 성현과 함께했다.
‘남의 잔칫집에 예의상 얼굴만 내미는 거니까, 너무 부담스러워할 거 없어. 그냥 자리 채워 줄 겸 뱃놀이 간다고 생각해. 그거 인천 앞바다에 배 띄우고 하거든.’
성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고는 매번 그러하듯 음란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빛냈다.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가 능청을 부렸다.
‘아, 크루즈선에서 하는 파티라 방도 하나씩 내주던데, 우린 그냥 거기나 처박혀 있을까?’
한가로운 소리나 늘어놓는 성현과는 달리 아연은 긴장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릴 적에는 그런 행사에 뭣도 모르고 불려 가 강준의 뒤에 서서 잔뜩 주눅 들어 있곤 했다. 성인이 된 후로는 시선이 쏠릴 만한 자리를 의식적으로 피해 왔고.
하지만 성현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전처럼 마냥 피하고 도망 다닐 수는 없는 일.
성현의 말처럼 손님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아연은 그저 참석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나마 태강에서 주최하는 행사가 아니니 그리 주목받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애써 기대했지만, 순전히 희망적인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