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5화 (72/96)

<에필로그 5화>

은애의 말에 이쪽을 돌아본 민환이 비어 있는 소파를 턱으로 가리켰다.

“어, 그래. 이리 와서 앉거라.”

아연은 새하얗게 굳은 얼굴로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민환이 그런 아연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끼리만 있어서 놀란 모양이구나. 내 너희 둘이 만난다는 소릴 듣고 밥 한 끼 함께 하자고 성현이 놈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렇게 여러 번 얘기했는데, 저놈이 들은 척도 안 하기에 이 늙은이가 꾀를 좀 썼다.”

아연은 슬쩍 성현을 돌아보았다. 이제껏 그는 한 번도 제게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제 가족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늙은이가 죽어서 관짝에 들어가고 나서야 데리고 오려나 싶어서.”

당연히 마주하기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자선 행사 초대장을 꾸며서 자신을 불러냈을 정도면, 대체 성현이 얼마나 권 회장의 말을 철저히 무시해 왔던 건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저 팔불출 같은 놈은 널 숨겨 놓고 꽁꽁 싸고돌지 못해서 아주 안달이 났던데. 왜, 내가 무섭게 할 것 같드나.”

“할아버지.”

성현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끼어들었다. 아무리 할아버지여도 제 여자한테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겠다는 뜻의 불충한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위아래도 없이 회까닥 돌아 버린 손자 놈의 눈길에 권 회장이 기가 막힌 듯 혀를 찼다.

저놈이 사랑에 눈이 멀다 못해 이제 제 할아비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자 마치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는 것 같았다. 아연은 불효막심한 표정을 띠고 있는 성현의 손을 달래듯 가만히 눌렀다. 그리고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죄송해요.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마땅한데……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제 손자를 괘씸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민환의 시선이 다시 아연에게로 향했다.

권 회장은 거대 기업을 호령하는 총수답게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모두가 불가능이라 여겼던 시장에서 사업을 개척해 끝내 성공시키고 경쟁자를 제압하면서 자연스럽게 강해진 기운이었다.

그러니 고작 그녀 하나를 손아귀에 쥐고 뒤흔드는 정도는 권 회장에겐 일도 아닐 것이다. 쏟아지는 따가운 눈길에 아연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때 민환이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회장님은 무슨. 너 어렸을 적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면서 살가운 소리도 잘만 하더니, 이제 다 컸다고 그렇게 격식 차리는 거 보니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아, 아니에요.”

크게 당황한 아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호칭을 덧붙였다.

“……할아버지.”

권 회장의 화법에서 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성현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유려한 협박조의 말투는 제 조부에게 물려받은 찬란한 유산임이 분명했다.

계속해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느니, 아연이 당혹할 만한 말만 골라서 늘어놓는 민환의 낯빛은 몹시 태연자약했다. 꼭 누구처럼 말이다.

“예전엔 여기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발길도 딱 끊고 말이야.”

“그건 이이 때문이잖아요, 아버님.”

민환의 말에 은애가 부드럽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애비가 왜?”

“이이가 전에 애들이 서재에 숨어들어서 못된 장난 치는 걸 보고, 성현이가 순진한 애한테 나쁜 물을 들인다 싶어서 버럭 화를 냈다네요. 그걸 보고 그날 아연이가 많이 놀랐다지? 자기 때문에 그 후로 아연이가 더 이상 안 오는 것 같다고, 성현이 아버지가 그때 은근히 마음 썼었는데…….”

은애가 그 당시를 떠올리듯 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아연은 자신도 모르게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성현의 아버지, 윤재를 바라보았다. 윤재는 그런 말을 뭣 하러 하냐는 듯한 얼굴로 제 아내를 돌아보며 점잖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런 마음이셨을 줄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오히려 제가 성현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노하신 줄 알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실 거라는 걱정이 늘 마음속 깊숙이 뿌리박혀 있었다. 성현의 앞에 서기 두려웠던 것도 어쩌면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윤재의 시선이 문득 아연을 향했다. 피할 새 없이 시선이 마주쳤다.

서늘한 눈매와 깎아 놓은 듯 수려한 콧대, 모양 좋게 휘어진 입술 끝과 남자답게 다부진 턱선은 놀라우리만치 성현과 닮아 있었다.

아연은 무심코 생각했다. 아마 긴 세월이 흐르면 성현이 저런 모습이겠지.

어쩐지 마음이 뭉클했다.

그런 아연을 잠시 응시하던 윤재가 크흠, 짧게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애들 배고플 텐데, 식사부터 하지.”

윤재의 말에 다이닝 룸 입구에 다소곳이 서 있던 직원이 식사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연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들어가자.”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평범한 그 말이 어째선지 아연의 가슴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길 거라 지레 겁먹고 몸을 움츠렸던 지난 시간이 억울하거나 허무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직 다 벗겨지지 않은 상처를 얼룩처럼 덕지덕지 묻힌 자신을 그저 별말 없이 푸근하게 감싸 주는 공기에 마음이 뻐근하게 차오른 것이었다.

제일 앞서서 다이닝 룸으로 향하던 권 회장이 갑자기 뒤로 돌아 소파에서 몸만 일으킨 채로 가만히 서 있는 아연을 바라보았다. 얼른 따라오지 않고 뭐 하고 멍하니 섰냐는 듯 채근하는 눈빛이 작살처럼 날아왔다.

“들어가재도.”

저를 챙기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에 연한 미소를 지은 아연이 고개를 작게 숙였다 들었다.

“네, 할아버지.”

민환은 아연의 ‘할아버지’ 소리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던 성현은 정작 진짜 손주들에게는 회장님 소리를 숱하게 듣는 양반이 왜 저 호칭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세 어른의 뒤를 따라 다이닝 룸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그새를 못 참고 옆에 바짝 붙어 선 성현이 슬그머니 아연의 손을 잡아 왔다. 자선 행사가 아니라는 얘길 미리 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영 걸리는 모양이었다.

“놀랐어?”

“……조금.”

그가 고개를 기울여 아연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댔다. 그러고는 그녀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벌은 이따가 침대에서 받는 걸로.”

벌을 받겠다면서 무척이나 기대하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그가 아연의 손을 쥔 손아귀에 힘을 꾸욱 주었다.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아연의 얼굴 위로 근심 한 점 없는 맑은 웃음이 꽃처럼 피었다.

* * *

“나 안 들어갈래. 들키면 어떡하려고.”

“괜찮다니까.”

성현은 깍지 낀 손을 당기며 아연을 잡아끌었다. 아연은 발끝에 힘을 주고 서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버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두 사람은 지금 윤재의 서재 앞에 서서 들어가네, 마네의 문제로 서로 투닥거리고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의 식사는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태송현 지붕 아래에선 긴장한 목구멍 안으로 쌀 한 톨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완전한 오산이었다. 어느 유명 한식당과도 비교하지 못할 만큼 아연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이 줄줄이 코앞까지 내밀어져서 조금씩 맛보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다시 응접실로 돌아가 윤재가 직접 내려 주는 커피를 마셨다. 태강그룹 권윤재 부회장의 사적인 취미가 핸드드립일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아연은 그가 커피 내리는 모습을 신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퍽 익숙한 그림인 듯 몹시도 심드렁해 보였다. 간만에 제 취미 생활에 관심을 갖는 구경꾼이 있어서 그런지,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리는 내내 윤재는 은근히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향기로운 커피가 담긴 잔이 테이블에 놓이고, 민환과 윤재는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현이 아연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며 다짜고짜 손을 잡아끌고 온 곳이 바로 여기, 서재 앞이었다.

“아버지는 아래층에서 할아버지 바둑 상대해 주시느라 한동안은 못 올라오실 거야.”

“옛날에도 네가 그렇게 얘기했는데 결국 들켰잖아. 내가 두 번이나 속을 줄 알고?”

“기억력도 좋아라. 걱정하지 마. 이번엔 진짜야. 예전부터 너한테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있다니까?”

문간에 서서 버티던 아연의 몸이 스르르 딸려 들어갔다. 성현이 등 뒤에서 문을 달칵 닫았다.

아연은 불안한 눈으로 어두운 서재 안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을 비추는 간접 조명을 켠 성현이 아연의 어깨를 끌어 벽 앞에 세웠다.

권씨 형제의 사진들이 벽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연은 제 바로 앞에 걸려 있는 사진에 홀린 듯 시선이 멈추었다.

‘우리 본가엔 아직도 너랑 내가 입술 비비는 사진이 벽에 걸려 있어.’

언젠가 성현이 말했던 사진이다.

유치원 학예회 날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 무대에서 찍었던.

어린 성현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고 울고 있었는데,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듯 그 뺨에 쭉 내민 입술을 가져다 붙인 어린 여자애의 심드렁한 얼굴이 볼수록 우스웠다.

아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성현이 뒤에서 그녀를 꽉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그가 아연의 어깨에 턱을 얹은 채로 말했다.

“어때. 귀엽지.”

아연은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릴 적 자신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귀엽긴 뭐가 귀여워. 표정은 뚱한 데다가, 싫다는 애한테 뽀뽀는 왜 하고 있는 건지…….”

“아니. 너 말고, 나 말이야.”

아……. 자기 얘기 한 거였어?

1